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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 날아가다   
- 조은덕

 

 

바람이 날라다 준 햇살 한 줌 끌어안고

손가락 굵기만큼 동글 납작 눕히는 무

어머니, 물기 밴 시간 꼬들꼬들 말라 간다 



짓무를라, 떼어 내고 뒤집어서 옮겨 놓는

뒤틀린 세월들을 하나 둘씩 펼쳐본다

여름이 남기고 간 속살 광주리에 가득하다 



맵고 짠 눈물 섞어 켜켜이 눌러 담은

어둠 속에 숨 고르는 울혈의 무말랭이

주름진 생을 삭힌다, 아린 손끝 붉어온다 



돌아가는 모퉁이길 얼비치는 맑은 아침

마른 뼈 꽉 움켜 쥔 말간 핏줄 여울목에

어머니 가벼워진 몸, 꽃씨 되어 날아간다 

 

 

 

조은덕 
△1965년 충남 공주시 출생 
△숭실대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2006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 등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 
△한국식물화가협회 회원 



   기다림이 있으므로 시간은 더디게 갔고, 더딘 만큼 견뎌야 할 생의 길이는 늘어났습니다. 늘어난 생의 길이만큼 또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에 매달려 날마다 초조한 것보다 희망도 소원도 없는 게 훨씬 더 편할 거 같아요."라는 김수현 선생님의 '사랑과 야망'에서 '미자'의 대사를 내 것처럼 중얼거리고 다녔으나 늘 바라는 것들은 더욱 커지고,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어젯밤 꿈에 스마트폰으로 합격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꿈처럼 2013년 신춘문예 수상소감을 씁니다. 고맙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때때로 무너질 때 힘을 북돋아 주신 김봉집 선배님, 그리고 이 길을 가는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 없이 목 젖혀 바라보았던 하늘을 우러릅니다. 기쁨도 감당하기 힘들면 울음이 되는가봅니다. 세상 600개의 언어로도 통역되지 않는 눈물의 빛깔은 투명합니다. 그 투명함 속에 내 어머니가 있고, 평소 '조시인'이라고 불러 주시던 먼 유년의 아버지가 계시고, 가까이 있어서 소홀했던 내 가족이 있고, 너무 가까우므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을 이웃이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하므로 용서받고 용서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풋것들' 가운데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큰 절을 올립니다. 우리의 숨결, 우리의 정신이 녹아 있는 현대시조의 마당에 한 계절 밝히는 꽃을 피우겠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언어로 이 땅의 위로가 되겠습니다.



<심사평>

한분순,민병도 시조시인 

 근년 들어 신춘문예에 응모된 작품의 대체적인 경향은 표현주의적 색채로 쏠린다는 점일 것이다. 표현이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니 아직 원숙미가 부족한 신인들이라면 의당 여기에 치중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그쳐야 한다. 양념이나 조미료에 의존하는 한 재료 고유의 맛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으로 민승희의 「황소」, 유외순의 「인각사에서」, 조은덕의 「꽃씨, 날아가다」 등 세 편이 남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각사에서」는 역사적 소재가 지닌 창의성의 한계로 인해 순위에서 밀려나고 「황소」와 「꽃씨, 날아가다」를 두고는 장고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과 사유, 감각적인 시어 선택, 상상력의 깊이 등 두 사람 모두 오랜 시력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소」는 선짓국을 뜨면서 황소의 존재를 떠올리고 흡사하게 살다간 아버지의 삶을 읽어내는 상상력의 깊이가 돋보였으나 시선이 과거의 반추에 멈춰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그에 비해 「꽃씨, 날아가다」는 무말랭이를 만드는 체험과정에서 발견해 가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시조 특유의 양식적 긴장미와 맞물려 공감의 진폭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 또한 신뢰를 견인하였음을 밝혀두며 개성미가 넘치는 작품으로 시조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