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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가루약 눈사람 / 전율리숲

 

나았니

나는 녹지 않았어

발자국도 나지 않았어

아직 다정한 어른은 되지 못했지만

가끔은 아빠처럼 우체국 커다란 창문 앞에서 잠자고

엄마처럼 기념품 가게에서 일해

너의 청록색 엄지장갑을 심장 자리에

넣어두는 걸 깜빡했는데도, 오늘은 춥지 않더라

무려 스무 날 전 네가 내 볼에 붙여주었던

귤껍질에서는 보물상자 냄새가 나

가끔 크게 웃고 있어

네가 생각나면

 

 

  <당선소감>

 

   "감기는 다 저의 어린 마음과 멀리서나마 나란해질 수 있도록 시를 쓸 수 있다면"


  2021년 여름, 문득 폰 메모장에 두드려 보았습니다. 조금 어린 사람, 타협하지 않는 어린 마음, 사랑의 생활습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 싶던 몇 가지 일을 시작해보게 된 건 힘든 시간들 때문이었는데요. 도리어 새로움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따금 자유롭게 동시를 써보자. 다시 만나고픈 마음을 향해 제멋대로 쓴 몇 개의 글들이 파일 속에 쌓여갔습니다.

  포켓사이즈의 '피터래빗 이야기'를 한동안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닌 적이 있는데요. 잠깐 쉬어야할 때 콩알만큼 읽고 덮는 일을 반복했는데, 어느새 표지가 닳아버렸어요. 어여쁘고 단단한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그림도 그림이지만, 맨 뒤에 작품 해설에 실린 작가의 말이 어른인 제게는 너무도 중요했어요. "(…)지식과 상식으로 균형을 잡고 더 이상 밤의 날아오름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아직도 우리는 삶의 이야기를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 구절을 마음에 단추처럼 달아 언제나 모든 일에서 틀리지 않기만을 바라는 저를 일깨워 줄 부드러운 지침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 투성이지만 저의 어린 마음과 아주 멀리서나마 나란해질 수 있도록 숨을 고르고 시를 쓸 수 있다면 삶은 좀 더 길고 의미있는 길로 여겨질 것 같았습니다.

  제 글이 채택된 건 모처럼의 운 덕분이겠지만, 다가가고 통과한 시간의 여운을 좀 더 많은 분들과 누릴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기회라는 건 늘 시간의 색깔에 대해서만 작용하는 것이고 그 안의 관계를 가꾸는 일은 당사자에게 달려있을 거라는 언젠가의 생각을 실천에 옮겨 노력해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소중한 해율선생 두둥 지난 일년 고생도 많았던 기타치는 영석 수줍게 용감한 창숙님 긴 여행중인 js님 꿈 속 이야기 율리숲을 쉼표로 끊어내지 않고 단번에 떠올립니다. 친구들이야말로 제 뺨에 제 눈길에 빛과 어둠을 더해주었고 멋진 책들과의 만남에 응원을 보태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덟 살 때부터 저의 가장 비밀스러운 친구였던 음악에게도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입은 단어를 활자로 소리내어, 그림처럼 펼치고 싶도록 사랑하는 음악들이 도와주었습니다.

  제 글에 흔적으로 남은 소중한 기억을 함께 해주신 분들께도 인사를 건네는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근 몇 년간 여러가지 이유로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중간중간에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생각의 장소를 마련해주는 분들이 계셨고 덕분에 저는 새로운 것과 익숙한 것에 대한 용기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상치못한 이 감사한 경험 속에서 저는 이제 무거움보다는 온전함으로, 작은 삶의 시를 써나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 1980년 서울 출생
●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 다양한 음악들에 관한 글을 쓰며 지내옴


 

  <심사평>

 

  

"눈사람의 절망과 희망이 투명하게 빛났다"

 

  눈이 내리자 SNS에 눈사람 사진들이 올라왔다. 큰 동그라미에 작은 동그라미를 얹은, 전통적인 눈사람뿐 아니라 이글루, 눈 토끼,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와 올라프 등 일상의 예술 작품이 속속 게시됐다. 아이스크림 스쿠프처럼 생긴 장난감으로 만든 ‘눈오리’의 행렬도 따듯하고 사랑스러웠다. 코끝이 얼어가며 만들었을 눈사람들로 세계는 잠시 ‘동화’의 나라가 됐다. ‘동화같다’고 흔히 표현되는 낭만성이 아동문학의 전부는 아니고 종종 아동문학을 왜곡하지만 아동문학의 한 조각인 건 분명 사실이다. 아동문학은, 동시는, 눈사람의 세계를 노래한다. 내가 굴려 쌓은 눈 뭉치가 눈 ‘사람’이 되어 나를 돌봐주고 지켜주는 세계, 양 볼에 귤껍질을 붙여준 다정하고 가난한 마음이 오래도록 서로에게 보물로 남는 세계.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역시 눈사람의 세계와는 달라서, SNS에는 누군가 일부러 발로 차고 손으로 뭉개 죽어버린 눈사람의 사진들이 곧이어 올라왔다. 그렇다면 동시는 이 세계를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동시는 생각할 게 많은 장르다. 단숨에 휘 읽을 수 있고 많이 애쓰지 않고도 쓸 수 있어 보이지만 장르 자체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된다고, 동시를 쓰는 시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눈사람이 태어나는 세계와 눈사람이 죽는 세계, 어느 쪽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여러 생각거리 중 하나의 결론이기도 하다. 마치 “발자국도 나지 않았어”라는 짧은 문장에 눈사람이 죽는 세계를 알아채고 외면하지 않는 시선을 담아놓듯이. “다정한 어른은 되지 못했지만”이라는 시행이 ‘당신은 과연 다정한 어른인가요?’라고 어른 독자에게 넌지시, 종이에 베인 손끝에서 날카롭게 아려오는 통증처럼 묻고 있듯이.

  올해도 높이 쌓인 응모작들을 읽으며 역시 가장 중요하게 발견되는 건 동시라는 장르에 대한 생각과, 어린이가 살아가는 두 세계를 오롯이 살피는 시선이었다. 많은 작품이 동시의 익숙한 외양을 갖추고 있어 반가운 한편 그 생각과 시선이 뚜렷이 보이지 않을 때 또 한 번 한없이 내려앉기도 했다. 그중 '가루약 눈사람'에서는 엄지장갑 없이도 더 이상 춥지 않아 하고, 크게 웃으며 끝내 ‘약’이 되는 눈사람의 절망과 희망이 투명하게 빛났다. 툭툭 터뜨리며 자유로이 오가는 문장 사이 스며든, 바싹 마른 귤껍질의 잔향 또한 전에 없이 새로웠다. 가뿐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소개하는 만큼 좋은 동시를 오래 써 주시길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 김유진, 김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