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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사과의 길 / 김철순

 

엄마가 사과를 깎아요

동그란 동그란

길이 생겨요

나는 얼른 그 길로 들어가요

동그란 동그란 길을 가다보니

연분홍 사과꽃이 피었어요

아주 예쁜 꽃이에요

조금 더 길을 가다보니

꽃이 지고 열매가 맺혔어요

아주 작은 아기 사과예요

해님이 내려와서

아기를 안아 주었어요

가는 비는 살금살금 내려와

아기에게 젖을 물려주었어요

그런데 큰일 났어요

조금 더 가다보니

큰바람이 마구마구 사과를 흔들어요

아기 사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어요

아기사과는 있는 힘을 다해

사과나무에 매달려 있었어요

조금 더 동그란 길을 가다보니

큰바람도 지나고 아기사과도 많이 자랐어요

이제 볼이 붉은 잘 익은 사과가 되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길이

툭,

끊어졌어요

나는 깜짝 놀라 얼른 길에서 뛰어 내렸죠

엄마가 깎아놓은 사과는

아주 달고 맛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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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냄비 / 김철순

 

쉿!

조용히 해

저,

두 귀 달린 냄비가

다 듣고 있어


우리 이야기를 잡아다가

냄비 속에 집어넣고

펄펄펄

끓일지도 몰라


그럼,

끓인 말이 어떻게

저 창문을 넘어

친구에게 갈 수 있겠어?

저 산을 넘어

꽃을 데려 올 수 있겠어?




  <당선소감>


   -


  3년 전부터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매실나무도 심고 감나무도 심었습니다. 사과나무도 두어 그루, 배나무도 서너 그루 심었습니다. 그리고 염소 3마리와 강아지 6마리, 오리와 닭도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꽃밭도 만들어 봉숭아도 심고 장미도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벌과 나비도 찾아왔습니다.

  거긴 내 시의 텃밭입니다.

  연분홍 사과꽃이 피었다 지고, 새파란 사과가 달리고, 그리고 천둥과 번개가 지나가고, 그리고 가을 어느 날, 달고 맛있는 사과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사과만 준 게 아니라 시도 함께 주더군요.

  아주 고마운 내 시의 텃밭입니다. 내게 늘 시를 선물하는 아주 고마운 밭인 거지요.

  사과 한 개가 나에게 오기까지, 꽃이 피고 열매를 달기까지, 천둥과 번개를 지나기까지, 그 수고로움을 예전엔 몰랐었거든요.

  이 기쁜 소식을 맨몸으로 겨울을 나고 있는 사과나무에게 달려가 제일 먼저 알려야겠지요. 물론 옆에 있는 감나무나 매실나무에게두요. 언젠가는 그들도 나에게 선물을 해줄 거니까요.

  그런데 어쩌지요. 꼭꼭 숨어버린 벌과 나비랑 봉숭아 예쁜 꽃잎에게는 어떻게 전하지요?

  내 사랑하는 가족들, 오빠와 나의 동생들, 정말 고맙고 사랑합니다. 아버지, 엄마, 외할머니, 하늘나라에까지 이 소식이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함께 글을 쓰는 문우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한국일보와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 많이 쓰겠습니다.



  ● 1955년 충북 보은 출생
  ● 제26회 전국주부백일장
  ● 시부문 장원
  ● 시집 <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서> 등
 



  <심사평>


  소박한 일상 노래, 환상적 서사 빚어내… 당선작 두 편으로


  어른이 쓰고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시를 동시라고 할 때, 그 필요충분조건을 성취하기란 녹록지 않다. 신춘문예 응모작들 가운데 유독 동시 부문의 주제 및 소재가 봄나들이와 나무에 대한 비유 또는 외할머니 이야기, 잠자리ㆍ병아리ㆍ개울ㆍ요술쟁이 등으로 영구불변인 까닭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김규학씨의 '분갈이'와 '노숙자'는 예민하고도 따스한 시선이 돋보였으나 문학적 감흥과 사유를 지나치게 생략함으로써 동심에 가닿기 힘든 시가 되고 말았다. 임하기씨의 '너무 짧은 소풍'과 '봄' 또한 당선작을 결정하고 나서도 눈이 갔던 빼어난 소품들이었으나, 뛰어난 감성이 포착한 풍경화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는 힘이 아쉬웠다.


  당선작 '사과의 길'(김철순)은 다른 응모작들에서 보기 힘든 긴 호흡으로 아기자기한 이미지의 환상적인 서사를 빚어내고 있다. 엄마가 사과를 깎는 동안 아이는 사과 껍질이 내는 '사과의 길'로 들어서고, 꽃 피고 열매 맺어 바람과 햇볕 속에 커가는 생명의 한살이로서의 '사과의 길'을 나란히 걷는다. 마침내 사과 껍질이 끊어지는 시점에 이르러 입안 그득히 달콤한 사과를 맛봄으로써 '사과의 길'이 미각-미감으로 완성되는 결말을 구현해 보인다.(소박한 일상의 노래가 우주 자연을 사유하고 성찰케 할 때 '시'가 된다!) 함께 응모한 '냄비'를 특별히 '당선작 두 편'의 형식으로 소개하는 바, 각각의 작품으로 가늠되는 재능과 역량이 틀림없이 우리 동시 세계를 널리 드넓히리라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용택, 이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