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간 맞추기 - 최희명
간 맞추기 (최희명 작)
나긋나긋해진 노란 배추속이 음식이라기보다는 잘 찍은 사진이나 그림 같다. 붉은 양념으로 침범하기가 저어된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이든 뻣뻣하게 구는 게 싫어져서 올해는 조금 오래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 얌전히 숨죽인 채 물기가 빠지고 있는 채반에서 여리고 노란 배추속잎 하나를 뜯어 양념과 함께 간을 본다. 나긋함 속에 고집을 드러낸 짠 맛이 혀를 제압한다. 나는 배추에 간을 맞췄는데 배추는 나긋한 몸으로 내 눈을 맞추었고 짠맛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왔다. 충분히 조율하지 않고 강요하듯 맞춘 간은 그저 짜거나 싱거울 뿐 진정한 의미의 간은 아닌 모양이다.
누구나 첫걸음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첫 아이가 그렇다. 최선의 선택이라 우기며 강요하거나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개입한 부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그런가. 천성이 그런가. 성장을 완료했건만 세상으로 나가려하지 않는다. 말도 없다. 두문불출하는 우리 집 맏이 때문에 가슴이 늘 묵지근하다. 어쩌다 말을 섞으면 옹골차게 뱉어내는 짜디짠 반응이 소태 같다. 행여 내가 주입한 염기일지도 몰라서 소스라친다. 지금 저렇게 숨죽이고 있는 자식의 가슴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지 못해 서성거린다.
어떠한 각진 맛도 만들지 않고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간을 조금씩만 받아들인 물질이나 사람은 조금 싱겁다. 자연과 가장 가까운 원형질이다. 본래의 자존심을 간직한, 동치미 국물처럼 슴슴한 맛은 허허실실 할 일 다 하는 둘째 아들이다. 엄마의 매운 맛도 형의 짠 맛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는 우뚝하다. 나의 톡 쏘는 말을 싱거운 대답으로 흡수해 버리면 덩달아 싱거워지고 만다. 쫓기지 않고 세상과 어우러져 사는 여유가 느껴진다.
드센 염기를 견디며 시집살이처럼 눌러 지낸 인고의 맛을 짠지를 통해 본다. 그러기에 석삼년을 묵묵하게 견딘 며느리처럼 얼마나 진득한가. 그러나 짜다고 투덜거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독을 타 듯 물속에 다량의 소금을 집어넣은 건 우리가 아닌가. 투사처럼 튀어 오르지 못하도록 압재의 돌덩이를 얹은 것도 우리들이다. 제가 가진 모난 성질을, 물기를 소금물 속에서 완전히 탕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해방된다. 그러나 빛을 보았다 하여 바로 세상과 만나지는 못한다. 어둠의 그림자를 희석시키는 과정이 남아 있다. 짠지는 시간이 만들어 낸 맛이다. 어머니의 손맛처럼 깊다. 그 인내의 향기로 언제 어디서나 수수한 중독성을 갖는다.
사랑, 일견 단맛 같지만 그것은 아마도 신맛일 듯하다. 처음에, 그리고 아주 가끔 벌꿀처럼 달콤하지만 뒤끝은 쓰기도 하고 떫기도 하다. 때론 예방주사처럼 따끔하게 매운 맛도 가르쳐준다. 그러나 늘 가슴 속에 침이 고이는, 그래서 사랑은 신맛이다. 삶에 있어 그만큼 당기는 유혹이 또 있을까. 유혹을 받아 들여 관계를 만들고 관계의 지속으로 열매를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새큼한가. 기쁨과 아픔과 슬픔이 시간과 함께 간을 맞춰 버무려지면 드디어 숙성된 과일 효소처럼 깊어질 것이다.
요사이는 약방의 감초처럼 단맛이 모든 간을 맞추는데 끼어든다. 이제 사람들은 약간의 단맛과 친절과 칭찬은 예의라고 생각한다. 때로 단맛은 지나친 소금과 결탁해 미각을 호도하기도 하고 장부상으로는 절대 적법한 이윤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달콤함은 쓴 맛을 수반할 때 그 느낌이 상승한다. 참고 또 참은 시간 뒤에 있거나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의 앞에 있다. 그래서 단 맛은 두 얼굴이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살면서 얼마나 수도 없이 매운 맛을 보았는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볐다가 얼마나 눈물이 쏙 빠지게 혼쭐이 났던가. 시간은 가고 기억도 흘러 상황이 재현되면 본능처럼 욕심 하나로 기어이 매운 맛을 다시 보고야 만다. 그래서 삶은 영원히 미완성이다. 알고 싶지 않은 자신의 한계를 어쩔 수 없이 알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꼬리를 감추는 톡톡한 맛이다. 어찌어찌 정신 차려 살다가도 는적거리는 현실에 비위 상할 때가 있다. 약이 바짝 오른 청양고추 몇 개 된장 듬뿍 찍어 먹고 나면 속이 개운해지는, 삶이란 그런 것인가. 늘 일깨워 가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 각지고 헛도는 톱니바퀴처럼 각각인 성질을 도와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조미의 힘이다. 예인이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미미하다고 생각될 때, 떨어진 갓끈이 못내 아쉬울 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주변이 너무 멀 때, 받은 것 없이 얼마나 관대한가. 준 것 없이 얼마나 고마운가. 인연을 존중하지 않거나 존중하는 방법을 모르는 관계를 얼버무려 돕는다.
바람이 되어 사라져 버린 옆지기는 사는 일에 늘 시들거렸다. 새파랗거나 샛노랗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빛이 바래 있었다. 간도 되지 않고 양념도 먹히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건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그 상태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매일 다른 래시피로 그에게 맛을 내 보려 했다. 그러나 ‘네 맛도 내 맛도’ 모르는 듯 그는 시종일관 간이 드는 걸 거부했다. 하나의 요리로 가시버시 섞이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바람으로 떠돌고 나는 무말랭이처럼 비틀리고 메말라갔다. 시간에 의해 얼마쯤 생각이 숙성된 지금에 와서야 나의 양념이 너무 강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간이 되지 않으면 한번쯤 익혀볼 수도 있었겠다. 기다림으로 맛을 내는 짠지에게처럼 보채지 않는 진득함도 필요했겠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지만 적용할 대상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기로 한다.
간은 시간이고 관계이며 관심이다. 어떤 요리가 완성 되었다 해도 보편성 원리의 으뜸은 간이 맞아야 한다. 소금이 빛과 비견되는 이유다. 상대를 너무 지치게 해도 내가 너무 지쳐도 사람 사이 간은 맞지 않을 것이다. 착한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는 설탕으로만 간을 맞춘 호박죽 같다. 아픔도 나누고 미움도 삭힐 수 있는 사이는 소금으로 완성된 단맛 같은 것 아닐는지. 조금 짜게 간이 된 김치 사이에 박아 두는 넓죽한 무처럼 서로를 알맞게 이어주는 존재이기를 소망해본다.
<수필> 최희명 당선소감-빈 가슴 글로 채워
살면서 늘 허기가 졌습니다. 밥으로도 재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공이 가슴에 있었습니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도 하얀 허공으로 비어 있던 가슴이, 글을 쓰면서 차츰 그득해 졌습니다. 살면서 넘어온 험산준령 가시밭길이 그대로 글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과거는 그렇다 쳐도, 앞으로의 삶을 제대로 살아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선비의 문학이라 일컫는 수필은 시의 상상력이나 소설의 리얼리티보다는 사실적 삶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 고생스러워도 바른 길을 걸으려 노력했습니다.
수필을 쓰면서 참 많은 응원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도반들이며 그들의 짝꿍들까지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응원으로 ‘달동네 귀족’이 되었습니다. 가진 게 없어도 마음이 부자인 상태를 말하는 ‘달동네 귀족’은 스스로 만든 단어입니다. 이제 이렇게 전북도민일보에서 저의 수필을 높이 올려 주시니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 듯 더 높은 영광이 없겠습니다. 글을 써온 대여섯 해 동안 매년 1월 1일마다 신문에 실린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면서 부러움과 존경을 바쳐 왔는데 그 반열에 오른다 하니 헛소문을 들은 것처럼 걸려온 전화번호를 자꾸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더 공부하고 더 성찰하여 높이 올려 주신 이름을 이어 가겠습니다. 끝없이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 사람들이 읽어주는 수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서 꿈꾸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그렇게 지지와 응원의 릴레이가 이어지도록 돕겠습니다. 뽑아 주신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수필>심사평-황토빛처럼 따뜻한 삶의 이야기
수필을 통해 세상은 새로 태어나고 채색되어진다. 전국 각지에서 신춘문예에 응모한 수필은 155명의 작품으로 총 208편이었다. 올해는 특히 일상에서 자주 쓰이던 물건들을 반추하고 그들의 의미를 일깨우는 작품들이 눈에 뜨였다. 지인의 죽음을 통해 삶을 의미를 성찰하고 자연스럽게 내면화한 작품들도 많았다. 작품을 통해 나타난 삶의 진솔함이 황토 빛처럼 따뜻했다. 신춘문예를 위한 작품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몇 편의 작품들은 감성적인 언어로 아름다운 수필이 되기에 충분했지만 글쓰기 공부가 부족하여 산만해져 버린 것이 아쉬었다. 작품을 보내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박수를 보낸다.
당선작으로 최희명의 ‘간 맞추기’를 뽑았다. 배추에 소금 간을 하면서 간이 배는 모습을 통해 두 아들의 성향을 찾고 절제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짠맛, 단맛, 신맛, 매운맛들을 생활 속으로 가져와 한계와 깨달음과 존재의 가치를 되새기고 있다. 관념적인 사고를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흩트리지 않고 한 편의 수필로 완성하였다. 다소 무리한 비유 등이 마음에 걸렸으나 글에서 묻어나온 모습이 절여진 노란 배추속잎 같아서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좋은 글로써 세상과 간 맞추기 바란다.
아깝게 탈락했지만 박헌규의 ‘메주각시’도 우수한 작품이었다. 메주와 메주각시의 관계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 찾고자 하는 점이 돋보였다. 관계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로 다른 상황들과 연계했더라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박일천의 ‘인두’ 채정순의 ‘호미’ 김정수의 ‘두루마기’ 박시윤의 ‘온기’ 박금선의 ‘숫자 속에서 마음을 읽다’ 등 여러 작품들이 탄탄한 구성과 문장력이 돋보인 글이었다. 낙선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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