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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야의 새벽 / 김재길


얼붙은 칠흑 새벽 빗발 선 별자리들

붉은 피 묻어나는 눈보라에 몸을 묻고

연착된 열차 기다리며 지평선에 잠든다.

황도(黃道)의 뼈를 따라 하늘길이 결빙된다

오로라 황록 꽃은 어디쯤에 피는 걸까

사람도 그 시간 속엔 낡아빠진 문명일 뿐.

난산하는 포유류들 사납게 울부짖고

새들의 언 날개가 분분히 부서진다

빙하가 두꺼워지다 찬 생살이 터질 때.

제 눈알 갉아먹으며 벌레가 눈을 뜬다

우주의 모서리를 바퀴로 굴리면서

한 줌의 빛을 들고서 연금술사가 찾아온다.

황천의 검은 장막 활짝 걷고 문 열어라

무저갱 깊은 바닥 쿵쿵쿵 쿵 울리면서

안맹이 번쩍 눈 뜨듯 부활하라 새벽이여.


*극야: 밤만 계속되는 시간을 말함. ‘백야’의 반대 현상

 

 

 

[시조 당선소감] "시조를 향한 도전… 최전방으로 날아온 당선의 기쁨"

극야의 새벽 같은 시간에 따뜻한 여명의 빛 한줄기가 강원도 최전방의 초병에게로 날아왔습니다. 20살의 어린 나이에 처음 시작해본 것은 경남대학교 청년작가아카데미에서 시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언가에 도전하려 하는 청춘의 자그마한 불꽃이었습니다. 모두가 저에게 랭보를 꿈꾸어야 할 청춘의 시간에 시가 아닌 시조를 쓴다고 의아해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늘 제 마음을 사로잡은 시조는 율(律)로서 완성된다고 굳게 믿고 제 발자국을 정법으로 삼아 또박또박 헤아리며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지독한 필사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묘사와 은유의 공간에서 늘 회초리로 저를 때리며 살아왔습니다. 여름과 겨울마다 하동 평사리에서 가진 지옥훈련 같았던 창작교실이 지금의 저를 키웠습니다. 지금껏 시인들의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가깝게만 느껴졌던 그 하늘이 이렇게 멀 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야흐로 운명의 폭발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이제 스스로 운문의 하늘을 밝히는 초신성이 되었습니다. 청년작가아카데미 교수님들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빛을 머금은 원석’이라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이제 그 꿈만 같던 빛을 손아귀에 쥐었습니다.

이제 스스로를 더욱 세공하여 늘 정상에서 환하게 빛나는 보석이 되겠습니다. 따뜻한 바다 통영에 계신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존경하는 김정대, 정일근 교수님과 청년작가아카데미에 이 영광을 모두 돌리겠습니다. 이름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조선일보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1991년 경남 통영 출생
▲경남대 국문과 3년 휴학.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1기 수료
▲현재 육군 7사단 일병으로 현역 복무 중

 

[시조 심사평] 거침없는 상상력과 활달한 호흡으로 시적 지평 넓혀 

‘약관’은 한때 신춘문예의 단골 수식어였다. 그 약관의 관을 얹어 한 시인을 내보낸다. 그의 이름은 김재길, 보무도 당당한 대한민국의 육군 일병이다. 스물을 갓 넘긴 청년의 야심 찬 걸음이 ‘쿵쿵쿵 쿵’ 지축을 울리는 듯하다.

응모작에는 충혈의 눈빛이 비치는 게 많았다. 끝까지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은 이윤훈·이병철·장윤정·하양수·송인영씨였다. 정형시로서의 미학적 완성도나 호흡의 안정감, 현실적 맥락을 잃지 않는 감각과 발상, 형식에 함몰되지 않는 신선한 긴장감 등에서 남다른 공력의 시간이 보였다.

반가운 것은 공소한 관념이나 낡은 서정이 아닌 오늘 이곳의 살아 있는 삶을 정형(定型) 안에 다듬어 앉히면서 자신의 목소리도 펼쳐낸다는 점이다. 시조에 대한 편견을 날려줄 작품이 늘고 있어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당선자는 그중에도 가장 헌걸찬 형상력과 보폭을 보여준다. ‘오로라’, ‘우주의 모서리’, ‘무저갱’까지 거침없이 오르내리는 상상력과 활달한 호흡으로 ‘새벽’의 시적 지평을 한층 넓히는 것이다. 낯설고 분방한 그래서 더 역동적인 비유와 이미지들은 정형의 율격을 시원하게 타 넘으며 보기 드문 대륙적 약동을 뿜는다. 이 모두 당선작을 기꺼이 들어 올리게 한 패기와 가능성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 비치는 기술의 과잉 같은 느낌은 주의를 요한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크고 새로운 세계를 ‘번쩍’ 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