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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

임병숙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햇살이 여과 없이 스며들었다. 두텁게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각질 같은 먼지가 빛살에 실려 부유물처럼 떠다니고 있다. 보호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바람이 지나간 듯 휑뎅그렁하다. 방 안에는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와 화투가 조심스럽게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중환자 대기실에 처음 들어가던 날 어머니는 몹시 낯설어했다. TV 소리와 한숨 섞인 낮은 말소리, 이따금 들리는 낮은 울음소리와 호흡을 힘겹게 하는 크레졸 냄새. 눈앞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둔 환자들 때문인지 방안을 흐르는 공기마저 무거웠다. 전등과 TV를 끈 밤이면 심해의 침묵 같은 어둠이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어머니는 이방인처럼 그 속에 섞이지 못하고, 모든 촉수(觸手)를 동물의 그것보다 예민하게 맞은편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향했다.

병원을 옮기거나 환자들이 먼 곳으로 떠나면서 보호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벽지에 밴 크레졸 냄새가 익숙해진 대기실 안에 어머니와 단둘이 남았다. 북적댈 때는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힘들었는데 갑자기 방안이 넓어졌다. 왠지 허전하면서 옷을 헐렁하게 입었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어느 한 곳에 고정했다. 화면에는 이른 시간에 화사하게 화장을 한 주부들이 소리 내어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화장만큼 그늘이 없이 밝았다.

아침도 거르고 누워 있던 어머니가 살며시 눈을 떴다. “, 혹시 화투 칠 줄 알아?” 풀기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어머니의 눈빛이 무언가를 잡고 싶어하는 듯했다. 조금 할 줄 안다고 하자 화투 좀 사오라고 했다. 겨울이면 일거리가 없는 친정 동네 할머니들은 화투로 길고 지루한 하루를 저 끝으로 보내곤 했다. 평소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어머니는 그 틈에 끼지를 않아서 의아했지만, 두말없이 병원 뒤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사왔다. 어머니가 휑한 눈으로 부스스 일어났다.

보푸라기와 머리카락이 뒤엉켜 있는 군청색 담요를 깔았다. 그 위에 화투를 펼치니 그림이 선명하게 보였다. , 동물, 나무, 풀 등이 그려져 있다. 대부분 복과 건강을 상징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려한 색상으로 표현했다. 어머니가 화투는 그냥 치면 재미없다며 허리춤에서 동전을 꺼내 나눠 줬다. 조금 전까지 초점이 흐려져 있던 눈에는 생기가 흐르고, 어린아이처럼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빈 둥지 같은 친정에 어머니가 오신 것은 칠순이 넘어서였다. 그 연세에 재혼이란 쉽지 않았으리라. 자식들이 반대를 하거나 주위의 따가운 시선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셨을 때는 무언가 다른 삶을 바라지 않았을까. 안타까울 정도로 욕심이 없던 만큼 화투처럼 화려한 생활도 바라지 않고 지나간 시간을 묻을 수 있는 보금자리만 바랐다. 남들처럼 서류상으로든가 그 어떤 구차한 조건도 달지 않고, 친정 담 밑에 핀 나팔꽃처럼 소박한 바람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바람마저 저버렸다. 늘 술을 달고 살면서 다정한 눈빛과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이 갑작스레 안락하게 변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런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 또한 당신이 받아들여야 한다며 내색 없이 견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힘겹게 잡고 있던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그 끈이 굵고 튼튼하지 않아도 데면데면한 자식들보다는 나았을 텐데 아버지가 갑작스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신체 기능은 제 역할을 하고 있어도 한 번 감은 눈을 더는 뜨지 않았다. 의사도 희망이 담긴 얘기보다 절망적인 얘기로 어머니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루에 세 번, 정해진 면회 시간에 아버지를 뵈면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변화가 없는 표정에서 생의 마지막 경계선에 닿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혈압과 심장 박동도 영하로 내려가는 온도계의 눈금처럼 점점 내려갔다. 어머니의 표정도 아버지처럼 굳어져 갔다. 말수도 줄어들고 단단하게 조였던 나사가 헐거워지듯 당신을 지탱해 주던 모든 관절이 느슨해졌다. 병원 밖에는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침묵처럼 눈을 감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시간이 많았다. 단단하게 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하는 불안감과 그다음에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 것들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일까. 화투를 내리치는 팔에는 팽팽하게 조인 활시위처럼 긴장감과 탄력이 있었다.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상대의 눈을 속여 돈을 빼앗기 위한 도박꾼들의 팔은 짧고 굵게 허공에서 주춤거림도 없었다.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내리꽂는 매의 동작처럼 날렵했다. 어머니의 팔 동작은 그들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잠깐 허공을 가르더니 아래로 내리꽂혔다. 그러나 왠지 울림이 달랐다.

그들의 울림이 상대를 속이기 위한 짤막한 울림이었다면 어머니의 울림은 왠지 길게 울렸다.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싶었지만 그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게 들렸다.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몹시 불안해하는 어머니 주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복도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절제하기 어려운 고통을 극도로 절제하며 무언가를 따라 복도 끝으로 가고 있었다. “, 이제 어떻게 살아.” 한숨 같은 그 말을 오랫동안 참았는지 가느다란 한숨에 섞여 힘겹게 나왔다. 작고 동그랗게 허물어진 어깨선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흐느낌에 따라 들썩였다. 나무토막처럼 거칠고 딱딱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아버지는 의식도 없이 열흘째 누워 있지만, 뇌세포마저 잠든 것은 아닌 듯했다. 혼자 남겨질 어머니 걱정에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게 아닐는지. 아버지를 뵐 때마다 당신이 살아 계실 때와 다름없이 어머니를 대하겠다고 주문처럼 약속했다. 그 말 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크게 위안이 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 말을 듣더니 수축됐던 근육이 이완돼 보였다. 그러나 어디다 정신을 놓았는지 화투의 짝을 제대로 못 맞췄다. 일일이 짝을 맞추고 계산을 해 드리면 마지못해 웃었다.

그 웃음마저 점점 희미해지더니 한마디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화투의 부딪치는 소리도 어딘가로 깊숙이 숨어들고 방안에는 간간이 한숨 소리만 들렸다. 그 사이 아버지는 점점 더 멀리 가고 있었다. 그 길은 막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길이다. 세월의 물살에, 신의 손길에, 운명의 손길에 떠밀려가는 길이다. 아무리 힘차게 팔을 휘두르며 화투를 내리쳐도 그 불안은 떨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팔은 모든 조임새가 풀려버렸다.

느린 화면처럼 손에 든 화투를 바닥에 있는 화투 위에 간신히 얹었다. 어머니의 손에서 힘없이 빠진 화투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늦가을, 들판에 내린 하얀 서리 같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진이 다 빠진 듯 이리저리 쓰러졌다. 얼굴은 가벼운 발자국에도 힘없이 부서지는 낙엽보다 더 푸석해서 주름만 도드라졌다. 출입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선 공기가 재빠르게 밀려왔다. 화면이 정지되었다.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빨리 중환자실로 오라고 했다. 조금 다급했지만 차분하게 그 한마디만 남기고 임무를 다 했다는 듯 획 나가버렸다. 화투를 떨어뜨린 어머니의 입에서 아이구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구부정한 뒷모습이 중환자실로 뛰어갔다. 두어 시간 전에 뵈었을 때 검붉던 아버지의 얼굴이 백열등 불빛보다 하얗게 변했다.

퉁퉁 부은 아버지의 손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몹시 떨렸다. 아버지는 매미처럼 껍데기만 남기고 이탈 중이었다. 병실에는 어두침침한 동굴의 천장에서 한 방울씩 힘겹게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아직 삶의 경계선을 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기계음이었다. ‘, , - 물방울이 아주 느리게 떨어졌다. 잠시 후, 건전지의 수명이 다한 것처럼 짧고 조용하게 소리를 내며 멈췄다.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짝을 보내지 않으려는 짐승의 울음이, 손수건으로 가린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어머니의 하얀 머리카락보다 더 하얀 시트가 아버지의 얼굴을 덮었다.

갑자기 스쳐 가는 바람처럼 울음을 뿌리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담요 위에는 화투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그토록 불안의 늪에서 헤맸건만 끝내 떨쳐 버리지 못한 어머니를 비웃는 것 같다. 화투와 어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서로 다른 세상처럼 대조적이다. 삶이란 화투처럼 화려하고 행복할 때도 있고, 어머니의 머리카락처럼 소박하거나 아주 단조로울 때도 있다.

어머니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보면 화투처럼 화려하게 삶의 포만감을 느껴보지 못한 모습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긴긴 삶의 뾰족한 모퉁이에서 이런저런 상처만 받았으리라. 어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부서질 것만 같다. 결국, 화투는 인간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담은 것과는 다르게, 아무런 구실도 못 하는 심심풀이 도구였다. 화투를 쓸어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불안의 늪에 정박해 있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당선소감>


부족한 글 뽑아 준 건 더운 노력하라는 꾸짖음

 

음악을 듣거나 회화를 들으며 혼자 걷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을 걸으면 심심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 나무, 야생화, , 띄엄띄엄 놓은 징검다리. 이름 모를 풀들이 피워낸 작은 꽃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발길을 쉽게 돌릴 수 없다. 눈에 띌 만큼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도 없다. 좀 더 다가가면 그들의 내밀한 언어가 향기롭게 들린다.

글을 쓴다는 건 혼자 걷는 산책길 같다. 그다지 관심도 받지 못하는 분야라서 함께 가는 사람도 드물다. 이름 모를 풀꽃처럼 함께 가는 다섯 명의 친구가 있어 행복하다. 오래전에 이 길로 갈 수 있게 등불이 되어 준 몇몇 선생님. 친정집 농사를 짓느라 농부처럼 변한 남편. 모처럼 일찍 들어와도 옆에 앉아서 내 일에 몰두하느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다. 아이들과 어머니. 친정 형제들 모두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다. 며칠 전 꿈길에 다녀가신 부모님. 가슴을 저리게 한다.

당선이라는 큰 기쁨을 주신 심사위원님.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것은 느림보에게 더 노력하라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따뜻한 손길이라 여겨진다. 더디게 여기까지 왔지만, 또다시 더디게 가야 할 길. 이 길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임병숙(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1961년생. 학력:성일여자상업고등학교 직업:주부

<심사평>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 화투로 가볍게 풀어내

다양한 소재로 응모한 삼백오십여 편의 작품들은 모두다 문학에 대한 글쓴이의 열정을 잘 보여주었으나 주목을 크게 끌 만한 작품들이 적었음은 아쉽다. 이는 수필의 특성 중의 하나인 자기 고백적인 글이라는 틀에 너무 묶인 나머지 심리적 철학적으로 삶을 성찰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삶을 깊이 성찰하는 미적 순화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일상으로 담아내면 그와 같은 글 속에서는 영혼의 울림을 찾을 수 없다. 모두 세 차례의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김길영의 <그때는 들국화가 시였네>, 이강란의 <빨랫줄>, 김제숙의 <하루>, 그리고 임병숙의 <화투>였다. 네 작품 모두 각자의 일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으나 그 소재를 중심으로 사건과 사물과 인간의 감정을 비교적 깊은 의미의 세계로 끌어갔다.

그중에서 임병숙의 <화투>는 문학적 메타포에서 특징적이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화투라고 하는 가벼운 놀이와 결합시키면서 자신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지만 또 한편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너무나 보편적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끼는 순간 아이로니컬하게도 화투로 한 가닥 구원의 끈을 붙잡고자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응모한 거의 모든 작품들도 마찬가지인데 글의 탄력이 부족하고 주제가 선명치 못한 점이다. 글은 과감하게 주제의 중심으로 모이지 못하는 내용들을 잘라냄으로써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리고 말미에 선명한 메시지를 줌으로써 주제를 부각시킬 수 있다. 끝으로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E. B. 화이트는 글을 잘 쓰는 비결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것이라고. 이 모든 점들을 참고하면서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남영숙(수필가송영옥(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