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직장은 백 그램 / 오시내

<당선작>
직장은 백 그램 / 오시내
봉합해야 열리는
그 속은 통제구역
불안한 내 눈동자
문 앞에 꽂혀있고
막다른 한 남자의 길
누운 채 잇고 있다
직장이 잘리기 전
곪아가던 깊은 그 속
뒤축이 무너질 때
흔들리는 두 어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말단은 짧아졌다
애 터진 날이 모여
아파오는 시간에
떼어낸 백 그램만큼
내일이 길어지면
차갑게 식었던 몸은
온기로 돌아올까
<당선소감>
약자가 짊어질 사물의 걸음 풀 것
하루를 반으로 접고 또 접고 해가 기울 때, 낯선 번호가 떴습니다. 기자님의 당선이란 말만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책상 위, 수북한 책들 속에 한 권의 책처럼 앉아 있던 수많은 날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그중에 눈에 띄는 유일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늘 모서리가 많은 글을 버릇처럼 응모했습니다. 안쪽에 남아있던 기대감마저 간데없고 자신감은 바닥을 써 내려갔습니다. 계절보다 떨어지는 잎들만 보였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떨어지지 마. ‘죽음 앞에 시를 놓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숨어있던 객기가 올라왔습니다. 연초에 중한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날짜 예약하러 가는 날, 대학병원 로비에서 시조, 월 장원이란 소식을 마주했습니다. 순간 중한 병을 잊었습니다. 시조를 앞에 놓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나았습니다. 행운이었는데 연말에 또 행운을 맞이합니다. 치열하게 글을 쓰라는 의미로, 들리지 않는 신의 언어를 해석합니다. 가슴에 품은 종교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참 많이 돌아왔습니다. 때가 있다는 이치로 받아들입니다. 앞으로 약자가 짊어질 사물들의 걸음을 풀어놓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 시조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국제신문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독하게 공부하는 것에 솔선수범하시는 조경선 선생님,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더불어 서로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은 시란 문우님들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당신의 벼랑이 우리의 꽃으로 필 줄이야, 김수희 씨, 이제 괜찮습니다. 나의 정체성인 미주, 민철, 미소와 기쁨을 함께합니다. 지금부터는 정체성이 시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본명 안영미. 1964년생. 2024년 1월과 2025년 2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시란 동인. 경기도 안성.
<심사평>
해석 다의성·어휘 참신성 돋보여
시조 정형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되 주제나 표현상 낡음을 탈피하면서 시적 미감이 고루 구현된 참신성을 상상하며 원고를 건네받았다. 응모는 모두 158명 626편이었다.
응모작의 전반적 특징을 보면 첫째 현실적 감성의 제재가 많으나 이를 율감에 담은 시적 표현이 생경했다. 둘째 유행하는 조어로 제목을 만든 것은 생뚱맞지만 시적인 면에서 긍정적 접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받쳐줄 주제의 심화·확장이 부족했다. 셋째 시적 미감 즉, 독자가 오감을 통해 체험할 구체적 장면과 감각적 언어 운용도 미숙했다.
종심은 6명의 작품에 주목했고 시조 미학의 필요충분 요소(율격 주제 제재 구성 표현)에 구현된 섬세한 심미적 기량을 바탕으로 3명의 작품, ‘CPR’ ‘희망에도 꽝은 존재한다’ ‘직장은 백 그램’을 올렸다.
‘CPR’과 ‘희망에도 꽝은 존재한다’는 시조 리듬과 보법, 감성은 무난했으나 주제의 폭과 깊이가 아쉬웠다. 당선작 ‘직장은 백 그램’은 시조 미학의 필요충분 요소 모든 부문을 충족하면서도 제재인 직장이 지니는 중의적 구조로 시적 완결성을 잘 구현하였다. 즉, 시적 해석의 다의성을 잘 유도했다. 동시에 현대 감성을 지닌 어휘를 잘 구사한 참신성이 돋보였다. 좋은 작품으로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당선자와 더불어 시조의 지평을 더 넓혀 나가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서태수 최성아 시조시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제목 “직장은 백 그램”의 이중 구조
① 직장(職場) = 잘릴 수 있는 자리, 잘리는 순간 삶이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더 무거워짐
“직장이 잘리기 전”이라는 구절이 곧 나오죠. 해고/정리해고/계약종료 같은 현실이 바로 읽힙니다.
② 직장(直腸) = ‘절제’되는 기관, 수술에서 떼어낸 무게(백 그램)
“백 그램”은 실제 수술로 제거되는 조직의 무게일 수도 있고, 과장된 상징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건 삶에서 ‘떼어내진’ 것이 고작 백 그램처럼 작아 보이지만 그 효과는 삶 전체를 바꾼다는 역설이에요.
“떼어낸 백 그램만큼 / 내일이 길어지면”
절제(절단/절제)와 해고(잘림)를 한 동사 체계로 묶어버리죠. “잘림”이 곧 “살아남기 위한 봉합”이 됩니다.
2) 1연: 봉합과 통제—“열리려면 먼저 꿰매야 하는 세계”
봉합해야 열리는
그 속은 통제구역
보통은 “열기 위해 찢는다/자른다”에 가까운데, 여기선 반대로 봉합해야 열린다고 해요. 이 말이 기묘하게 설득력 있어요.
- 수술은 ‘열기 위해’ 절개하지만, 삶은 ‘열리기 위해’ 봉합해야 한다(상처를 꿰매야 다음이 온다).
- “통제구역”은 병원·수술실의 느낌이면서 동시에 회사/현장/규정/감시의 공간이기도 해요.
불안한 내 눈동자 / 문 앞에 꽂혀있고
막다른 한 남자의 길 / 누운 채 잇고 있다
- “문 앞”은 출근의 문, 해고 통보의 문, 수술실의 문, 중환자실 면회 문으로 겹칩니다.
- “눈동자가 꽂혀”는 ‘기다림’이 아니라 감시/심문/통제의 감각이에요. 주체가 아니라 객체처럼 박혀 있어요.
- “막다른 한 남자”는 특정 개인이면서도, 한국 노동 현실에서 쉽게 ‘대체 가능한 말단’의 전형이 되고,
- “누운 채 잇고 있다”는 강렬합니다.
**서 있는 노동(직장)**이 무너져서 **누운 몸(직장/병상)**이 되고, 그 상태로 겨우 “잇는다(연명한다/버틴다)”는 뜻이죠.
1연은 한마디로: 삶은 이미 상처-통제-불안의 시스템 속에 있고, ‘열림’은 ‘회복’이 아니라 ‘관리’의 다른 이름입니다.
3) 2연: “곪아가던 깊은 그 속” — 말단의 짧아짐은 몸의 말단 + 지위의 말단
직장이 잘리기 전
곪아가던 깊은 그 속
여기서 “곪다”는 두 방향으로 작동해요.
- 감정이 곪는다: 부당함, 공포, 억울함, 수치심이 안에서 삭는다.
- 상처가 곪는다: 실제 염증/괴사/병증의 진행.
그리고 곧바로:
뒤축이 무너질 때 / 흔들리는 두 어깨
- “뒤축”은 구두 뒤축이기도 하고, 몸의 지지점(삶의 기반)이기도 해요.
- 삶의 기반이 무너지면 어깨가 흔들립니다.
어깨는 노동의 상징(짐, 책임, 생계)이라 더 직접적이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말단은 짧아졌다
이 행이 진짜 잔혹한 결론이에요.
-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개인의 붕괴가 사회적으로는 조용히 처리된다는 것.
- “말단”은
- 회사 조직의 말단(가장 먼저 잘리는 자리)
- 신체의 말단(피가 잘 안 통하는 곳, 감각이 둔해지는 곳)
- 인생의 말단(끝자락)
이 다층 의미를 동시에 띱니다.
“짧아졌다”는 말은 실제로 잘려나간 듯한 물리감을 줘요. 해고가 ‘자리 이동’이 아니라 ‘절단’처럼 느껴지는 이유죠.
4) 3연: 애 터진 날—시간이 누적되는 통증, 그리고 “내일이 길어진다”의 공포
애 터진 날이 모여
아파오는 시간에
“애 터지다”는 속어처럼 보이지만, 시조에서 이 표현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현대적 노동 언어가 확 살아납니다.
- 갑자기 터지는 사건들이 아니라, “날이 모여” → 누적.
- 누적된 시간은 어느 순간 “아파오는 시간”이 됩니다. 즉, 시간이 통증으로 변환돼요.
떼어낸 백 그램만큼
내일이 길어지면
여기서 “내일이 길어지면”은 희망처럼 들리지만, 사실 양가적이에요.
- 수술 후 생존이 “연장”되는 것
- 해고 후 생계가 “늘어지는” 것(내일이 길다 = 빨리 끝나지 않는다 = 막막하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이 중요합니다.
차갑게 식었던 몸은
온기로 돌아올까
‘온기’는 단순 위로가 아니라 회복의 조건이에요.
- 직장(職場)의 온기: 관계, 안전, 소속, 존엄
- 직장(直腸) 수술 이후의 온기: 몸이 다시 돌아오는 감각, 살아있음
하지만 물음표로 끝나죠. 회복은 확신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습니다.
시조의 결구가 단정이 아니라 의문이라는 점이, 작품의 현대성을 강화해요.
5) 이 시조의 “형식”이 의미를 만든다: 짧은 행 = 통제된 숨
이 작품은 내용이 ‘통제구역’인데, 형식도 통제적이에요.
- 짧은 행들이 마치 호흡이 잘린 듯 끊겨요.
- “봉합/통제/불안/막다름/잘림/곪음/무너짐/식음” 같은 단어들이
단어 자체로 상처의 촉감을 전달합니다.
즉, 이 시조는 “직장 문제를 다룬다”가 아니라, 직장이라는 시스템이 사람의 숨과 몸을 어떻게 ‘형식’으로까지 바꾸는지 보여줍니다.
6) 핵심 상징 정리
- 문: 출근/해고/수술실/면회의 경계
- 봉합: 살아남기 위한 처리, 회복이 아닌 관리
- 통제구역: 병원·회사·감시 체계
- 말단: 조직의 끝, 몸의 끝, 삶의 끝(잘리는 자리)
- 백 그램: 작아 보이는 절제/상실이 만든 거대한 생의 변화
- 온기: 회복 가능성(그러나 미확정)
'좋은 글 > 시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윈드 댐퍼 / 최광복 (0) | 2026.01.10 |
|---|---|
| [2026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 김순호 (0) | 2026.01.09 |
| [2026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바닥 신호등 / 이영미 (0) | 2026.01.03 |
| [2026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부부 리모델링 / 허은주 (0) | 2026.01.02 |
|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절연 / 류한월 (0) | 2025.02.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