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이명耳鳴

 

 

남겨진 풍경마다 어둠이 내렸다. 또 밤이다. 부산하게 오가던 골목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흐릿한 형체로 남겨질 무렵에서야 서재로 돌아왔다. 나의 지문을 화석처럼 안고 있는 빼곡한 책장의 책들, 수많은 생각과 번뇌를 기억의 저편으로 잠재우게 했던 책상, 가장 가까이에서 체온을 나누며 몸을 의지한 의자, 모든 풍경이 오랫동안 묵혀 두어 익숙함에도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의자에 앉아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은다. 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오늘과 내일이 교차된다. 생각의 덩어리가 커지고 한없이 깊어지는 시간이다. 때론 마음의 향방이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혼돈스러워질 때면 조용히 눈을 감는다.


현실과 멀어져 가는 이상들은 꿈결인지 생각인지도 모를 무아無我의 세상으로 나를 몰고 간다. 빛과 파장, 소리와 형태, 느낌과 흐름이 함께 공존하는 곳.


윙-, 윙-, 윙-, 삐---, 한 줄 소리가 바늘처럼 뇌리를 뚫고 지나간다. 누군가가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대며 이 밤을 지새울 작정인가 보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소리를 피해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옮긴다.


숲이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 잠시 웅크리고 있는 시간은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고요하다.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는 숲의 적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길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겨 놓는다. 풀들이 몸에 부딪힌다. 조용하면 더 뚜렷해지는 것이 소리일까. 스윽-, 신경을 곤두세운 소리들이 나를 올려다본다. 지금 나는 불청객처럼 흘러들어 숲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다. 찌르르-, 찌르레기가 울고, 매앰 맴-, 끼르끼르-, 매미, 귀뚜라미가 사방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둘러보아도 그들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땅이 울렁이고 사방이 흔들린다. 온 숲을 밀어붙이는 굴착기 소리, 찌익찌익- 쇠를 갈아내는 잔인한 소리들이 나를 공격한다.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나를 용서하질 않는다. 모두가 나를 향해 원망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을 따라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걸까. 숨통을 죄어오던 숲이 멀리 있음을 직감으로 알았다. 여전히 사방은 실루엣으로만 형체를 내보이고 있다.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난다. 뻗으면 손에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물결이 서 있는 듯하다. 차르르-, 수면은 잔잔했다. 바다의 놀음에 심취되어 몇 발자국 옮겨 놓는다. 차르르르-, 자갈을 밟는 발자국 소리에 파도가 나의 침입을 눈치 챈 듯했다. 쏴아-, 나를 집어삼킬 듯 고개를 쳐들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높이 일어선 파도는 위협이라도 하듯 달려와 바위에 장쾌히 부서지며 제 형체를 드러낸다.


자리에 누웠지만 소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루 중 마지막 고비다. 깊은 밤이면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지쳐 몸은 바닥으로 스르르 녹아든다. 소리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첫 소리의 여행이 시작된 것은 스무 해 전이었다. 어느 날 귓가에 생면부지의 수상한 객이 찾아왔다. 처음엔 그저 조금 거슬릴 뿐 고통은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 잠잠해지리라 믿었지만 서서히 마수를 뻗어 온갖 소리로 제 본색을 드러냈다. 잠시 잠잠하다 싶다가도 몸뚱이가 지치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정신을 교란시킨다. 그럴 때마다 현기증이 일어 바닥에 주저앉곤 했다. 불면의 날이 지속되면 될수록 내 영혼은 소리로부터 유린당하고 있었다.


얼마를 더 견디면 오늘이 지난단 말인가. 오늘만 참으면 내일이 올까. 동 트기가 얼마나 힘에 겨운가를 이명을 지독하게 앓아본 사람은 알리라. 새벽을 깨우며 일어날 때, 이제 제발 멈추길 바라는 그 희미한 기대가 깨어지는 순간, 오죽했으면 연명延命의 꿈마저 풀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해보았으랴.


세상의 소리들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바깥의 소리처럼 웅웅 거렸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마음은 혼탁해져서 표정마저 일그러뜨렸다. 진저리를 치며 돌아서도 메아리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소리들은 삶의 흐름을 건드리며 나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세상의 소리가 자유자재로 나부대는 낮에는 그나마 잊을 수 있다지만, 밤은 쇠사슬에 묶인 듯 고통의 세계로 끌려가고 있었다. 칭칭 감고 있는 지긋지긋한 소리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산 능선 위에 낮달이 희멀겋게 걸려 있던 어느 가을, 밤새 소리에 난타 당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초점 없는 눈, 맛을 잃은 입, 세상 어디에서도 대접 받지 못할 야윈 몸으로 버스에 올랐다.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아양교의 물결은 단정했다. 잠시 고요에 빠져있을 때 다시금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는 듯 요란했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목으로 넘어가는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힘없이 무너지는 한 남자가 차창 속에 있었다. 결핵을 앓아 핏기 없고, 퀭한 두 눈과 광대뼈만이 덩그러니 자리 잡아 얼굴임을 말해주던 남자, 깡마른 체구에 폐 구석구석까지 균들에게 내어준 그 남자는 어쩌면 물결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고통도 잠재우는 묘약이었을까. 소리와 동거하는 스무 해 동안 고목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직도 건재하다.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옹이 여럿 품고서 중년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음이 참 다행스럽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이다. 마치 실체 없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것, 그것은 허상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숱하게 나를 위협했다지만, 따지고 보면 단 한 번도 나를 문밖으로 내몰지 못했다. 내 안에서 만든 소리는 그럴 힘이 없다. 안에서는 소리의 폭군이라지만 바깥에서는 맥을 못 춘다. 그래서 소리는 무형의 포효다. 나를 찢고 파괴할 발톱도 가지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간 내 스스로 자신을 얽어매며, 가두며 더 크게 고통의 소굴로 내몬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도 오랜 세월 같이 살다 보면 벗이 되는 것인가. 이제 나는 이명에 대한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생존법을 터득했다. 처음엔 금은방의 저울처럼 미세한 소리의 무게에도 휘청거렸으나, 이제는 넉살좋고 인심 후덕한 재래시장의 방앗간 저울처럼 큰 보릿자루 서너 개쯤 올려놓아도 거뜬히 소화해내는 여유가 생겼다. 이명은 나를 산 채로 굴복시키기 위한 덫이 아니라, 어쩌면 긴 생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동반자였는지도 모른다.


요즘 이명을 대하는 내 뱃심이 제법 두둑해졌다. 소리를 삼 시 세 끼로 먹고, 내 걸음의 디딤돌로 여기며 인생의 강물을 저벅저벅 걸어 여기까지 살아서 다다랐다. 우리네 삶이 언제 고통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노력하여 바꾸지 못한다면 받아들이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옳으리라. 뼈에 사무치는 아픔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것에 대한 건강한 해석이 아닐까.


그랬다. 이명은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장벽이 아니었다. 이명耳鳴은 이명異鳴을 듣게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내 귀의 소음이 커질수록 상대의 세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리라. 온갖 고민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소리가 이윽고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얼마나 아픔이 서려있는지, 무거운 인생의 짐이 얹혀 욱신거리는지 이명耳鳴을 앓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르륵 사륵, 소리가 먼저 일어나 여명을 밝힌다. 오늘도 긴 소리의 여행길에 오른다. 이젠 제법 여행을 즐길 배낭 하나쯤 거뜬히 꾸려 나선다. 숲을 걸으며 만나게 될 바람, 물, 새, 매미, 귀뚜라미들,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의 속삭임,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볼 참이다. 때로는 나의 이야기도 그들에게 들려 줘 볼까 한다. 모든 것이 허상이어도 좋다.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소리들이 내 안에 기거하는 동안 나는 더 넓어지고, 더 여물어지는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프지만 깊은, 쓸쓸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여행을.

 



[당선소감]


이상렬

  
▲ 이상렬씨(수필 부문 당선자)
한때는 섣부르게 이기려는 시늉을 하면서 아등바등 산적도 있었다. 걸어온 길 되돌아보니 자욱한 눈물천지다. 참담한 시절 부끄러운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 것이 수필이다. 수필은 지면서 살아도 행복한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끔씩 그 도가 넘을 때 있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어도 꼴등이다. 나의 자리는 어느 덧 아득한 끄트머리가 되고 말았다. 몸에 밴, 지는 습성 때문에 이제는 뒷자리가 편하고 바닥이 푸근해졌다. 이런 내가 상賞을 받았다. 지금 나는 몹시도 어질어질하다.
큰 감사를 드리고 싶다. 대구 MBC 수필반에서 맑은 삶, 혼신의 글쓰기를 가르치시는 곽흥렬 선생님께, 함께 동행을 해 준 숨겨진 옥석들에게 뜨끈한 국밥 한 그릇 사드리고 싶다.
이 행복한 기분에 취해, 나와 같이 소리의 전쟁을 치르고 사는 사람들과 휘파람 휙휙 불며 살련다. 귀가 있어도 들을 귀 없는 꽉 막힌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들으며, 시끄러워도 천근의 고요를 꿈꾸며 가슴 펴고 살고 싶다. 새해 아침, 햇살이 눈부셔서 삶이 이렇게 맛있는데 귓속 작은 소리 돋아나는 것이 뭐가 대수겠는가.

 

경북 경산 자인(1967년 생) 
2012년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2012년 보훈문예대전 수필 부문 우수상
* 주소: 대구시 동구 동호동 386-4번지 301호
* 전화번호 : 
* 메일주소 : love@hanmail.net



[심사평]

 

응모작 중 대다수가 먼 곳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점이 조금 놀라웠다. 각지에서 도착한 원고들이 섬을 향해 펄럭이는 배의 돛처럼 느껴졌다. 항해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섬의 이미지가 그들에게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장고 끝에 올해의 당선작을 ‘이명’으로 정했다. ‘날라리’, ‘이끼’, ‘뼈’, ‘손’ 등을 두고 여러 번 검토했다. 글을 엮는 수준에서는 ‘이명’을 능가하는 면이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명’은 앞부분에서 쉽게 몰입을 하지 못하는 점 때문에 과감하게 한 두 단락을 희생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반복되는 내면의 스케치도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감동의 울림이 컸다.


마치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에서처럼 글 속의 남자는 귀를 감싼 채 혼자 절규하고 있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 마침내 그는 공포의 난간을 걸어 나간다. “이명(耳鳴)은 이명(異鳴)을 듣게 한다.”는 것을 체득하였고 바야흐로 자신을 괴롭히던 소리의 숲에서 바람, 물, 새, 귀뚜라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려보리라는 독백을 하기에 이른다.


두드러지는 객관적 상징물이나 에피소드 없이 우직하게 ‘이명’을 쓴 반면에 그의 다른 글 ‘본심’에서는 여러 작법을 활용하여 식상하기 쉬운 부성애라는 주제를 잘 그려냈다. 그런 점이 앞으로의 탁마를 통해 더욱 깊은 감동을 주는 글을 쓰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끝으로 전국각지에서 이 섬을 향해 염원의 돛을 올렸던 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언젠가는 자유의 바다를 건너 저마다의 그리운 섬에 닿길 기원한다.


·오성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