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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점

 

 

해마다 봄빛 돌면 통과의례 치르듯
식구들 손 없는 날 그것도 짝수 날에
남몰래 저녁 어스름 불빛처럼 다녀간다

어머니는 무당을 나그네라 부른다
부엌에는 조왕신 애들 방엔 삼승 할망
달랠 신 또 하나 있네
능청스레 뜨는 달

“인정 걸라, 인정 걸라” 
요령소리 댓잎소리
내 사랑 고백 같은 심방사설 잦아들면
놋쇠 빛 산판에 걸린 식솔들 신년 운수

공기 놀듯 쌀 몇 방울 휙 뿌렸다 잡아챈다
홀수는 내던지고 짝수만 받아 삼킨다
입춘이 갓 지난 봄빛
씹지 않고 삼킨다

 

 


[당선 소감]

김영순

  
▲ 김영순씨(시조 부문 당선자)

‘너를 걸어라. 무모하라. 끝까지 가라.’


내 노트북을 열면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시작이 좀 늦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쁜 일상 속에서도 좋은 시들을 많이 읽고 필사하고, 열심히 하고자 나름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 나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다른 잡다한 계산은 미루고, 글을 쓸 만한 잠재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그냥 가보기로 했습니다. 무작정 시를 붙잡았습니다. 
막상 당선소식을 듣는 순간 창밖엔 하얀 눈이 축복처럼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농사도 눈이 많이 오면 그 이듬해에는 풍년이라는데,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이랑 이랑을 갈아엎어 많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단 몇 사람의 아픈 가슴이라도 위로해줄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내게 2012년은 유난히 힘든 해였습니다. 좋은 일들이 많았다면 이렇게 몰두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시조가 있어서, ‘정드리’가 있어서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쉼 없는 자극으로 나를 깨어있게 만든 회원들께 감사하고, 그래도 좋은 결과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힘든 생의 한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고 부쩍 자란 두 딸 은경, 은교, 그리고 아들 재환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전합니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봐준 남편과 어머니께도 감사드립니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강한 것’이라 했습니다. 미흡한 제 작품을 올려주신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시조’라는 마라톤의 출발선에 세워 주셨으니 끝까지 완주해볼 참입니다. 기필코 살아남겠습니다.

제주 의귀리 출생
2011 제주신인문학상 당선
정드리문학회 회원
현재 학원 운영
* 주소 : 제주시 용담2동 620-2 4층 
* 전화번호 : 
* 메일주소 : didimdol-1004@hanmail.net


 

[심사평]

정서의 미학적 성취와 해조(諧調)

 

인터넷신문 2013영주신춘문예, 올해 시조부문에는 총 436편이 응모했다. 대선을 앞두고 술렁이는 시기였음에도 우리 민족 문학을 지향하는 푸른 물결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해를 거듭할수록 응모작의 수준이 높아져서 우열을 가려 꼲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우선 선자들은 집중과 성찰, 새로운 호흡과 기지의 언어 쪽에 마음을 기울였음을 밝힌다. 21세기 현대시조의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북을 보는 것 같았던, 김수환의「개밥그릇」,김영순의「쌀점」, 김완수의「우도 기행」,이영신의「헌 책처럼 허난설헌을 읽다」,정옥선의「감또개」가 최종심에 올랐다.


「개밥그릇」은 시적 형상화와 긴장감이 돋보이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있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식상함이 흠이었다. 「우도 기행」과 「감또개」는 발상은 신선했으나 신인다운 패기가 약했고, 「헌 책처럼 허난설헌을 읽다」는 시공을 아우르는 품에 비해 군데군데 관념어와 장과 장의 연결이 미흡했다.


함께 보낸 작품들의 무게를 따져 읽으며 김영순의 「쌀점」을 당선작으로 민다.


「쌀점」은 제주의 샤머니즘에 닿아있는 정서를 미학적 성취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남몰래 저녁 어스름 불빛처럼 다녀’가는 나그네가 그 해의 운수를 점쳐주는 무당이다. 가족들이 손 없는 날을 택하여 ‘홀수는 내던지고 짝수만’ 취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람인(人)자를 이루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생각이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가짜 약으로도 치유를 경험한다는 것. 약보다는 마음이 중요하고 마음보다는 간절하고 굳은 믿음이 결국은 기적을 이뤄내듯, ‘입춘이 갓 지난 봄빛 씹지 않고’ 받아 삼킨 「쌀점」이 신년 운수뿐만 아니라 그의 문운까지 활짝 열어줄 것을 믿는다.


마침 심사당일 제주엔 그 귀하다는 눈이 펑펑 내려주었다. 마치 쌀점이라도 치듯 말이다. 2013년 점괘! 당선자는 물론 함께 거론된 네 분의 가슴에도 행운의 복주머니가 하나씩 들어앉을 거라는...


·심사위원(이승은. 문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