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디스토피아 / 백아온

<당선작>
디스토피아 / 백아온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의해 회복되는 우울한 로맨스 영화처럼.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요, 내가 엄마를 찾아볼게요.
어느 날은 그늘에 있기엔 너무 추웠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찼다. 당신도 춥지 않아요? 물어보려던 것을 꾹 삼키고 말았다. 나는 그 공원에서 덜덜 떨며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오랜만에 행운목에 물을 주고 왔어요. 행운목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살지요. 나는 가만 듣다가
당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라고 아무런 사연도 없는 줄 알아요?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사연이 알고 싶었고, 그 역시 나의 사연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늘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그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텅 빈 손을 흔들었다.
그를 정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플라스틱 피부에 덧칠된 이목구비와 단 하나의 표정을 보았다.
가까운 미래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지금껏 그와 나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 안기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제조 일자가 쓰인 전구처럼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바랐다.
저수지에 가서 호리병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깨뜨려보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어디선가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호리병을 그대로 버려둔 채 바깥으로 달려갔다.
도망친 곳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가 폐기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었다. 내가 가짜였더라도 당신은 적당히 건강하게 지내요. 이따금 사람들과 핑퐁을 치기도 하고. 오래된 불안과 결핍은 나를 더 아쉽게 할 테니까요. 당신의 이마는 부드러웠어요.
나는 그가 닫아준 몇 줄의 감상과 조용한 꿈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당선소감>
사랑을 이해하려 계속 썼습니다
단지 사랑하려고 했을 뿐인데 함부로 사랑한 일이 되는 때가 많았다. 쓰러져 가는 주변을 너무 많이 목격하고서 나는 함부로를 멈추고 싶었다. 멈추려 할 때마다 헐거워졌고 생명의전화는 연결 중이었으며 수많은 사랑은 빈집의 나를 구하러 왔다. 또다시 함부로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훼손되지 않는 맑은 슬픔이 나를 이끌어 줬다는 이야기. 운동화 끈을 꽉 묶은 채로 걸었다. 때때로 비틀거렸지만. 내 사랑이 그곳에 닿으려면 어떤 속도와 무게가 안전한지, 속눈썹에 맺힌 얼음을 떼어 주는 게 좋은지, 흔들리는 어깨를 잠시 도닥여 줘도 괜찮은지. 사랑을 이해하려고 계속 썼다. 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곁들을 사랑한다. 당선 전화를 받고서 소중한 이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모두가 나 대신 울어 주고 있었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사랑하는 것을 품에 가득 안은 사람처럼 뜨거워졌다. 다음 생에도 사랑을 가르쳐 줘, 엄마, 아빠. 용감해질게, 이모. 시작을 선물한 가족들. 하나뿐인 강아지, 망고. 오직 우리 두 사람, 정우. 명랑함은 너의 오랜 무기가 되어, 백아. 어려운 시절의 나무들, 주아, 재경, 선영. 봄날 여고에서, 주형, 경하. 넘치는 언어로 혜원, 선우, 송이, 채령. 아픔을 덮는 다정으로, 영은. 열아홉의 애틋한 마음가짐 정화, 채연, 재연, 찬연. 너희와 오래 웃고만 싶어, 수연, 경은, 서현. 가까이에서 만나, 유진, 영재. 반짝이는 친구들아, 수빈, 본진, 재인, 주혁, 세은, 채은, 예상, 윤경, 선경, 주빈, 하주. 존경하는 배정원, 이원, 강성은, 하재연, 윤은성, 윤성희 선생님. 그리고 저를 호명해 주신 세 분의 심사위원님께 감사합니다.
●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안정적 전개·시의성 있는 소재 빛나
이번 신춘문예에는 예년보다 많은 작품이 투고된 만큼 눈여겨볼 좋은 작품이 많았다. 다만 예년과 달리 기후 위기나 전쟁 등 기존 투고작들에서 자주 보이던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 줄어들었으며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을 다루는 내면의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실감하는 세계가 그만큼 줄어든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영상이나 텍스트를 경유하는 간접적 체험을 다루거나 인공지능(AI)이나 게임적 상상력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늘어났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오늘날 문학이 다뤄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지 이런 고민을 안은 채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네 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운동 상태 유지’ 외 2편은 표제작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버려진 피아노를 소재 삼아 사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살피고 접촉하며 어긋난 운동을 유지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으나 결국 이 이야기가 설명으로 그쳐 버린다는 점이 지적됐다. ‘디오라마’ 외 4편은 사물과 시적 주체를 끊임없이 이동시키며 의미를 지연하려는 듯한 말하기 방식이 개성적으로 여겨졌다. 다만 투고작 중 일부가 지나치게 늘어져 긴장감이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다. ‘마주 보는 구조의 전시장’ 외 2편은 매력적인 상상력 덕에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만 작품의 씨앗이 된 상상력이 확장되거나 전개되는 대신 멀지 않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있어 모처럼의 좋은 소재가 충분히 가능성을 펼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줬다.
당선작으로는 백아온씨의 ‘디스토피아’를 선정했다. 안정감 있는 전개와 시의성 있는 소재 선정 등 실력이 가장 돋보였기에 당선작을 합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플라스틱 인간’과의 사랑이란 사랑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은유이자 사랑을 꿈꾸는 결연한 다짐이기도 할 터이다. 이 시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야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이리라. 절망하는 대신 조용히 이 세계를 기억하고 재현하려는 시적 주체의 태도에 믿음이 갔다. 앞으로도 그 결연함으로 시와 더불어 나아가시길 바란다.
전에 없는 하 수상한 시절을 보내는 지금이야말로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장치인 문학이 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이번 심사를 진행하며 그러한 믿음을 가진 이가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기뻤다. 문학은 나의 꿈을 당신에게 맡기는 일이자 당신의 꿈을 이어받는 일이기도 할 터이다. 귀한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 나희덕, 이병률, 황인찬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시의 한 문장 핵심
사랑이 ‘사람-사람’ 사이에서 성립하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가짜(플라스틱)에게서만 진짜(체온, 이야기, 위로)의 감각을 겨우 빌린다.
‘디스토피아’는 전쟁·재난 배경이 아니라, 관계의 기능이 망가진 시대를 뜻합니다.
2) 화자와 ‘플라스틱 인간’: 사랑의 형태가 왜곡된 구조
플라스틱 인간
-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 → 속이 빈 재질, 공명하지만 체온은 없음.
-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 단순히 비밀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서사가 불가능한 존재(시스템/상품/AI/노동-기계의 은유).
화자
- 그럼에도 “매일매일 만남”을 반복하고,
-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는” 방식으로 사랑을 저장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포옹/고백이 아니라 수집·보관·기억의 노동으로 대체돼요.
이게 디스토피아적입니다: 사랑이 ‘행위’가 아니라 ‘보존’이 되니까요.
3) 핵심 장치 3개: 이야기–호리병–유리 공예
(1) ‘작은 이야기’의 역설
그가 말하는 건
- 카멜 담배의 낙타 모양(디자인/상표의 변천)
- 레몬청 덜 시게 만드는 법(생활 팁)
- 행운목 물주기(무난한 화제)
→ 전부 자기 고백이 아닌, 안전한 정보입니다.
즉 그는 “나”를 말하지 못하니 세계의 얕은 표면만 건네요.
하지만 화자는 그 표면을 귀하게 받습니다.
사랑이 결핍될수록, 사소함이 생존물자가 되거든요.
(2) ‘호리병’의 의미
호리병은
- 담는 도구(저장)
- 투명한 물건(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내부)
- 깨지기 쉬운 그릇(관계의 취약성)
화자는 말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즉, **사랑의 실체가 ‘현재의 체온’이 아니라 ‘나중에 쓰기 위한 재료’**가 된 거예요.
(3) “언젠가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이건 아름답지만 슬픈 미래형입니다.
- 지금은 사랑이 ‘작품’이 되지 못하고,
- 언젠가(나중에) 가공해서 의미를 만들겠다는 다짐만 남습니다.
즉 이 관계는 현재완료가 아니라 영원히 미래형으로 미뤄진 사랑이에요.
4) 전개가 무너지는 지점: 화자의 폭발이 왜 중요한가
“당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이 대사는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서의 날것이 튀어나오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원하는 건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 “나도 사연이 있다”
- “나를 궁금해해 달라”
- “서로의 내부로 들어가자”
즉, 서로의 ‘인간’이 되자는 요청이죠.
그런데 플라스틱 인간은 “벤치에 그대로 앉아 텅 빈 손을 흔들” 뿐입니다.
이 장면은 잔혹하게 상징적이에요.
- 그는 붙잡지 못하고(손이 비어 있음),
- 붙잡을 의지도 표정도 하나뿐이고,
- 화자는 그제서야 “정면”을 봅니다.
정면을 본 순간 사랑이 깨지는 역설:
가까이 가면 진짜가 될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갈수록 더 ‘가짜’가 선명해져요.
5)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전구의 은유
“제조 일자가 쓰인 전구처럼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이 비유가 아주 강합니다.
- 전구는 감정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수명이 정해진 소모품이고,
- 제조일자는 “우리는 이미 시스템 안에서 규격화된 존재”라는 낙인입니다.
화자가 바라는 ‘동시성’은 로맨틱한 운명 공동체가 아니라,
최소한 같은 속도로 망가지고 싶다는 절규예요.
디스토피아에서 사랑은 “함께 살자”가 아니라
“함께 꺼지자”로 바뀝니다.
6) 저수지/호리병의 공허: 저장된 말이 ‘아무것도’가 되는 순간
화자는 호리병을 거꾸로 들고 두드리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요.
왜일까요?
- 말은 저장했지만, 그 말이 결국 관계의 내부로 들어가는 열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그 말들은 “그의 이야기”라기보다 “그가 말할 수 있게 허용된 표면”이었죠.
즉, 호리병은 가득 찬 것 같았는데
결국 텅 비어 있던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엄마를 찾는 아이” 목소리에 화자가 달려가며 호리병을 버려두는 장면.
여기서 작품이 갑자기 뚫고 나가요:
- 플라스틱 인간과의 사랑보다,
- “엄마”라는 단어가 더 깊은 결핍의 뿌리를 찌르는 겁니다.
화자의 결핍은 연애의 실패가 아니라 **원형적 결손(돌봄/근원)**을 암시해요.
7) 마지막 메시지: 디스토피아에서 가능한 유일한 애정의 방식
“내가 가짜였더라도 당신은 적당히 건강하게 지내요… 당신의 이마는 부드러웠어요.”
이 결말은 ‘사랑 고백’이면서도 ‘사랑 부정’입니다.
- “내가 가짜였더라도”
→ 관계의 실재를 스스로 부정해요. - 그런데도 “이마는 부드러웠다”는 감각을 남깁니다.
→ 가짜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진짜: 촉감의 기억.
또 “사람들과 핑퐁” 같은 말은 되게 현실적이죠.
사랑이 영원/구원으로 가지 못하고, 적당히 건강하게 살아남기로 축소됩니다.
디스토피아에서 애정은
- “너를 구할게”가 아니라
- “너, 너무 망가지진 말자”로 남습니다.
8) 제목 ‘디스토피아’가 정확한 이유
이 시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 폭력적 체제보다,
- 감정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해진 시대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절망” 대신
- 말을 모으고(호리병),
- 기억하려 하고,
- 몇 줄의 감상과 조용한 꿈을 붙잡습니다.
심사평이 말한 “조용히 기억하고 재현”은 바로 이 태도예요.
이 시의 윤리는 “울부짖기”가 아니라 기억으로 버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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