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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호 윤정이네 / 현찬양

 

 

등장 인물

커트여자(28) 단발여자(32) 웨이브여자(24) 윤정(28)


"맨날 보는 얼굴이 어떻게 생각 안 날 수가 있냐?" 
"엄마는 너무 오래된 가구라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빈소.

향냄새가 자욱하다. 상주는 보이지 않고 테이블 두 개가 있을 뿐이다. 여자 둘, 단발여자와 커트여자가 테이블을 하나씩 꿰차고 멍하니 앉아 있다. 처음 보는 사이인 듯 서로 말이 없다.

커트여자는 물 뚜껑을 엄지 손가락으로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딱, 딱 소리가 거슬리지만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여자들과는 다른, 구석의 공간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윤정이다. 윤정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여자들의 대화를 엿듣고 반응하고 웃기도 한다. 그녀들의 행동에 느끼는 감정대로 반응해야 한다. 그녀들은 윤정이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만질 수 있다. 윤정은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야 한다.


커트여자 죽었나?

단발여자 네? 

커트여자 에어컨이요. 아까까지 나오다가 갑자기 안 나오네요.



긴 사이. 

웨이브여자가 등장한다. 약간 숨을 몰아쉬면서 들어올까 말까 망설인다.



웨이브여자 저, 죄송한데 여기 윤정이 언니네 맞아요? 401호.

단발여자 '윤정이 언니네'요?

웨이브여자 (웃으며) '윤정이 언니네'래. 제가 이래요.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뭐라고 말해야 되지? 뭐죠?

단발여자 빈소요.

웨이브여자 맞다, 빈소.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났어요.

(신발을 벗으며) 한참 헤맸어요. 스마트 폰으로 약도를 찍어 봤을 때는 정류장에서 나와서 금방이었는데 걷다 보니 어딘지 영 모르겠는 거예요.

이리 저리 헤매다가 다리를 건너니까 금방이데요.



웨이브여자, 신발을 벗고 올라와서 거리낌없이 단발여자와 한 테이블에 앉는다.



웨이브여자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단발여자 테이블엔 물통이 없어서 커트여자가 자기 테이블에 있는 물통을 들고 자연스럽게 한 테이블에 모인다. 커트여자, 물을 따라 웨이브여자에게 준다. 웨이브여자 단숨에 물을 들이킨다.



웨이브여자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상복으로 입을 만한 게 없어서 겨울 정장을 꺼내 입었더니 더워 죽을 지경이에요.

많이 이상한가요?



커트여자 그저 웃는다.



웨이브여자 (단발여자와 커트여자에게) 윤정이 언니 가족분 되세요?

커트여자 아뇨. 저희도 문상하러 온 건데 아무도 없어서 어리둥절하던 참이었어요.

웨이브여자 (단발여자에게 친근하게 굴며) 우린 본 적 있죠?

단발여자 (부담스러워하며) 없는데요.

웨이브여자 본 적 있는데. 윤정 언니랑 분명 같이 봤을 거예요.

단발여자 어디서요?

웨이브여자 어디서 봤더라. 아무튼 어디서 봤는데. 만난 적 있는 건 확실해요. 제가 사람 얼굴 하나는 잘 기억하거든요.

단발여자 어쩌면 결혼식에서 봤나 보죠. 어쩌면 장례식이거나.

웨이브여자 그럼 결혼식이겠네요. 장례식은 처음이거든요. 그런데 원래 이렇게 아무도 없는 건가요?

단발여자 글쎄요. 이상하네요. 상주도 없고.

커트여자 화장실 가셨나 봐요.

단발여자 그런 것 치곤 너무 오래 안 오시는데.



침묵, 커트여자가 맥주병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입을 연다.



커트여자 여기는 맥주병이 크네요.

웨이브여자 그래요? 일반 맥주병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

커트여자 방금 결혼식엘 갔다 왔는데 거긴 병이 작더라고요. 물컵에 따르면 한 병이 다 비워질 정도로 작았는데 여기껀 크네요.

웨이브여자 결혼식장 술병이야 원래 작은 거잖아요.

커트여자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 다 상술이에요. 그렇게 팔면서도 오백밀리 값이랑 똑같이 받을 걸요? 결혼하는 사람들이 봉인 거지.

웨이브여자 그럼 죽은 사람은 봉이 아닌가? 

단발여자 장사꾼도 죽기는 할 테니까.



사이.



웨이브여자 여기 진짜 이상해요. 상주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없고. 빈소에 국화꽃이랑 윤정 언니 사진은 있는데 그것 빼곤 아무 것도 없잖아요.

꼭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아요.

단발여자 어쩌면 우리가 너무 일찍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커트여자 일찍이라뇨. 오늘이 둘째 날 아니에요?

웨이브여자 오늘이 몇 쨋날이죠?

단발여자 어쩜 너무 늦게 왔나봐요. 발인이 언제였죠?

커트여자 모르겠어요. 아. 문자 받은 게 있는데.



커트여자, 웨이브여자 전화기를 확인해 보지만 문자를 찾을 수가 없다.

커트여자 지워졌나. 어딨는지 모르겠네요.

웨이브여자 전 밧데리가 다 되어서. (사이) 안내소에 물어보고 올까요? 발인 들어갔을지도 모르니까.

커트여자 그래요, 부탁 드려요.



웨이브여자 퇴장한다. 침묵. 커트와 단발, 별달리 할 말이 없다. 커트가 먼저 말을 꺼낸다.



커트여자 윤정이 최근까지 만나셨어요?

단발여자 네. 아니, 아니오.

커트여자 만났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단발여자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커트여자 네에.

단발여자 (사이) 연락 받고 너무 놀랐어요.

커트여자 사고 같은 걸까요?



단발여자 대답하지 않는다. 긴 침묵.



커트여자 윤정이 최근 이야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제가 정말 윤정이를 만난 지 너무 오래되어서요. 그간 연락도 전혀 못했고.

단발여자 얼마나 최근이요?

커트여자 그냥 최근이요.

단발여자 글쎄요.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윤정이는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고 종일 집 밖으로 안 나왔고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고….

커트여자 (사이) 네?

단발여자 수능이요. (사이) 웃기죠?

커트여자 그러면 대체 몇 수야. 재수, 삼수, 사수, 오수…(손가락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단발여자 갑자기 왜 대학이냐고 했더니 약사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윤정 약사가 되려고.

커트여자 약사요? 약 지어 주는 약사?

단발여자 뜬금없이 웬 약사야? 의사도 아니고.

윤정 예전에 왜 감기약 사러 우리 같이 약국 갔을 때 있잖아.

온 몸에 문신한 깍두기 아저씨 본 날. 우리 그때 괜히 무서워서 구석에 있었잖아. 그런데 그 아저씨 말 잘 듣는 초등학생 같았지. 자기 키의 반 밖에 안 되는 약사한테 가서 공손하게 "저 방구가 삼일 째 멈추지를 않는데 뭐가 잘못된 건가요" 해서 우리 무척 웃었지.

단발여자 아아- 기억 난다.

윤정 아무리 나쁜 사람도 자기 몸 아플 때는 착해지니까 영원히 그런 착한 사람들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해서.

단발여자 가끔 보면 넌 텔레토비 동산이라도 찾고 있는 것 같아. 모두가 행복하고 따뜻하고 눈만 마주치면 웃는 그런 곳. 하지만 그런 곳은 세상에 없어.

윤정 넌 항상 너무 똑똑해. 내가 바라는 건 진실이 아닌데.

커트여자 윤정이랑 어떤 관계였어요? 동창? 직장 동료?

단발여자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커트여자 네?

단발여자 (강조하며)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긴 사이. 

여자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웨이브여자가 들어온다.



웨이브여자 안내소에 아무도 없었어요. '출타중'이라고 팻말만 하나 붙어 있었어요. 전화번호도 하나 안 적혀 있더라고요.

커트여자 일 참 대충하네.

웨이브여자 (웃으며) 데스크에 레모나가 있길래 훔쳐 왔어요. 하나 드실래요?



웨이브여자, 레모나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커트여자 진짜 오랜만에 본다.

웨이브여자 저도 좋아해요.

단발여자 (윤정에게) 그렇게 좋아?

윤정 맛있잖아.

단발여자 난 맛있는지 모르겠던데.

윤정 꼭 사람 같다니까. 싫다, 싫다 하다가도 먹다 보면 정 들어서 익숙해지거든. 그렇게 시다가도 눈물 한 번 흘리고 나면 또 입에서 단맛이 돌고.

단발여자 아무튼 그만 좀 먹어. 키스할 때 신트림난단 말이야.

윤정 시긴 뭐가 셔.



윤정, 단발여자에게 키스한다. 그리고 웨이브여자와 커트여자에게도 키스한다.



윤정 (단발여자와 키스하며) 봐봐. 달콤하지?

웨이브여자 달콤하죠? (그리고 웨이브여자에게도)

단발여자 하나도 안 달구만. 눈물나게 시네. (그리고 커트 여자에게도)

커트여자 그렇게 셔요? 난 괜찮은데.

단발여자 좀 덥지 않아요?

웨이브여자 네. 더워요.

커트여자 더워서 죽을 것 같아요.

웨이브여자 문 좀 열까요?

단발여자 네. 문 좀 열어요.



창문을 연다. 매미 소리가 들린다.



커트여자 벌써 여름이네.

웨이브여자 진짜 매미소리 맞아요? 우리 집 근처에서 우는 매미랑 소리가 좀 다른 것 같은데.

커트여자 참매미예요.

웨이브여자 소리만 들어보고 어떻게 알아요?

윤정 맴맴맴 하는 건 참매미, 쓰름쓰름 하는 건 쓰름매미.

커트여자 진짜?

윤정 거짓말이야.

커트여자 (매미가 운다) 가까이서 우는 것 같은데. (어디 공중을 바라보며) 저기 있다. 거미줄에 걸렸네. (사이) 그래도 계속 우네. 곧 죽을 텐데.

윤정 금방은 안 죽지.

커트여자 사왔어? 그거.

윤정 (주머니에서 말보로 레드와 라이터를 꺼내어 준다.) 여기.

커트여자 선생한테 안 들켰지?

윤정 내가 들킬 사람이냐?

커트여자 매번 고맙다.

단발여자 문도 열었으니까 담배 피워도 되겠죠?

웨이브여자 여기 재떨이 있는 거 보니까 피워도 될 것 같아요.

커트여자 상갓집에서 담배 안 피우면 어디서 피웁니까.



세 여자, 윤정이 준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윤정 이쪽으로 뿜지 마. 냄새 배.

커트여자 냄새 배라고 그러는 건데.

윤정 나쁜 년.

커트여자 담배 심부름 1년 만에 알아낸 사실이 겨우 그거냐.

윤정 넌 진짜 나쁜 년이야. 지옥 갈 거야.

커트여자 나는 지옥 안 가. 우리 엄마가 새벽기도 나가서 나 대신 하나님한테 사과하고 다니시거든.

윤정 그럼 지옥은 내가 가겠네. 새벽기도 가주는 엄마 없어서.

커트여자 (사이) 담배 펴 볼래?

윤정 됐어. 좋지도 않은 걸.

커트여자 안 좋은 거면 사람들이 몇 천년 동안 피우고 있겠냐? 좋은 거니까 피우는 거지.



커트여자, 자기가 피우던 담배를 윤정에게 준다. 윤정 망설이다가 피운다.



커트여자 천천히, 숨을 깊숙히 넣어. 끝까지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어. (사이) 어때?

윤정 토할 것 같아. 가슴이 탁 막히고 머리가 팽 돌아.

커트여자 처음엔 다 그래. 익숙해지면 괜찮아져.

윤정 맛없어.

커트여자 원래 멋있는 건 맛이 없는 거야. 그래도 이게 꼭 사람 같다니까. 싫다, 싫다 하다가도 자꾸 보면 정이 들어서 익숙해지거든. 익숙해지면 못 끊지.

윤정 너처럼?

커트여자 (사이) 너 많이 컸다.

윤정 네가 키웠잖아.

커트여자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만.



두 사람 손을 잡는다.



단발여자 말보로 오랜만이네요.

웨이브여자 정말로요. 고등학교 때 많이 피웠는데.

커트여자 고등학교 땐 다들 말보로였죠.

웨이브여자 뭣도 모르고 이게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단발여자 제일 독하니까.

웨이브여자 냄새도 제일 안 빠지고.

커트여자 이제는 에쎄가 좋아요. 얇고 피운 것 같지도 않아서.

단발여자 윤정이는 계속 말보로를 피웠어요.

웨이브여자 왜요?

단발여자 뭐든 오래가잖아요. (사이) 뭐든.



윤정, 커트여자의 손을 만지작거린다.



커트여자 윤정이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나요. (윤정이를 보며) 영정사진을 보면 제가 아는 윤정이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있어서 이상하기만 해요. 윤정이와 조금 닮았네, 싶기는 하지만 윤정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윤정 나도 엄마 얼굴이 기억 안 나는데.

커트여자 어떻게 맨날 보는 얼굴이 기억 안 날 수가 있냐?

윤정 같이 산다고 해서 매일 보는 것은 아니야. 벽지무늬가 생각이 잘 안 나는 것처럼 엄마는 너무 오래된 가구라서 가끔 그게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차라리 엄마가 죽은 사람이라면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어렸을 때는 그 사람이 엄마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 엄마는 어디에 돈 벌러 간 거고 돈이 충분히 모이면 다시 날 데리러 올 거라고. 그래서 항상 진짜 엄마를 기다렸어. 숙제를 하면서 티비를 보면서 항상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커트여자 난 가끔 네가 무서워. 넌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매미가 운다.



단발여자 몇 년을 땅 속에서 살고 겨우 땅 위에 올라와서는 한 달도 못 살다니.

가여워요. 오랜 무명생활을 거친 뒤에 성공하자 마자 죽는 수퍼스타 같잖아요.

웨이브여자 거꾸로예요.

땅 아래에서 진짜 삶을 살다가 타지에서 죽는 거죠. 불쌍하게도.

먹고 자고 놀고 바깥 세상에서 만날 다른 사랑에 대한 꿈을 꾸고. 하지만 땅 위로 올라온 뒤부터는 아이를 낳고 죽는 일 밖에는 할 게 없죠.



"내가 배신했어, 덕분에 넌 배신자가 아니지" 
"우린 맞는 게 없어, 그거 하나만 마음이 통하네"

 


커트여자 제대로 진화하지 못했어.

윤정 제대로 진화하려면 누군가는 죽어줘야 해. 다윈상이라고 들어봤어?

커트여자 다윈상?

윤정 자신의 열등한 유전자를 스스로 제거함으로써 인류의 우월한 유전자를 남기는 데 공헌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지.

커트여자 자살이라는 말이야?

윤정 아니. 멍청하게 죽은 사람들이라는 거야.

커트여자 감도 안 잡히는데.

윤정 사우나에서 오래 참기 내기를 하다가 몸이 익어서 죽은 사람이나 용광로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려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 욕조에서 물위를 걷는 연습을 하다가 비누를 밟고 죽은 사람도 있다고. 소포폭탄 테러를 하려던 테러리스트는 우표를 덜 붙여서 반송된 자기 소포를 뜯어보고 죽었어.

커트여자 (어이없는 표정으로) 거짓말이지?

윤정 진짜야.

커트여자 (어이없는 표정으로) 거짓말이지?

윤정 진짜야.

커트여자 (사이) 자기 소포를 뜯어보고 죽었다고? 세상에.



뒤늦게 웃는 커트여자와 윤정. 작은 웃음이 번져서 서로를 때리며 웃는다.



윤정 죽는다면 그렇게 죽어야 해. 우습고 만만하게 죽

어야 해. 

커트여자 그러다가 장례식에서 웃으면 어떡해?

윤정 괜찮아. 넌 안 올 거니까.

커트여자 어?

윤정 지금은 너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일 길에서 만나면 난 널 모른 척 할 거거든. 넌 내 장례식에도 안 올 거고 앞으로 나랑 만나지도 않을 거야.



긴 사이. 

커트여자, 윤정의 뺨을 때린다.



커트여자 나쁜 년. 넌 날 배신했어.



윤정, 커트여자의 뺨을 때린다.



윤정 그래. 내가 배신했어.

덕분에 넌 배신자가 아니지.



매미가 운다



단발여자 매미 소리 한 번 시원하네요.

커트여자 시끄럽기만 한데요.

웨이브여자 매미는 짝짓기를 하면 죽어버리나요?

커트여자 그렇겠죠?

웨이브여자 그럼 알은요?

커트여자 네?

웨이브여자 알은 어떻게 해요? 알을 가진 채로 죽나요?

커트여자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 알을 어디다가 낳고 죽겠죠. 안 그래요?

웨이브여자 그럼 수컷 매미는 기다려줄까요? 암컷이 알을 낳을 때까지?

단발여자 수컷이 먼저 죽고 암컷이 혼자 알을 낳겠죠. 개미나 벌도 그렇잖아요.

웨이브여자 수컷은 아기를 낳기 전에만 필요한 거야. 아이를 낳은 다음부턴 영 필요가 없어.

윤정 (사이) 너 살 좀 빠진 것 같다.

웨이브여자 다이어트 할 때는 그렇게 빼려고 해도 안 빠지더니. 두 명이 되니까 오히려 살이 빠지다니. 애쓰지 않은 일은 언제나 참 잘 돼.

윤정 예뻐졌어. 너 무척 예뻐졌어.

웨이브여자 나와줘서 고마워. 언니는 나와줄 줄 알았어. 나 며칠 전부터 누굴 불러야 할지 몰라서 한참 고민했거든. 핸드폰 연락처를 보면서 기역부터 히읗까지 하나하나 이름을 보면서 넘기는데 어떻게 그렇게 연락 못 할 사람밖에 없는지 몰라.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고. 그렇게 계속 이름들을 넘기다가 딱 언니 이름을 보니까 안심이 됐어. 언니는 그냥 나와 주겠구나. 누구 애인지 안 물어보겠구나, 싶어서.

윤정 (웃으며) 절대로 못 물어보게 만드네. 별로 좋은 일 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네 얼굴 보니까 좋긴 하다.

웨이브여자 언니 그만두고 나서 별 소문이 다 돌았던 거 알아?

윤정 무슨 소문?

웨이브여자 언니, 남자한테 하도 많이 데어서 여자 만난다고. 너무 신경 쓰지마. 여기서 일하는 년들 말하는 거야 거짓말밖에 없는 거 잘 알잖아. 내가 다 혼내 줬어.

언니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했어. 언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언니 험담하고 다니는 거 정말 짜증나.

윤정 (사이) 얼마나 됐어?

웨이브여자 8주.

윤정 입덧은?

웨이브여자 다른 건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그렇게 싫어했던 오이는 좋아하게 됐어.

윤정 신기하네. 너 냉면이나 김밥에 들어간 오이도 안 먹었잖아.

웨이브여자 나랑 아기랑은 입맛이 다른가봐.

윤정 (사이) 너 오이비누 기억나? 우리 어릴 때 많았는데 요즘은 별로 없더라.

웨이브여자 어. 기억난다. 나 그때도 오이 비린내가 싫어서 그 비누는 쓰지도 않았어.

윤정 난 좋아했는데. 세 살 때 엄마가 머리 감겨 주던 기억이 있거든.

웨이브여자 거짓말. 세 살인데?

윤정 엄마에 대한 건 다 잊어버렸지만 그거 하나는 기억나. 빨간 대야에 뜨거운 물이랑 찬물을 섞어서 오이비누를 손 끝에 묻혀서 머리를 살살 감겨 줬어. 코도 흥 풀어 주고. 그 냄새만 맡으면 마음이 참 편했어.

웨이브여자 (사이) 아기가 없어지면 다시 오이가 싫어질까? 이제 겨우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윤정 네 딸만 알겠지.

웨이브여자 딸? 어떻게 알아?

윤정 그냥 그럴 것 같아. 꼭 딸일 것 같아.



윤정, 웨이브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윤정, 웨이브여자를 빤히 응시하다가 꼭 안아준다. 안은 채로 속삭인다.



윤정 너는 오이가 좋아졌겠지만 그 딸은 오이를 싫어하게 될 거야. 영영 싫어하게 될 거야. 자기 입맛을 찾아서 엄마의 흔적이 닿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웨이브여자, 잠시 정지해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든 듯 윤정의 포옹을 뿌리친다. 윤정을 밀쳐낸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란다.



웨이브여자 미안해.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윤정 아냐.

웨이브여자 나는 단지 무서워서.

윤정 (사이) 우리 친구 맞지?

단발여자 친구라는 말은 참 애매한 것 같아요. 너무 흔하게 써서 막상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커트여자 뭐가요?

단발여자 동갑내기여도 친구. 아는 사이여도 친구. 애인이 아니어도 친구. 멀어지고 싶을 때도 친구.

커트여자 난 그게 좋은데. 안전하고. 공식적으론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웨이브여자 (윤정에게) 언니, 그 사람 누구야?

윤정 (단발여자를 소개시키며) 인사해. 내 친구야.

단발여자 안녕하세요. 윤정이 친굽니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윤정 꼭 그딴 식으로 이야기 해야 돼?

단발여자 내가 뭘?

윤정 나한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똑바로 이야기해. 비꼬지 말고.

단발여자 네가 나한테 준 상처는 생각도 안 하지?

윤정 도대체 뭐가 문제야?

단발여자 뭐가 문제냐고? 넌 내가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 르겠어? 이럴 거면 헤어져. 정말 지긋지긋해.

윤정 날 배신하려는 거야? 

단발여자 네가 먼저 나를 배신하게 두지는 않아.

윤정 (사이) 친구를 원한다면 그래, 친구가 되어 주지. 아무런 사이가 아닌 사이가 되어 줄게. 그러니까 멀리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매미가 운다.



웨이브여자 우리 여기 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났죠?

커트여자 오 분, 십 분. 아니 한 시간, 한 달.

단발여자 일년, 아니 이년.

웨이브여자 이상해요.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다리를 건너서 장례식장으로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어요. 문지방 너머에, 거울 모서리에,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눈동자의 구석에 우리는 갇혀 버렸어요. 

단발여자 난 니가 정말 싫어.

윤정 뭐가 그렇게 싫은데? 전부 말해 줘, 하나도 빠트리 지 말고.

단발여자 우린 너무 달라. 하나도 맞는 게 없어.

윤정 그거 하나만 마음이 통하네. 좋아. 언제든지 화내고 싸움을 걸어. 욕도 하고 물건도 던져. 

단발여자 난 네가 싫어. 너무너무 싫어. 차라리 네가 엄마였으면 좋겠어. 그러면 마음껏 미워할 수 있을 텐데.

윤정 그래도 할 수 없어. 나는 네 근처에 있을 거야. 영원히 들러붙어 있을 거야. 아주 옆에는 말고. 하지만 근처에.



매미가 운다.



커트여자 언제부터 매미가 울었죠? 지금이 매미가 우는 계 절이 맞나요? 

단발여자 그럼요. 이렇게 땀이 나는데요.

커트여자 그런데 저 사람(웨이브여자를 가리키며)은 왜 겨울 옷을 입고 있죠?



사이.



단발여자 우리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죠?

웨이브여자 이년, 아니 일년.

커트여자 한 달, 한 시간, 아니 십 분, 오 분. 

단발여자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커트여자 기형도는 죽었죠?

웨이브여자 시인은 죽는 게 어울려요.

윤정 그거 알아? 기형도는 되게 웃기게 죽었다던데.

웨이브여자 어떻게 하면 웃기게 죽는데? 

윤정 영화관에서 '뽕2'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죽어 버렸지.

죽는다면 그렇게 죽어야 해. 우습고 만만하게 죽어야 해. 

웨이브여자 장례식에서 웃으면 어쩌지?

윤정 뭐 어때. 넌 안 올 거야.

웨이브여자 어?

윤정 지금은 너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일 길에서 만나면 난 널 모른 척 할 거거든.

웨이브여자 어째서 날 배신하는 거야?

윤정 네가 날 배신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웨이브여자 이렇게 언니는 주문을 걸었지.

언니가 장례식에 꼭 와야 한다고 말했으면 나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텐데. 언니는 내가 그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어.

단발여자 문지방 너머에, 거울 모서리에,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눈동자의 구석에 우리는 갇혀 버렸어. 영영 나가지 못해.

웨이브여자 진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윤정 오래된 가구가 되었어.

단발여자 항상 옆에 있지만 아무도 네가 어디 있는지 몰라.



사이. 

매미가 운다.



웨이브여자 저, 죄송한데 여기 윤정이 언니네 맞아요? 401호.

단발여자 '윤정이 언니네'요?

웨이브여자 (웃으며) '윤정이 언니네'래. 제가 이래요.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뭐라고 말해야 되지? 뭐죠?

단발여자 빈소요.

웨이브여자 맞다, 빈소.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났어요.

(단발여자에게 친근하게 굴며) 우린 본 적 있죠?

단발여자 (부담스러워하며) 없는데요.

웨이브여자 본 적 있는데. 윤정언니랑 분명 같이 봤을 거예요.

단발여자 어디서요?

웨이브여자 어디서 봤더라. 아무튼 어디서 봤는데. 만난 적 있는 건 확실해요. 제가 사람 얼굴 하나는 잘 기억하거든요.

단발여자 어쩌면 결혼식에서 봤나 보죠. 어쩌면 장례식이거나.

웨이브여자 그럼 결혼식이겠네요. 장례식은 처음이거든요.

윤정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이.



커트여자 죽었나?

단발여자 네?

커트여자 에어컨이요. 아까까지 나오다가 갑자기 안 나오네요.



네 여자 서로의 틈에 서 있다.

매미가 운다. 조명 어두워진다.

- 끝 -

 

 

 

 

[당선소감] "귀신 아닌 사람들이 사는 세상 위해 더욱 정진"

저한테 허락된 지면이 원고지 네 장이라고 하더군요. 어찌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감히 신문에 대고 말을 할 수 있는 게요. 이걸 하려고 제가 그동안 울면서 희곡을 썼나 봅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구 안기부에 터를 잡은 학교입니다. 터가 세서 예술하는 미친 사람들이 아니면 중화시킬 수 없다고 해서 그곳에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다녀보니 귀신도 나오지 않고 그냥 평범하더라고요. 사람이 그곳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고 소문을 냈을 뿐이죠. 가장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지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나는 석관동에 더 이상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안 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는 남영동에도 귀신 대신 사람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귀신의 탓이 아니라 사람의 탓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이 귀신이 되는 건 생각보다 쉬운 모양입니다. 오래된 작가도 오래된 사람도 쉽게 귀신이 되더군요. 나는 시작하는 작가입니다. 귀신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꾸준히 글로 쓸 따름입니다.

오늘을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찬양/1986년 경북 포항 출생.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중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재학.

 

 

 

 

[심사평] "긴장감 해치지 않으면서 상황 설명하는 캐릭터 돋보여"

희곡 역시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차는 있을지언정, 2000년대 라이프스타일을 담으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취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포착하느냐가, 작가의 개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되리라 본다. 이때 삶과 현실을 포착하는 언어가 문제될 수밖에 없다.

당선작의 가시권에 든 작품은 '쥐', '미향이, 그녀', '윤정이네 401호'였다. 모두 독특한 구성과 흥미로운 인물 창조로 시선을 이끌었고, 나름대로 개성과 작법을 확보하고 있었다. '쥐'는 두 개의 무대를 설정하고 과거와 현재를 연계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만드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고, '미향이, 그녀'는 평범한 삶에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담으려고 한 점이 이색적이었다. 특히 '미향이, 그녀'는, 단하에 내려놓기가 아쉬웠다.


'윤정이네 401호'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작품의 인물들이 희곡이 요구하는 필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점이다. 긴장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윤정'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응축한 캐릭터가 무척 돋보였다. 다른 이유는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였는데, 언어의 연상 작용과 말의 순환 반복을 통해, 평범한 말에 가려진 '윤정'의 삶의 실체를 그려내는 데에 성공했다. 희곡 쓰는 법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으면서도, 과장하거나 치장하지 않는 점도 미덕이다. 큰 발전과 참신한 시도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남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