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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순환선 / 이도훈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死因)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당선소감>

   "기우뚱해도 웃으며 말할 여유 생겼다"



  올해는 나에게 다사다난했던 해였다. 시를 쓰기 위해 차를 없애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다. 손이 많이 가던 보습학원도 작년 이맘때쯤 정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일에 치이며 하루하루 정신없이 산 해였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시잡지 '시마(詩魔)'를 창간한 해이기도 하다.

  '순환선'은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다가 환승역을 한참 지난 후 되돌아오면서 쓴 시이다. 늦어진 약속시간엔 좋은 핑계가 생겼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하는 수 없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면서 '나는 정말 바쁜 것'인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이 시를 썼다.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바빠 보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런 생활에 이미 단련되어 있어서 나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순환이란 말을 우리 삶에 비춰보기로 했다. 하루가, 일 년이, 한 생애가 우리에게 순환이라고 생각한다. 그 바쁜 일과 중에서 잠시 느릿느릿 가보고도 싶었다.

  지구가 아무도 모르게 기우뚱거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집에 뭔가를 놓고 나왔거나 환승역을 지나친 것이라고 웃으며 말할 여유가 생겼다.

  한라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정대구 교수님과 함께 시 공부를 한 온새미로 동인들, 네이버 문학카페 시산문, 시마 회원들께 감사하다. 특히 한국시인협회 윤석산 회장님과 여러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더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 본명 이양훈 
  ● 1971년생  
  ●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온새미로 동인 
  ● 시마(詩魔) 발행인


  <심사평>

  "열차 순환선에 숨 멎은 도시인의 삶

   본선에 올라온 작품들은 합당한 길이에 반해 너무 긴 것들이 많았다. 표현하려는 내용에 걸맞은 길이가 아니라 신춘문예를 의식해서인지 길게 잡아 늘려 집중력과 긴장감이 떨어지곤 했다. 이는 오래 하는 지루한 얘기나 수다처럼 읽는 이를 힘들게 한다. 시는 꼭 짧거나 길어야 하는 게 아니라, 몸에 맞는 옷처럼 생각과 말이 하나의 틀 속에 잘 어우러져야 한다.

  최종심에 오른 '섶섬이 보이는 풍경'(김영욱)은 상당 부분 사물을 의인화함으로써 대상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고는 있으나, 길게 이어지는 묘사가 어떤 울림으로 연결되지 못해 아쉬웠다. 또 이런 묘사 방법은 이즈음 많이 차용되는 것이어서 새로움이 덜했다.

  '로제트 식물'(노수옥)은 무리 없는 상상력의 전개와 시를 이끌어나가는 여유로움이 믿음을 주게 하나, 대상과 화자의 균형이 깨어져 이질감을 보였다. 같은 이의 '시침, 뚝'은 절제된 시각으로 매력 있는 언어 구사를 하고 있는 반면 시인의 의도가 잘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노래를 잘 해요'(김미경)는 4·3의 아픈 가족사를 긴 서사의 담화체로 생기 있게 노래하고 있지만 노래가 너무 길다. 그 노래를 다 들으려면 힘이 빠질 것 같다. 1~6번까지 붙인 것을 2개 정도로 줄이고 좀 더 다듬었다면 당선작과 겨뤘을 것이다. 노안이 시작되는 나이의 슬픔을 여러 상상의 빛깔로 수놓은 '돌, 어슴프레한'도 일정한 수준에 근접해 있다.

  이도훈의 시들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외피 안에 잘 녹아 있음을 보여준다. 옷 입은 이와 그의 옷이 썩 어울리는 것이다. 선자들이 당선작으로 합의한 '순환선'에서는 숨 멎은 한 도시인의 삶이 열차의 순환선에 비유되고, 그것은 마침내 읽는 이로 하여금 일상의 반복적 삶을 각성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적절한 언어를 배치하는 역량이 그의 다른 시들에 고루 나타나 있는 점도 그를 당선자로 정한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힘들지만 행복한 시의 길에 들어서려는 분들에게 축하와 위로의 악수를 건넨다. 머지않아 시의 순환선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기를!

심사위원 : 김병택, 나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