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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할머니의 눈썹 문신 / 이만호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당선소감>


   "포장하지 않고 사람 마음 움직이는 詩 쓰고싶어"


  잠깐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연명치료를 받던 생면부지의 노파가 갑자기 사력을 다해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백년의 말들이 출렁였고 미인(美人)의 청춘이 푸르스름한 눈썹에 가지런히 염되어 있었습니다. 편한 호흡으로 써내려갔던 시인데 뜻밖에 당선의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분이 어디선가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다 내려 놓으려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깊은 고통의 밤 가운데 짧은 꿈을 꾸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늘 네 작품이 최고라고 격려해 주셨고, 환한 웃음으로 수상 소식을 알려주시곤 했던 첫 국어선생님. 그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다시 시를 붙잡도록 만들었습니다. 고(故) 최학규 선생님께 너무 늦은 감사를 바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멋진 시가 탐나서 화려한 수사로 공허함을 포장하고 라캉이나 로트만 같은 이름을 기웃거리기도 했었지만, 결국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시의 진심임을 깨달아 가는 중입니다. 부족함 속 진심의 힘을 믿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증명되지 않은 저에게 시의 길을 열어주신 최동호 선생님. 빚진 마음, 배신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으로 조금씩 갚아가겠습니다. 따뜻했거나 혹은 혹독했던 학형들 모두 고맙습니다. 저에게는 영원히 시인이신 아버지, 우리 엄마, 사랑합니다. 호연·대연, 긍정의 힘을 믿길. 나의 모든 것인 채원에게 남길 것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호일, 최후의 독자일 당신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수료



  <심사평>


  삶의 건강한 구체 다뤄… 한국 시단 큰 재목되길


  예년에 비해 투고된 작품량은 늘었으나 수준은 비슷했다.

  윤지문의 ‘새와 흙’, 강은진의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석상준의 ‘뚜껑’, 김후인의 ‘결치(缺齒)’ 등 네 편의 작품이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뚜껑’은 ‘그냥 썩게 놔두는 것보단 나중에 상하더라도 누군가 퍼먹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게 인생이란 걸 알기 때문에’에서 알 수 있듯이 산문성이 지나치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

  ‘결치(缺齒)’ 또한 빈 집이 늘어나는 시골 풍경을 결치의 이미지와 결부시킨 점은 높이 살 만 하지만 조금 낡은 감이 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남은 두 편 중에서 ‘새와 흙’은 기성시인의 시를 인용한 점이(인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신인으로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과, 또 다른 투고작 ‘새와 구름’에서 구체성이 부족하고 한껏 멋을 부린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당선작은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는 ‘눈썹 문신’을 하는 우리 삶의 독특한 한 현상을 발견한 시적 눈의 신선함에 일단 호감이 갔다.

  특히 눈썹 문신을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에 빗된 점이 해학적이고 애절하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만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암시가 있었으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적 상상력이 판치는 한국시단에서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 이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 시를 당선작으로 밀 수 있는 이유였다.

  당선자가 앞으로 한국시단의 큰 재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심사위원 : 황동규,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