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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내장 / 김주경



커튼이 내려오며 연극은 끝났다

불쑥 이별을 통보받은 그날처럼

관객도 주인공도 이젠, 

내 몫이 아니란다


함부로 탕진해 버린 시간의 얼룩들로

너무 일찍 마감 된 인생의 에필로그

어둠에 갇힌 오늘이여 

기다린다,

커튼 콜

 

 

 

 

 

[경남신문 신춘문예]시조 당선소감

아주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습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동경이 마음 한편에 옹이처럼 박혀 있었나 봅니다. 조금씩 움을 틔우는 시조에 대한 갈망을 마냥 묻어둘 수는 없었습니다.

2012년은 제겐 또 한 번의 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일찍 찾아온 백내장으로 잠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더 밝은 세상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행운 또한 가져다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격한 율격 속에서 감각적인 언어로 감동을 이끌어 내는 시조의 긴장된 호흡에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자유시에서 정형시로 옮겨가는 발걸음이 무척 조심스럽고 많이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틈틈이 혼자서 습작을 해 온 시간들도 내겐 소중하기에 감히 용기를 내어 보았습니다. 미로 같아 보였던 3장6구에 눈을 맞추고 한 음보 한 음보 조심스레 발걸음을 맞춰 봅니다. 

이제 시조에 대한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커밍아웃하는 마음으로 사랑 고백을 합니다. 부디 시조가 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기를, 나의 사랑만큼 나를 열렬히 사랑해 주기를….

부족한 작품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조의 품격에 걸맞은 보다 깊이 있는 작품으로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다는, 최고의 독자이신 어머니께 오래오래 일급독자로 계셔주기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전합니다. 내 시의 원천인 가족과 긴 시간 문학의 버팀목이 되어 주신 선생님, 동인들 사랑합니다. 모두 함께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1958년 밀양 출생 ◇밀양여고 졸업 ◇2004년 『시선』시 신인상

 

 

 

 

[경남신문 신춘문예]시조 심사평


올해 시조 부문 응모작들은 팍팍한 현대인의 일상을 노래한 것이 많았다. 그만큼 요즘 삶이 간단치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복잡하고 빠른 시대일수록 절제와 명징함을 생명으로 하는 시조가 경쟁력을 갖는다. 또한 세계화 시대, 민족의 정체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에 한국문학의 정수인 시조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심사에 임하면서 시조 본질에 최우선한 작품을 뽑기로 했다. 우선 정형의 양식을 충실히 지키되 현대인의 의식에 와 닿는 신선함과 3장 6구의 보법을 안정되게 구사하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4인의 작품은 나름 치열한 습작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송영일 씨의 ‘문자로 그린 모놀로그’는 제목부터가 눈길을 끌었다. 군데군데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김갑주 씨의 ‘흔적’과 ‘신화부동산’ 역시 좋은 작품이었다. ‘흔적’은 텃밭을 가꾸다가 발견한 백자조각을 통해 조선여인과 “비면에 새긴 명문”을 만나기도 하는 등 활달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신화부동산’은 부동산 이 씨 할아버지의 눈을 통해 주택난과 인생부도를 겪는 우리 이웃의 간단치 않은 삶을 잘 반영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이미지를 드러내기보다 서술에 그치는 단점을 극복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당선작으로 밀지 못했다.

이에 비해 김주경 씨의 ‘백내장’은 2수의 짧은 시조 속에 문득 마주친 중년의 절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불필요한 말을 걷어내고 명징한 이미지로 승부한 것이 “시조답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둘째 수 종장, 호흡을 스타카토로 끊으면서 리듬감을 살린 것도 오늘의 당선에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신춘문예 당선은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다. 쉼 없는 노력으로 시조문학을 더욱 풍성히 하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는 문인으로 성장하기를 빈다. 

<심사위원 이우걸·이달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