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상] 파밭 / 엄경순

<당선작>
파밭 / 엄경순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 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던가
작은 세상이 일일이 영그는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백제의 향로 같은 깊은 침묵이 피워 올린 꽃대는
푸른 속내를 감추며 더욱 단단해져가고
꽃씨는 벌써부터 파 밭 파 밭 아우성인데
나는 생각이 여무는 그 침묵이 좋아라
발뒤꿈치 들고 조용조용 서 있는 파뿌리들
<당선소감>
-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룻바닥이 차서 발바닥이 얼얼했지만, 한참을 서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세 살, 제 첫 기억입니다. 그날 아빠는 리어카에 산더미 같은 짐을 싣고,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건넛마을로 이사를 했다는데, 이삿날 풍경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는 제 기억이 거짓말 같다고만 합니다.
“어떻게 눈 오는 것만 기억난다냐?”
그날의 기억처럼, 어떤 순간들은 어제인 듯 선명한데 어떤 순간들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순간들이 사라질까봐 그 기억들을 하나둘 조약돌 모으듯 글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무겁고 단단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저에게 가슴을 울리는 시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언제나 시의 자리에서 시를 썼습니다. 그렇게 삶의 순간순간마다 시적인 순간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며 작은 기억에도 의미를 찾고 이야기를 불어넣고자 노력했습니다. 때론 어둡고 힘든 길을 혼자 걷고 있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그럴때마다 저의 시가 다시 저를 다독이고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잠깐 빛으로 반짝였습니다. 제 첫 기억부터 지금까지 써온 모든 글들이 함박눈처럼 하늘에서 펑펑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부족한 제 시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긴 시간 한결같이 응원해 준 가족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런 기적 같은 순간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압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한 걸음 한걸음, 다시 걸어가겠습니다.
힘들 때마다, 오랫동안 포기하지않고 묵묵히 걸어왔기에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처음처럼 시를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977년 충남 청양 출생. 2014년 제12회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시 부문 가작. 2020년 제15회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동시 부문 동상
<심사평>
깨끗한 시심, 삶에 밀착한 시
정치적 직접성의 시가 새해 시작을 알리는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을 불편하다. 문학은 정치를 함축하면서도 정치를 초월한다. 시의 독자는 삶의 깊이와 넓이에 ‘상응’을 이룰 수 있는 시를 원한다.
현실의 호흡이 가빠지고 각박해지면 시도 따라서 대체로 거칠고 빨라진다. 그런 경향이 있다. 때가 지나면 그 유효성은 쉽게 말라버린다. 반대로 그런 세상살이에, 일상의, ‘심정’의 시만에 만족할 수도 없다. 시는 인심의, 민심의 표현일 수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젖혀 놓고,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예술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언어적 구성과 표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속에 사유가 있고 세계가 놓여 있다. 무엇을 베려 하든 칼끝을 날카롭게 벼리지 않으면 안된다.
「안부」·「보리수나무 아래」·「파밭」·「마두금」·「유언」을 출품한 엄경순 씨. 「새벽배송 공작소」·「폭설」·「문래동 장마」·「공덕역 1번 출구」·「평화와 시장」을 내신 김선욱 씨. 시의 경향과 특질이 각기 달라 심히 고민하게 한다.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시, 시어와 시행의 구사에서 보다 숙련된 시, 비록 시대의 가파른 흐름에 뒤진 듯해도 시인으로서의 수행 흔적이 더 돋보이는 시를 어렵게 승인한다. 이번에는 그렇다.
「파밭」외 4편의 시인은 깨끗한, 비운 마음의 상태, 수준에서 시적 발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다. 세상을 맑은 눈으로 보는 사람이다. 다섯 편 시가 모두 깨끗한 시인적 감성을 바탕으로 시적 대상을 오롯이 직관한 경험을 숙련된 시적 리듬의 언어로 갈무리해내는 솜씨를 발휘했다. 특히,「파밭」은 시인의 시의 언어에 함축된 정화된 시심, 탈속한 심성을 한껏 맛볼 수 있게 한다. 요즘과 같은 혼탁한 시대를 맑게 씻어낼 수 있는 감성의 시다.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다음으로,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시는 느려지거나 아예 더 빨라져야 한다. 「새벽배송 공작소」외 4편의 시를 내신 분은 시가 현실에 보다 밀착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새벽 배송 작업 현장이나, 문래동, 공덕역 같은 삶의 현장을 ‘떠돌며’ 오늘의 삶의 살아 있는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한다. 비록 언어적 세공을 위한 수련이 더 있어야 한다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기교를 넘어서는 의식일 것이다. 우수작으로 선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심사위원 : 방민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파밭」(엄경순)**은 겉으로는 파 한 포기를 보고 쓴 정물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속내를 감춘 채 자라고, 때가 되면 터져 나오는 사유(생각)’**를 파의 생태로 빌려 말하는 시예요. “쉽게 감정 폭발”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익는 마음을 귀하게 보는 시선이 핵심입니다.
1) 제목부터: 왜 ‘파밭’인가
- ‘파’ 한 뿌리만이 아니라 밭 전체를 택했죠.
→ 개인의 속내(한 대궁)도 있지만, 더 크게는 **세상 전체가 저마다의 비밀을 품은 “작은 세계들의 집합”**이라는 관점이에요. - 밭은 시간이 쌓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씨앗→대궁→꽃대→씨알.
→ 이 시는 “사유가 자라는 시간”을 따라가요.
2) 시의 큰 줄기: ‘속내-침묵-터짐’의 과정
시의 전개는 파의 생장 순서를 따라갑니다.
(1) 겉은 단단하고 속은 알 수 없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 파의 대궁(줄기)을 **‘닫힌 몸’**으로 봐요.
- “흔들어도” 안 보인다는 건, 겉으로 캐묻거나 재촉해도 사람의 속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 결정적인 두 줄:
- 누군가의 속내를 알려면 “꺾어야” 한다(상처를 내야 한다).
- 하지만 속을 보기 위해 꺾는 건 폭력이다.
→ “이해”가 “침해”로 바뀌는 경계선.
- “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여기서 시는 윤리적 긴장을 만들어요.
(2) 답이 안 나오는 것들이 속에서 ‘끙끙’ 익는다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 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 ‘답 없는 일’은 인간 삶의 난제(관계, 상처, 생계, 후회, 질문)일 수 있고,
- 동시에 “시가 되기 전의 말들”일 수도 있어요.
말로는 못 풀리는 게 속에서 계속 발효되는 상태.
(3) 어느 순간 ‘말문이 터지듯’ 꽃대로 솟는다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 …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
- 파꽃은 ‘말’이 되고, ‘답’이 됩니다.
- 중요한 건 **답이 ‘머리로 푸는 결론’이 아니라 ‘자라서 도달하는 사건’**이라는 점이에요.
- 오래 끓던 것이 스스로의 때에 “쑤욱” 올라옴.
- 그래서 이 시의 ‘답’은 논리라기보다 생명의 방식입니다.
3) 상징 몇 개만 딱 잡아보기
1) 대궁 = ‘속내(내면)’를 품은 몸
- 통통한 옆구리, 단단히 여민 대궁:
→ 말로 다 못 하는 마음, 쉽게 열리지 않는 사람의 내면.
2) 꽃대 = 침묵이 피워 올린 ‘사유의 결과’
“백제의 향로 같은 깊은 침묵이 피워 올린 꽃대는”
- 백제 향로는 연기(향)를 올리는 물건이죠.
→ 침묵이 향처럼 피어오른다 =
말이 없던 시간이 그 자체로 어떤 정신의 향을 만든다는 뜻. - 이 비유가 시의 품격을 확 올립니다. “농사”를 “문명”의 상징으로 끌어올려요.
3) 하얀 꽃 / 까만 씨알 = 겉은 맑아도 속엔 ‘응어리’가 익는다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 겉으로는 깨끗하고 조용해 보여도,
- 속에서는 검은 씨앗(응어리, 핵심, 알맹이, 기억)이 익어요.
- 여기서 “응어리”라는 단어가 중요해요.
씨앗은 미래지만, 응어리는 상처이기도 하죠.
→ 상처가 미래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는, 아주 삶에 붙은 감각.
4) 이 시의 정서: “나는 생각이 여무는 침묵이 좋아라”
결정적 고백입니다.
- 시인은 “비밀을 다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해요.
- “작은 세상이 일일이 영그는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 그리고 그 무지(모름)를 불안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침묵의 가치로 바꿉니다.- 모르면 더 캐묻는 게 아니라,
-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
즉 이 시는 “명쾌한 해답”이 아니라
**사유의 성숙(여묾)**을 미덕으로 삼아요.
5) 마지막 장면이 왜 그렇게 좋은가
“발뒤꿈치 들고 조용조용 서 있는 파뿌리들”
- 파뿌리는 원래 땅속에 박혀 있잖아요. 그런데 “발뒤꿈치”를 줍니다.
→ 파를 사람처럼 보는 순간, 시 전체가 한 번 더 따뜻해져요. - “조용조용”이라는 말은,
- 억지로 드러내지 않고,
- 떠들지 않고,
- 자기 시간을 지키는 존재들에 대한 존중입니다.
- 결국 파밭은 침묵으로 생각을 익히는 사람들의 공동체처럼 보이게 돼요.
6) 심사평과 연결: 왜 “깨끗한 시심”인가
이 시는 시대비판을 직접 하지 않아요. 대신
- 과잉 주장 없이,
- 대상(파)의 생태를 따라가며,
- 그 안에서 인간 삶의 태도(기다림/침묵/성숙)를 길어 올립니다.
그래서 심사평의 말처럼 “혼탁한 시대를 맑게 씻어낼 감성”이 되는 거죠.
정치적 직접성 대신, 마음의 정화로 세계에 응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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