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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 어느 가능성 외 4편



   어느 가능성



돌을 들춰요


주로 돌 밑이거나 어느 틈 사이


나는 돌을 들춰야 하고

들춘 돌에서 C장조를 찾아 애인에게 줄 거예요

애인은 속눈썹을 깜박거려요

애인의 속눈썹을 들추면 푸른 밀림이 거기에 있지요

음, 아름다운 사랑이네요 라고 말했나요

날이 화창해서 잘 어울린다고 말했나요


나는 돌을 들추기 위해 윗돌을 들춰요 음표를 들춰보니 음표 사이로 플라밍고가 핑크빛으로 일어요


나는 돌을 들춰야 하고, 또 나는 어느 돌 밑 보물을 찾는 사람처럼 기대해야 해요 당신 꿈을 들추고 꽃을 들추고 물방울을 들춰요. 계절병처럼 찾아오는, 아직 찾지 못한, 원래부터 있던


쓰르라미가 작은 바람같이 우는 소리를 들춰봐요

길가의 쓰레기통 담장 밑이거나 어느 숲, 나무 구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병인을 앓고 있어요


제 몸엔 그들의 지문이 묻어 있어요. 지문은 매일 밤 푸른곰팡이처럼 번식하고 자라죠

나는 꿈을 들춰야 하고요, 다래끼를 눌러놓은 돌을 들출 때도 있어요 다래끼가 옮아 발갛게 부은 꿈에서 깨


눈을 비벼요 나는 그것이 있다는 걸 믿어요. 단지 어느 꽃에 눌려 있을 뿐이죠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다줄 겁니다*


1

단어를 잃어버리는 일은 얼마나 딱한가

꿈속의 일을 꿈밖으로 끌어오려다 베개를 넘지 못했다 베개에 흥건한 소루쟁이 풀잎같이 접힌 낱말들 손가락에서 빠져나간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너는 무척 슬퍼하는 것 같다


2

호랑지빠귀가 운다, 아침에 내리는 비를 타고 운다 목을 찌르는 고음 소리를 구별한다는 것은 길들여지는 일 녹음 속, 어느 나뭇가지쯤에 있을 호랑지빠귀 너는 그 새를 잡아 머릿속 둥지에 놓으려 하지만 날아가 버린다, 새가 저기에서 운다, 그러므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빨랫골 오거리바닥 새소리가 햇볕에 안겨 퍼덕거리고 있다

너는 무척 슬퍼하는 것 같다


3

수박 한 통 사 들고 당신에게 가는 꿈, 밤은 좋은 생각을 가져다주고 그 생각에 칼을 찔러놓고 2등분 4등분 8등분 우리는 생각을 나눠 먹을 겁니다


4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하듯 목련 피어 떨어질까, 말까 한다 목련꽃과 죽음을 썰어 파는 정육점이 있다 당신이 장바구니에 싱싱한 발목을 담는다, 자고 나면 당신이 먹고 싶다


5

거실은 어두워지고 있다 낱말들이 사라지고 있다 전원을 켜면 당신이 생쥐처럼 도망갈까 하여



*프랑스 속담




아무튼, 고양이야


고양이 눈은 커서야. 나는 고양이 눈으로 시를 써. 세로로 열린 눈, 고양이는 빛을 핥고 있어. 하얀 낮달처럼 어깨 위에 앉아 빛을 핥고 있어. 사냥하듯 눈동자에 맺힌 커서가 깜박깜박, 깜박여. 등은 휘어지고 꼬리는 우아해. 그러나 커서가 들어가는 길목은 고양이 이마만큼이나 좁아.

골목에서 꺾이는 차량처럼 깜박 깜박여. 깜박이는 문자는 사각 안에 있어. 호흡하듯 깜박. 숨이 멎으면 터질지도 모르는 깜박. 링거액이 떨어지듯 깜박. 혈관을 타고 들어가듯 깜박. 고양이 동공이 커지고 있어. 아니 열리고 있어. 이야기가 수챗구멍으로 빨려들어 가. 무슨 문자라도 쳐야 해. 내 모니터 속에서 마구 자작나무가 자라날 것 같아. 자작나무숲 속에 토끼 눈이 깜박깜박. 늑대가 따라올 것 같은 깜짝. 아직 모르는 문자들 초인종 울리듯 깜박. 자동차 미등처럼 붉게 깜박깜박.

이 봐, 달은 점점 사라지는 웃음을 가졌나 봐



꽃물


누군가 소녀로 꽃물을 들였지


동여맨 끝이 예쁠 거라며 잠이 들었지 아침에 일어나면 봉숭아들이 땅속으로 스미는 서녘의 얼룩을 남기곤 했지


그날도 봉숭아는 피를 토하고 있었지

들숨 날숨 긷는 소리에 톡톡 터지기도 했지

손목에 찬 초침도 없는 방수시계는 잘도 돌아갔지 기분과는 상관없이 재깍재깍 돌아갔지

나는 겉돌았지


나는 시간을 빌리려 꽃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같았지

재깍거리는 소리가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았지


시계는 점점 몸이 거대해졌지 거대한 톱니바퀴가 꿈을 야금야금 깎아 먹는 것 같았지


나는 힘껏 부서져라

시계를 꽃 속으로 던졌지 불량한 계집애가 톡,


누군가 소녀로 꽃물을 들였지

나를 쿡쿡, 찧고 있었지


 

누가 기억 속에 울새를 넣었을까


먹빛 식탁보를 깔고 꽃이 수놓인 매트를 올려놓았다. 놋수저에 정갈한 일곱 시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울새가 울었다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요동쳤다. 너의 숲에 울새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퍼덕이던 깃털이 접시에 담긴다


너는 깃털을 씹는다. 씹을 때마다 식탁 아래 깃털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러다 푹신한 이불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넌 생각한다. 깃털을 씹고 있는데 몸에서 탄내가 났다. 의자에 몸을 비볐다. 입이 굳어간다


꿈속이 화석처럼 굳어간다


넌 애를 쓰고 있다. 누가 자꾸 기억을 가져가는 것 같다고. 목덜미를 길게 뽑아 콕콕 수저에 기억을 얹어 먹고, 뱉어 먹고 한다


콕, 콕, 관 속을 쪼는 듯한 어스름이 덩굴 숲으로 오고 있다

노인의 졸음처럼, 뚜르르 울새가 짤막하게 무음(茂蔭) 속에서 울었던 거 같은

뚜르르, 몇 개의 울음이 파헤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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