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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가루 / 정준호

 

할머니는 평생
밀가루 반죽을 빚으셨어
칼국수와 수제비를 잘 만드셨지
할머니는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듯
점점 구부정해지셨어
봄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으셔서
기침을 하셨어
기침 소리에 놀라
작은 꽃잎들 떨어질까 봐
조용조용 입을 가리셨어
쪼끄만 땅 짐승 놀랄까봐
발 소리를 줄이다가
점점 가벼워지셨어
작아지고
조용해지고
가벼워져서
할머니는 이제
희고 둥근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셨어
무섭지만 나도
손을 넣어 만져보았어
흰 가루가 담긴
항아리 속에서
지금도 따뜻하셨어
박수를 치면서
가루 묻은 손을 털었어
하늘에서도 반기듯
밀가루 같은
할머니 가루 같은
눈이 내렸어
펑펑 내렸어

 

 

  <당선소감>

 

   -


  이번에 저는 가루들을 어르고 달래어 감히 할머니를 빚어보려고 했습니다. 실패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같이 동시 쓰고 놀자고 불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좋은 소식 전해주신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작고 조용하고 가벼운 손입니다. 무섭지만 이 초라한 손을 가루 속에 펑펑 넣어보겠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시의 가루들을 만지면서 오래 살겠습니다. 가루가 될 때까지 열심히 쓰겠습니다. 비록 부족한 재료들이지만 밀과 꽃, 눈과 뼈의 가루까지 고루 섞고 다져 반죽하겠습니다.

  반죽들을 빚는 동안 저는 아마 더 작아지고 침침해지고 구부정해지겠지요. 눈물이 부족하다면 피를 부어드리겠습니다. 뼈는 태우고 곱게 빻아서, 항아리를 만들겠습니다.

  혹시 항아리 속에서 흩흩흩, 흩흩, 하고 가루들이 웃는 소리 들어보셨나요? 서른 살엔 고작 습작노트들을 태우면서도 눈물을 불렀습니다. 노트가 타며 내뿜는 연기를 들이마시고 몸에도 바르고 재를 핥은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잊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내 검은 얼굴과 혀를 씻어주던 희디흰 눈(雪)의 손길. 눈에 들어갔다 하면 눈물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꼭 가루와 시만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엄마와 애인, 동생, 고모들, 이모, 외삼촌, 외할머니, 선생님들과 친구들, 선후배들. 어쩐지 가루보다는 나무들을 더 닮아 있는 이 사람들.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나의 마루인 사람들.

  덕분에 흩어지기도 뭉쳐지기도 잘했던 나의 미래는 든든합니다. 이름을 부르면 눈에 가루가 들어갈 것 같은 그 이름의 주인들에게 지금 저는 여기 살아 있고 무언가를 새로 쓰고 있다고 안부 전하겠습니다. 봄이 오면 반드시 내 손을 내가 잡아끌고서라도 들판에 가서 꽃가루를 뒤집어쓰겠다고, 더 많은 나비들을 유혹해보겠다고. 네, 그래도 꽃과 잎들은 떨어질 테고 겨울은 다시 오겠지요. 그래도 안녕, 하면 좋은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매해 첫눈이, 새로운 시가 온다는 예감을 믿게 되었습니다.

 

● 1983년 경남 진주 출생 
●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동시도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열려"

 

  올해 동시 응모작은 941편이었다. 작년에 비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분이 동시 부문에 응모했다. 동시 창작가가 늘고 있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응모작을 읽으며 동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지울 수 없었다. 소재의 빈곤, 발상의 신선함, 사유의 깊이를 갖지 못한 작품이 다수였다. 신춘문예는 새로운 목소리의 탄생을 기대하는 열망이 있다. 자기 목소리를 담으려는 치열함이 엿보이지 않고 '동시'라는 고정된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기본적으로 동시도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똑똑', '수학자의 탄생', '찾았다', '연못 배꼽이 작아질 때', '치치', '뒷면', '가루', '1+1', '갈매기', '마침표'까지 10편이었다. 최종적으로 '갈매기', '가루' 두 작품이 남았다.

  '갈매기'는 발상과 시적 태도가 새로워서 좋게 읽었다. 다만 간결하고 힘 있는 전개에 비해 쉽게 결말에 닿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조나단 리빙스턴의 '갈매기의 꿈'의 기시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도 지적되었다. 독창적인 시선으로 더 치열하게 시적 대상을 밀고 가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좋은 시인으로 다시 만날 것 같다.

  '가루'는 동시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무겁게 그리지 않은 점이 좋았다. 오히려 "할머니는 고맙다고/절이라도 하듯/ 점점 구부정해지셨어"라든가. "작아지고/ 조용해지고/ 가벼워져서"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을 '눈송이'로 연결한 점이 인상 깊었다. 점층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시상의 전개와 짜임새 있는 구성도 돋보였다.

  한편으로, 시적 형상화 능력은 뛰어나지만 아이 화자의 작품에 어른 시각이 노출되어 동시의 주 독자인 어린이가 수용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 결정한 것은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당선자의 시적 역량을 믿기로 하였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비록 당선작에 들지 못했지만 소중한 작품을 응모해준 분들께도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열린다.

심사위원 : 박승우, 임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