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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

유두진

 

안 돼, 제발 좀 내리라고. 시원하게 한번 빠져 봐!’

전날 뉴욕 다우지수가 100포인트 이상 하락했음에도 우리나라 코스피지수는 도무지 빠질 기미가 없다. 동시호가 때 보합을 오가더니, 장이 시작하자 이내 상승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왜 이리 지수의 힘이 좋은지 모르겠다. 다우가 내리면 코스피도 하락 출발하는 게 대부분인데 말이다.

폭락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일단은 마이너스지수로만 가자. 파란색 숫자를 보여줘!’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주가는 계속 빨간색이다. 상승폭이 크지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뒷목이 당긴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 ~”

심호흡을 한 뒤 다시 HTS 화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들려오는 옆방 여자의 통화 소리.

, Y영어학원이라고요? 맞다, 오늘이 개강일이죠. 깜빡했네요. 이따 갈게요.”

그녀의 목소릴 들으니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제 새벽일이 생각나서다.

그런데 영어학원이라니, 역시 일반 술집 여자와는 좀 다르다.

다시 HTS화면을 쳐다본다.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7.11···+8.23···+9.22···

이런 제기랄!”

나도 모르게 고성이 터져 나왔다. 옆방 여자가 통화를 멈춘다. 통화소리가 시끄럽다고 눈치 주는 줄 알았나 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곳 고시원의 방음수준은 테러블이다. 옆방 사람이 등을 긁을 때, 손톱으로 긁었는지 손등으로 문질렀는지 구분이 가능할 정도니까.

컴퓨터 모니터 옆에 틀어놓은 경제 TV에선 개인들의 강한 매수세가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책상서랍에서 커피믹스를 하나 꺼냈다. 부엌에서 커피나 한잔 마시고 와야겠다.

 

#

주가가 내려도 수익이 난다고 했다. 물론 주가가 올라도 수익을 낼 수 있다. 주식의 파생상품인 선물과 옵션은 포지션의 장난이다.

아주 쉽게 이해해보자. 현재의 설탕가격이 1kg1,000원이라고 가정한다. 이것이 몇 달 뒤, 2,000원으로 오를지 500원으로 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2,000원으로 오른다면 현재가격인 1,000원에 설탕을 사 놓는 것이 유리하고, 500원으로 내린다면 지금 가격에 설탕을 팔아버리는 게 유리하다.

선물과 옵션은 이 개념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오를 것이라 판단되면 (call)’포지션, 내릴 것이라 판단되면 (put)’포지션을 취하면 된다. 물론 기준이 되는 미래 변수는 설탕가격이 아닌 주가지수지만. 어찌 보면 홀짝놀음과도 비슷하다.

나는 지금 주가가 내려야이익이 발생하는 풋옵션을 쥐고 있다.

옵션은 정말 화끈하다. 현물 주식에서 나올 수 있는 하루 변동 폭은 기껏해야 위아래로 15%지만, 옵션은 하루 2~3배는 보통이고 변동성이 극대화되는 만기 때는 10~20배도 터진다. 20019.11 테러는 옵션거래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만기를 하루 앞두고 엽기적인 사건이 터지면서 1,000원짜리 풋 종목이 하룻밤사이 500배 오른 50만 원이 되었다. 주가가 대폭락한 탓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파생시장은 세계 1위의 거래량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올해 8월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유럽과 미국시장의 불안으로 주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1,700만 원을 풋에 투자한 초보자가 4일 만에 13억 원을 거머쥐기도 했으며, 20만 원을 베팅한 투자자가 4,000만 원을 챙겼다는 뉴스도 떴다.

이렇게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위험률 또한 엄청나다. 투자액이 반 토막, 아니 열 토막 나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리고 1달마다 돌아오는 만기 지수를 맞추지 못하면 모든 투자액이 한방에 날아간다. 옵션매도 포지션을 취했을 경우엔 전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

주식이 명절에 치는 고스톱 쯤 된다면, 옵션은 방아쇠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러시안 룰렛쯤 될 것이다. 무섭지만 짜릿하다. 여기에 옵션의 매력이 있다.

 

#

정수기의 온수버튼이 고장 났다. 냄비에 직접 물을 끓여야겠다. 그런데 이게 뭔가. 공용냄비엔 먹다 남은 라면찌꺼기가 들어 있다. 참 대책 없는 사람들이다.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알려졌다시피 고시원엔 고시생이 거의 없다. 빚에 쫒기는 도망자, 무작정 상경한 빈털터리, 막노동 하루살이, 전과자 등 하류인생들이 상당수다. 물론 거기에 나도 포함되지만 어찌됐건 기본적인 에티켓은 지켰으면 좋겠다.

투덜투덜 냄비설거지를 마친 뒤 물을 올렸다. 그때, ‘끼이익~’ 부엌문이 열리며 옆방 여자가 들어왔다.

마주치기가 어색했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아침을 먹으려나 보다. 여자는 검은 봉투에서 인스턴트 쇠고기 죽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그렇게 여자는 전자레인지 옆에서, 나는 가스레인지 옆에서 각자의 내용물이 데워지길 기다린다. 물이나 죽, 어느 거라도 빨리 열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어색한 상황이 해소될 수 있을 테니.

어제, 신림동에서 학원 동기들을 만났다. 당구 치면서 자장면 내기 하느라 만남이 길어졌다. 새벽녘에 돌아와 계단을 오르는데, 옆방 여자가 보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2달 전 고시원에 왔다. 말을 나눈 적은 없었지만 처음부터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술집종업원 답지 않은 이지적인 눈빛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기 힘겨워 보였다. 나는 괜찮으시냐고 말을 붙이며 여자의 팔을 잡았다. 그녀도 별 거부감 없이 나에게 기대왔다. 그렇게 서너 계단 쯤 올라섰을까, 여자의 몸이 비틀대며 우린 더욱 밀착되었다. 두근거림으로 피로가 가시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3층에 다다랐을 무렵, 작은 사고가 났다. 내가 발을 헛디뎌 그녀를 붙잡고 비틀거리게 된 것이다. 중심을 잃은 내가 방향을 잡으려 무언가를 움켜쥐었는데 여자의 가슴이었다. 정말 고의가 아닌 사고였다.

!”

눈이 번쩍하며 볼에 얼얼함이 몰려왔다.

, 정말! 남자새끼들은 생각하는 게 왜 다들 하나뿐이니! 너도 꼴에 남자라 이거니, 그래 만져라, 줄게. 근데 나 비싼 거 알지!”

여자의 앙칼진 쇳소리가 터졌다. 치근덕대는 손님들한테 스트레스가 많았었던 것 같다. 당황한 나는, 상황을 설명하려 했으나 여자의 기세에 말문이 열리질 않았다. 자칫 목소리가 더 커진다면 다른 원생들도 깰 것이고, 총무도 뛰어올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불리했다. 나는 여자를 뒤로 한 채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

죽이 다 데워졌다는 전자레인지의 신호음이 울렸다. 다행이다. 이제 곧 어색한 상황은 모면하겠다. 여자가 전자레인지 쪽으로 손을 뻗쳤다. 그때,

일회용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여자가 전자레인지 손잡이를 잡는 와중 그녀의 반바지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다.

여자가 몸을 숙인다. 블라우스가 들리며 여자의 하얀 허리가 드러난다. 옆구리엔 군살하나 없다. 숟가락을 집은 뒤 다시 허리를 펴는 여자의 뒷모습을 주시해 본다. 굴곡진 골반라인, 갈기로 흩어 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되묶은 모습···.

기분이 묘하다. 어제 호되게 뿌리침을 당해서인지 여자의 몸이 육감적으로 다가온다. 여태껏 호감은 있었으나 섹슈얼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뿌리침에 대한 역 반응적 정복욕구 때문일까.

내 물도 끓는다. 커피믹스 위로 물이 더해지니 진한 향이 퍼진다. 내 앞을 지나쳐 나가는 여자의 몸 냄새와 합쳐지며 잠시 나를 몽롱하게 한다.

부엌문이 닫히며 정신은 곧 돌아왔다.

 

#

그동안 주가는 어떻게 변했을까. 마우스를 움직이니 모니터가 화면보호기 상태에서 벗어났다.

‘KOSPI 1846.47 12.35’

염병할, 더 올랐다. 경제TV에선 외국인까지 매수세로 돌아섰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1주일간 주가가 많이 빠져서 반발매수세가 들어오는 거라 했다. 그럼 내 풋옵션 종목의 프리미엄은 얼마일까.

‘0.05’

개당 5천원이다. 어제 매입단가가 0.10으로 개당 1만원이었으니 정확히 반 토막이 났다. 그렇다면 내 투자금도 500만원에서 250만원으로 줄어들었단 얘기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애초에 내가 마련한 옵션투자금은 1,000만원이었다. 500만원은 지난 달 날렸고, 지금의 500만원은 마지막 기회자금이다.

내가 풋에 베팅한건 이유가 있었다. 주가가 바닥을 쳤으니 상승모드로 전환할 거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번진 유럽재정위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고 중국도 긴축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투자자들이 한국증시에 추가로 돈을 투입하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때마침 어제 다우지수도 적절히 빠져주었다. 그런데 오늘 장은 계속 상승이다. 역시 그동안의 하락이 과도했던 것일까.

주가는 +10포인트 내외에서 오르내리길 반복한다. 프리미엄도 들쑥날쑥 한다.

0.05··· 0.06 ··· 0.05··· 0.04···0.05···0.06

한 틱 움직일 때 마다 50만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현기증이 난다. 그냥 환매를 하고 현재잔액 250만원으로 다시 기회를 노릴까 하는 갈등도 생긴다. 이번 투자금을 잃게 되면 나는 정말 끝장이다.

하지만 환매하지 않으리라.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풋에서 일단락을 지어보리라.

이대로 옵션시세만 들여다보는 건 에너지낭비다. 일정정도 시세가 날 때까지 그냥 둬야겠다. 바람이나 좀 쐬고 와야겠다.

 

#

여기 야채호떡도 한번 드셔봐. 가격은 같아. 600원이야.”

고시원 샛길에서 영업 중인 호떡집. 야채호떡이라지만 잡채호떡이란 말이 더 맞을 듯하다. 이곳은 가격이 싸다. 시내에선 한 개당 800, 900원씩 하는 호떡집도 많다. 꿀 호떡 5개를 이미 먹어치웠는데, 야채호떡은 몇 개나 더 먹을 수 있을까. 추가로 주문하니 아줌마 얼굴이 싱글벙글 이다.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저 아래로 100미터만 더 내려가면 중학교 인근이고 번화가인데, 왜 한적한 이곳에서 장사를 할까.

에이그, 모르는 소리 말아. 그 곳 텃새가 만만치 않아. 시시때때로 학교 선생들이 와서 불량식품 팔지 말라고 훈계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사람이 좀 뜸하더라도 여기서 장사하는 게 속 편해.”

그나저나 부지런한 아주머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호떡을 굽는다. 쉬는 날도 없다. 도대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장사하는 걸까.

, 그거야 대중없지. 학생들 등교시간 맞춰서 720분 정도부터는 시작을 하는 편이야. 아침 못 먹은 애들이 여기서 사 먹거든. 지금은 한가한 시간이야. 이따 아이들 하교시간 되면 또 바빠져. 회사원들 퇴근 무렵에도 바쁘지. 밤늦게도 손님은 있어. 귀가가 늦은 아빠들이 아이들 주려고 사 가거나, 야참용으로 찾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야.”

대단하다. 대략 계산해도 아주머닌 하루에 14시간 가까이 일한다. 집에서 밀가루 반죽하고 기계 손질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잠자는 시간 외엔 일만 한다는 얘기다.

호떡 한 개 팔아서 남는 돈 몇 백원, 그게 쌓여서 몇 천원, 몇 만원··· 그리고 그것들이 쌓여서 집이 되고 꿈이 된다. 땀 흘린 노동의 대가다. 난 잠시 숙연해진다. 주식 파생시장에서 돈질 한번으로 대박을 바라는 나, 이런 분들이 생각하기에 나 같은 부류가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야채호떡이 꽤 입에 당긴다. 두 개를 더 주문했다. 아주머니는 새로 반죽을 치댄다.

그런데 반죽을 만지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무릎을 두드린다.

에구구구···.”

왜 그러세요?”

무릎이 아파서지 뭐. 안 좋아진지 꽤 됐는데 여기 포장마차에서 종일 서서 호떡일 하니까 더 나빠졌지. 치료비도 만만치 않아.”

의문이다. 저렇게 부지런한 아주머니가 노년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아주머니의 성격상 젊은 시절에도 게으름을 피웠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노년은 편해야 하지 않나. 도대체 왜?

맞아. 젊은 시절부터 일을 놓은 적은 없었지. 시골서 올라와서 식모일 하다 공단에 취업했어. 그곳에서 남편도 만났지. 우리는 열심히 살았어. 남편은 공장책임자로 승진도 했다고. 그런데 공장에 화재가 나면서 모든 게 변해버렸지. 화재 당시 비번이었는데도 회사 간부들은 남편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어. 감방살이 하고 나온 남편은 다른 곳에 취직도 못하고 거의 폐인처럼 돼 버렸어. 그나마 내가 번 돈으로 집안을 꾸려가긴 했는데, 남편이 폐암에 걸리는 바람에 나중엔 감당이 안 되더군. 평소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더니, 죗값 받은 거지 뭐. 남편은 3년 전 죽었어. 그이 죽은 거야 슬펐지만 뭉텅이 돈 들어갈 곳 없어지니 숨통은 트이더군. 애들도 다 컸으니 본격적으로 돈 벌어 말년은 좀 즐겨야지 생각했어. 나야 일하는 거 두려워하는 체질이 아니니 돈은 금방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그런데 얼마안가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더군. 무릎이 고장 나 진통제 없인 견디지 못하게 된 데다, 녹내장까지 왔어. 눈이 침침해서 매일매일 비싼 안약을 넣지 않으면 잘 보이지가 않아. 꾸준히 치료받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다고 하더군. 그러니 인생 즐기기는커녕 돈 벌어 약값 대기도 벅차지. 애들이라도 잘 됐으면 좋으련만, 청년 취업난으로 방구석만 기고 있지.”

말을 마친 아주머니는 도로 위에 정차한 버스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눈빛에는 허탈함이 가득해 보였다.

 

#

다시 고시원 계단을 오른다. 출입문을 여니 퀴퀴한 냄새가 밀려든다. 현관문 앞에 중구난방 놓인 신발들 탓이다. 정리 좀 하지. 총무 그 인간, 게으른 건 알아줘야 한다. 복도에 들어서니 40대 아저씨가 상반신을 탈의한 채 배꼽아래를 벅벅 긁고 있다. 이곳 고시원은 남녀 층 구분이 없는 곳이다. 이런 경우, 가릴 것 가리며 생활해야 함에도 아저씨들의 상반신 누드(?)는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위의 시계를 보니 12시다. 1시간 정도 자리를 비웠다. 초마다 시세가 변하는 옵션거래장에서 장시간 자리를 비우다니, 나도 제 정신은 아니다. 증권사의 옵션트레이더들은 거래시간 중 점심도 못 먹고 화장실조차 못 간다. 그만큼 살 떨리는 시장이다. 하지만 남들이 그런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필요야 있나. 한 방향을 정하고 시세가 올 때 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이건 나만의 기법(?)이다.

그동안 시세는 어떻게 변했을까나.

‘KOSPI 1819.01 15.11’

, 이게 웬일인가. 외출했던 시간 동안 25포인트 이상 주가가 빠졌다. 급히 경제TV를 틀었다. FOMC의장이 EU의장과 만난 자리에서, 유럽 구제를 위한 추가자금조성에 난색을 표했단다. 이건 오후에 열릴 유럽 주식시장을 폭락시킬 소재였다. 아시아시장은 이를 선반영 하고 있었다. 안 좋은 소식이지만, 나에게는 희소식이다. 내 풋의 프리미엄은 어떻게 변했을까.

‘0.13’

우후, 13천원이다. 오전에 5천원 이하로 떨어졌던 프리미엄이 2배 이상 뛰어 올랐다. 마음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가다듬는 그 순간에도 옵션시세는 계속 변한다.

‘0.13···0.12···0.13···0.14···’

짜릿하다. 오줌이 마려울 듯 사타구니 쪽이 움찔하다. 아까 보았던 옆방 여자의 하얀 허리라인이 떠오른다. 단전 아래로 피가 몰리며 남근이 후끈 힘을 받는다.

‘0.13···0.14···0.15···0.16···0.17···’

내 풋옵션의 시세가 18천원에 이르렀다. 이대로 간다면 3만원까지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자면 추가로 15포인트 이상 빠져야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 과하다. 아까 5천원에서 여기까지 와 준 건만 해도 어디인가.

0.18500개 전량 매도주문을 냈다. ‘매도주문이 체결 되었습니다라는 안내음성과 함께 900만원의 잔고가 확인됐다. 아침에 250만원까지 떨어졌던 투자액이 2시간 여 만에 3배 이상 불어났다.

나른한 기분이 들면서 머리가 몽롱하다. 이럴 땐 니코틴이 최고. 담배를 들고 복도로 향했다.

 

#

옵션과 같은 주식파생상품은 위험의 헤지(hedge) 및 유동성 확보라는 긍정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손실을 단번에 만회하고픈 사람들이, 파생상품의 투기적 효과에만 집중하면서 본래의 뜻이 변질되고 말았다.

옵션은 흔히 메이저로 통칭되는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의 놀음판이다. 나와 같은 개미들이 섣불리 덤볐다간 뼈도 못 추린다. 선물옵션은 제로섬(Zero Sum)게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100원을 벌면, 누군가는 반드시 100원을 잃는 구조다. 그러니 일반 개미가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을 겸비한 메이저에게 대드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나의 형은 작가주의를 지향하던 영화 학도였다. 졸업 후 조감독으로 뺑뺑이를 돌면서도 순수한 작가가 되겠다며 침을 튀겼다. 상업화된 영화판에 정신을 불어넣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형이, 어느 날 흥행감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충무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거물이 되고 싶다고 했다. 돈도 벌고 싶다고 했다. 샌님이던 형이 왜 그렇게 변했을까. 자신에게 메가폰을 양보하지 않는 얄미운 선배 감독들 때문에 그랬을까, 코흘리개 후배들이 작품 하나 터지고 유명배우입네 힘주고 다니는 게 아니꼬워서 그랬을까. 아무튼 형은 달라져 있었다.

화제를 모았던 인터넷소설의 판권을 샀다고 했다. 각색한 대본도 생각보다 잘 빠졌다고 했다. 스태프 구성도 무리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A급 주연배우를 섭외하는데 실패하면서, 투자자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크랭크인 시기를 미뤘어야 했지만 형은 미련을 부렸다. 유명배우가 없어도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력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했다. 형이 열의를 보인 탓인지 영화제작은 시작되었다. 17억 원의 투자도 이끌어 냈다. 처음 목표액이던 40억 원엔 한참 모자랐지만 일을 진행했다. 크랭크업 후에도 홍보비와 스태프 일당 때문에 추가자금 5억 원이 필요했다. 결국 형은 개인적으로 2억 원의 빚을 냈고 아버지의 목돈 3억 원에도 손을 댔다.

그렇게 형의 첫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블록버스터 급은 아니었지만 꽤 정성스레 만든 영화였다. 손익분기점을 넘으려면 전국관객 80만을 넘겨야 하는 또 다른 고비가 있었지만 아버진 별 걱정 안 하셨다고 한다. TV에서 하도 8백만이니, 천만이니 떠들어대니, 영화가 개봉하면 기본적으로 몇 백만 명씩 드는 줄 아셨던 것 같다.

막상 개봉을 하고보니 80만은커녕 3만 관객도 채우지 못했다. 형의 야심작은 단 6일 만에 극장에서 간판이 떨어졌다. 이후 형은 잠적했다.

 

#

복도에서 담배를 피운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시세를 살핀다. 한때 20포인트 이상 떨어졌던 주가는 다시 약간 힘을 받아 -13포인트에서 -14포인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아까 18천 원에 팔았던 내 풋옵션 시세를 살펴보니 13천 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아까 팔기를 잘했다.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매수타이밍을 기다린다.

?, ?’

외국인들이 지속적으로 매도를 감행한다면 주가는 추가로 떨어질 것이고, 그때 풋의 프리미엄은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오전 장의 상승세를 비추어 생각하면 너무 급작스럽게 주가가 떨어진 측면도 있다. 이에 따른 반발매수세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콜인 듯하다. 시세판을 살펴보았다. ‘콜옵션 250’의 움직임이 좋아 보였다. 나는 프리미엄 0.25200개를 매수하겠다는 주문을 입력했다.

이후 3분쯤 지나니 매수가 체결 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제 나는 콜맨으로 변신했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주가가 오르기만 바라야 한다.

똑똑

누굴까, 이 시간에.

저기요···”

옆방 여자의 목소리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나저나 웬일이지? 엉거주춤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에센스화장품 향이 후끈 풍기며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도움 주시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거 같아요.”

예상 못한 사과를 받으니 되레 뻘쭘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몸을 비비꼬았다. 그러다 겨우 한 마디 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펴본다. 또렷한 얼굴선, 하얀 목 라인, 여전히 이지적인 눈매.

잠깐의 침묵이 어색해질 때 즈음, 여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비스킷인데요. 좀 드셔보세요.”

커피에 찍어먹어야 제 맛인 비스킷이다. 커피나 한잔 하자는 의미일까. 잠시 들어오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비좁은 쪽방에서 무슨 궁색인가. 그렇다면 부엌에서 한잔? 그러기엔 옵션시세를 봐야 해서 어정쩡하다. 뭔가 상황이 녹록치 않다.

저기, 바쁘신 것 같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사람상대를 많이 해서인지, 눈치가 빠른 여자다.

, 아니..전 괘...괜찮...”

내 떠듬거리는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방문을 닫았다.

일단 이 정도라도 좋다. 주식시장이 끝나면 차 한 잔 하자고 해야겠다. 비스킷을 곁들이면 더 좋을 것이다.

다시 시세화면에 눈을 돌린다. 내 예상이 맞았다. 주가는 점차 하락폭을 줄여가고 있었다. 급작스런 하락에 따른 반발매수세가 유입되는 중이었다.

-8.88···-5.90···-3.14···

주가는 계속 상승한다. 지수 숫자가 빨간색으로 변한다.

+1.02···+2.73···+3.24···

환상적이다. 그럼 0.25에 구입한 내 콜옵션250종목의 프리미엄은 얼마로 변했을까.

0.44···0.45···0.46···

좋다. 조금만 더 오르면 된다.

주가가 +8포인트 이상으로 상승한다. 내 콜의 프리미엄엔 더욱 살이 붙는다.

0.58···0.62···0.65···0.67··· 더블 포인트를 넘어 3배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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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사법시험에 목을 맸던 건 아니었다. 내가 진학한 곳은 지방대 법대여서 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나름 공부를 잘했던 터라, 지방대로 미끄러진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딱히 학교에 애정도 없었고, 마음 둘 곳도 없었다. 남들보다 일찍 시험을 준비한 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졸업을 앞두고 1차에 합격하며 가능성을 보았다.

졸업 후, 신림동 고시촌으로 거처를 옮겨 시험과 사투를 벌였다. 이후 내리 5번 미역국을 마셨다. 그렇게 서른 살을 넘기면서 사시를 때려치워야 하나 계속해야 하나 갈림길에 섰다. 그 무렵, 형이 잠적했단 소식을 들었다. 이제 집안의 희망은 너 뿐이라는 아버지의 울먹거림으로 인해 나는 다시 법전을 잡았다.

이후 2년을 더 시험에 매달렸다. 도전 마지막 해의 합격자 발표는 정말 잊혀 지지가 않는다. 1차 시험을 고시학원 동기들 중 거의 톱으로 패스한 나는, 2차 시험 또한 예상했던 문제들이 출제된 데에 흥분했다. 시험을 마친 후 교수들이 작성한 모범답안을 보니 내 것과 상당부분 유사했다.

합격자 발표일 날 명단에서 내 이름 차승민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터질 뻔 했다. 감격의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다시금 이름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합격자번호가 내 것과 달랐다. 이름을 다시 확인한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명단의 이름은 차승민이 아닌 차승인이었던 것.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관악산을 뛰어다녔다.

몸의 수분이 눈물로 다 빠져나갔을 때쯤 한 번 더!”를 외쳤다. 고시촌에 있어본 사람들은 다들 동감할 것이다. 고시는 마약 이상으로 중독성이 강하다. 한방에 신분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동안 쏟아 부은 노력과 시간이 아깝다는 미련 때문에라도 포기가 안 된다.

나 또한 내 의지만으로는 고시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시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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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포인트에서 눌림목을 형성한 주가는 잠깐 마이너스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3포인트 내외에서 박스권 움직임을 보인다. 한때 69천원까지 올랐던 내 콜옵션 프리미엄은 54천원에서 57천원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일단 수익은 더블을 넘었다. 더 끌고 갈 것인가 여기서 청산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아무래도 현금을 보유하는 게 현명할 듯싶다.

나는 서둘러 매도 주문을 넣었다. 체결매도가 55천원.

500만원이었던 투자액이 1,100만원이 되었다. 아까 꼬불쳐 둔 400만원을 합치니, 총액은 1,500만원으로 불어났다. 변동성이 큰 만기였다면 훨씬 많은 수익이 났을 것이다.

배가 고프다. 오늘 먹은 거라곤 호떡 몇 개가 전부다. 돈도 벌었겠다, 좋은 것 좀 사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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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잔치국수 하나요.”

나도 태생이 하층민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수익률도 높은 날인데 기껏 찾는다는 곳이 동네 분식집이요, 주문한다는 게 국수다. 이래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이 나왔을 거다.

주문한지 3분 만에 국수가 나왔다. 입김으로 국물의 김을 날리며 면발을 젓다보니 시골국수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옵션투자자들에게 전설로 통하는 그. 재야고수로 이름을 날리며 파생투자의 귀재로 불리던 사람. “파생시장은 절대 고수도 영원한 하수도 만들지 않으며, 패배한 승부사는 목숨을 내놓아야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뒤, 14억 원의 빚을 끌어안고 목을 맸다. 2007년 봄의 일이다.

자기 분수에 맞게, 서민은 서민의 방식대로.’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직장과 집만 오갔던 분이다. 인생 대부분을 석재회사에서 자재를 나르며 보내신 분, 아침 출근시간과 저녁 퇴근 시간이 늘 일정하셨던 분.

월급모아 조금씩 사 놓은 용인지구의 땅이 군사보호지역에서 풀리며 노후가 피실 줄 알았다. 하지만 정부에서 강제수용 정책을 펴며 공시지가 보상만으로 땅을 가져가 버렸다. 아버지는 그나마 라도 가치를 인정받아 다행 아니냐며 너털웃음 지으셨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시가보상 해달라며 시청, 구청 찾아다니며 땡깡도 많이 부렸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미리 정보를 꿰 찬 관료들은 보호지구 땅을 차명 구입해 몇 배의 차익을 챙긴 뒤였다.

보상금을 형이 날려버린 지 2년쯤 되던 어떤 날, 아버지는 야구시청 도중 눈을 뒤집으며 쓰러지셨다. 쇼크 외에 회사생활로 누적된 피로와 당뇨로 인한 저혈당도 겹쳤다. 회사 재직 중 쓰러지셨다면 산재처리라도 받았으련만, 퇴직 후라 그 또한 용이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중풍까지 겹쳤다. 몸은 잘 가누지도 못한 채 하루 종일 물만 찾았다. 당뇨환자는 물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신다. 그러니 소변 횟수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 중풍 탓에 요강에 제대로 소변조차 보지 못하고 바닥에 흘리시던 아버지. 방에 흘러넘친 소변은 바로 닦아내지 않으면 설탕물을 발라놓은 듯 끈적거렸다. 소변에 당이 심하게 섞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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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먹은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주가지수를 살폈다. 주가는 여전히 +3포인트 내외에서 횡보 중이었다. 현재 시각 오후 2. 마감까지 1시간 남았다. +3포인트가 변곡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상, 여기서 위든 아래든 크게 방향이 날 듯 했다.

내릴 것 같았다. 주가가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눌림목을 형성하는걸 보니 곧 풋장이 올 듯 했다. 나는 현재 보유액 1,500만원 중 1,000만원을 베팅금액으로 재설정했다.

이제 진짜 승부다.’

1,000만원이었다. 제대로 방향성이 터진다면, 빚도 갚고 이 지긋지긋한 고시원에서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에 대한 꿈과 희망도 다시 그려보리라.

심호흡을 한 뒤 풋옵션에 매수주문을 넣었고, 곧 체결되었다.

+3.88···+2.00···+0.89···-1.23

풋을 구입한지 얼마 안 돼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수익이 날 듯 보였다. 나는 모니터를 껐다. 베팅이 크면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일정 시세가 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30분 있다 다시 켜보면 시세가 나올 것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건 나만의 방식이다.

시간을 보내는 데엔 담배 피우며 먼 산 바라보는 것 만한 게 없다.

방을 나와 복도로 향했다. 복도 공용재떨이 앞에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옆방 여자. 그녀도 담배를 물고 있었다. 오호라 잘 됐다. 불을 빌리며 자연스레 아까 받은 비스킷 얘기도 하고 커피도 나눠 마시면 되겠다.

혼자 계시네요, 라이터 좀 빌릴까요?”

“..........”

여자는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괜히 머쓱하다. 여자가 얼굴을 예민하게 찡그린다. 뭔가를 생각 중이었는데 나 때문에 방해가 됐다는 듯. 웃으며 불을 빌려 줄줄 알았는데 민망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나를 노려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른 뒤, 그녀가 라이터를 꺼냈다.

칙칙

라이터 부싯돌에 문제가 있는지 점화가 잘 안 된다. 여자는 담배를 입가로 돌려 물며 에이, 라고 투덜거렸다. 왜 갑자기 쌀쌀맞아 졌을까. ‘비스킷 고마웠어요. 우리 함께 커피나 마실 까요라고 준비했던 문장이 쏙 들어갔다.

겨우 불을 빌린 후,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는데 입이 쓰다. 뒤돌아 현관 쪽으로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쌀쌀맞다. 도대체 왜 저럴까. 하여간 여자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치 옵션처럼.

나는 담배를 필터부근까지 알뜰하게 피웠다. 좀처럼 알싸한 니코틴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낸 뒤 꽁초에 살아 있는 불씨로 불을 붙인다. 텁텁하면서도 느끼한 맛이 입안을 감싼다.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역한 담배 맛, 그 맛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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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우린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렇게 정애는 이별을 통보했다. 4년을 넘게 사귀었는데, 단 한번 싸워본 적도 없는데, 우리가 맞지 않는 사이였다니.

정애는 고시생 시절, 소개로 만났다. 고시생이 뭔 소개팅이냐 할지 모르겠다. 고시생도 사람이다. 당구치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DVD방 가고, 할 건 다한다.

보육교사였던 정애는 내가 시험에서 떨어져 낙심할 때 마다 위로를 주었고, 공부에 지쳐 우울해 할 때마다 웃음을 주었던 여자다. 갑작스런 이별통보를 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애는 그런 여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법시험을 포기해서, 우리 아버지가 반신불수가 되어서 날 떠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애와 헤어진 몇 달 후, 길가에서 정애의 절친 현숙씨와 마주쳤다.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애와 나 사이에 새 생명이 왔었다는 사실을. 그 불씨를 정애가 나 몰래 꺼버렸다는 것도···. 현숙씨를 보내고 난 뒤 버스정류장에 앉아 피우던 담배 맛이 꼭 이랬다. 텁텁하면서도 느끼했다.

감상에만 젖어 있을 순 없었다. 닥치는 대로 벌어서 집안 살림을 꾸리고 아버질 간호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 기술도 없는 늙다리 사회초년병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고시서적 전문출판사였다. 내가 단골로 방문하던 서점의 직속출판사였는데 새로 개편된 법전의 교정 작업을 하는데, 당신 같은 장수생출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마웠다. 박봉이니 뭐니 따질 겨를도 없었다. 회사생활을 해야 했기에 아버지는 요양원으로 모셨다.

내가 일하던 N출판사는 고시서적 분야에선 나름 탄탄한 곳이었다. 고시산업이야 대한민국에서 망할 염려 없는 분야 중 하나였기에 그 탄탄함은 계속 유지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사장이 욕심을 부리면서 내 예상은 빗나갔다. 고시서적 외에 일반서적에까지 손을 댄 건 좋았다. 대형 이벤트 사업에까지 욕심을 부리다 화를 불렀다. 모 인터넷쇼핑몰과 함께 추진하던 이벤트 사업은 회사 간 송사로 발전하고 말았다. 일반서적부에서 발간한 소설과 실용서 들도 줄줄이 죽을 쒔다. 본업인 고시서적을 등한시 한 사이, 군소 고시출판사들이 야금야금 시장을 잠식해 왔다. 결국 우리 회사는 사업 확장 12개월 만에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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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일인가. 주가가 잠시 내리는가 싶더니, 강하게 치고 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풋옵션에 베팅한 얼마 뒤, 연기금의 강한 매수세가 유입됐다는 소식이 떴다.

이런 젠장!”

이마에 땀이 찬다. 우선 환매를 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이놈의 손절매라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옵션은 현물거래처럼 쉽게 손절매가 안 된다. 변동성과 한방심리 때문이다.

주가는 계속 힘을 받았다.

+2.56···+5.24···+6.28···+8.06···

콜옵션을 잡을 걸이란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장 마감이 가까워져서인지 옵션 프리미엄은 굴곡이 심화됐고, 내가 보유한 풋옵션의 가치도 급격히 떨어졌다.

겨우 손절매 하긴 했지만, 620만원의 손해가 났다.

투자금 1천만 원 중 60% 이상이 순식간에 날아간 것이다. 갑자기 쌀쌀맞게 나에게 불을 붙여주던 옆방여자의 얼굴이 스쳐갔다.

아까 남겨둔 돈 500만원에 현재 잔액 380만원을 합치니 총 880만원이 되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어제의 처음 투자금 500만원보다 380만원 늘어났고, 오전 250만원일 때 보다 3배 이상 늘어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사라진 620만원에 대한 미련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 돈이면, 카드이자를 한 번에 끌 수 있는 돈인데, 고시원에서 벗어나 상큼한 원룸도 가능했을지 모르는데···.’

이래서 난 아직 하수다. 남겨진 돈에 감사하기보단 날린 수익금이 아까워 죽겠다. 더 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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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을 알게 된 건, 은행 대기실에 꽂힌 금융파생상품 서적을 읽고서였다. 옵션의 변화무쌍한 변동성을 알게 된 뒤,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내가 찾던 승부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이 정상은 아니다. ‘원수가 있다면 그에게 옵션을 알려줘라. 그것이 가장 큰 복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옵션은 위험하다.

하지만 내게 있어 옵션은 다른 의미였다.

출판사가 망해서 실업자가 됐을 때의 심정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젊으니 무슨 일이건 다시 할 수는 있었다. 내 막막함의 실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삶 때문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는데 당뇨로 쓰러진 아버지, 도망간 형, 그리고 고시공부와 아버지치료비로 빚진 돈 4천만 원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재주도 변변치 않은 30대 중반의 남자가 생빚 4천만 원에 아버지 치료비까지 감당한다는 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아득바득 일한다면야 몇 년 뒤 빚 정리는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나이는 40대에 접어들 것이고 재산 상태는 ‘0으로 올라서는(?) 것 뿐. 다시 말해 빚쟁이에서 빈털터리로 레벨 업 되는 수준일 뿐이다. 결혼은 꿈도 못 꾸고, 그때까지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리란 보장도 없었다.

대체 내 인생은 뭔가, 내 젊음의 끝자락은 뭐가 되는가.

이미 실패한 고시 외에 나는 또 다른 승부수가 필요했다.

주식파생이론을 접한 뒤, 그날로 옵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론 정리가 끝나자 모의투자를 시작했고, 투자관이 정립되자 월세 보증금 1천만 원을 뺐다. 거처는 고시원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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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는 마감 무렵 더욱 힘을 냈다. 종가는 20포인트 이상 상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낮에 유럽발악재로 잠시 빠졌던 주식물량들도 한꺼번에 만회되었다. 아까 380만원이라도 챙겨두길 잘했다. 계속 풋옵션을 보유했다면 200만 원 이하로 가치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금 시각은 오후 3, 현물 주식시장은 마감되었다. 하지만 옵션거래는 오후 315분까지다. 305분에 동시호가가 시작돼 10분간 거래가 지속된다.

오버나이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베팅금액은 500만원으로 설정했다. 오버나이트는 위험한 투자지만 큰 수익을 위해선 감수해야 한다.

동시호가 마감시간이 다가온다.

콜일까, 풋일까.

쉽게 생각해 보자. 오늘 주식시장이 상승 마감하긴 했지만, 오버슈팅의 느낌이 풍긴다. 이러면 내일은 수급조절을 위해 주가가 하락할 확률이 높다. 그래 풋옵션이다.

나는 풋옵션 227.5’ 종목에 500만원을 베팅했다. 그리고 얼마 후 들리는 효과음,

매수주문이 체결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오늘의 거래는 끝났다. 내일 또 다시 피 말리는 승부가 이어지겠지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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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아마 나쁜 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갈 길은 이것이라 믿는다.

죽이 되건 밥이 되던 한번 맞서보리라. 작은 그림만 그리며 몸을 사리면 평생 요 모양 요 꼴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실패하면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죽도록 아플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으리.

갑자기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러 룸 밖으로 나섰다. 동시에 덜컥옆방 문이 열리며 여자도 나왔다. 기초화장을 하고 외투를 챙겨 입은 걸로 봐선, 외출을 하려는 것 같다. 술집으로 출근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아침에 통화한 영어학원엘 가려나 보다.

종종걸음으로 고시원을 빠져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해 본다.

내일은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당선소감>

현란한 옵션만큼 변화무쌍한 삶 그려

 

스포츠머리로 이발을 한 날이었습니다. 짧아진 헤어스타일은 마음에 들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어찌나 바람이 스며들던지 걷기가 힘들더군요. 동네에 다다르자 뜨거운 꼬치어묵이 생각났습니다. 살을 빼겠다던 사흘 전의 다짐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하지만, 포장마차 리어카엔 사정상 휴업 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허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니 급격히 허기가 지더군요. 신발을 벗자마자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습니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고민에 빠졌습니다. 손쉽게 할 수 있는 요리는 라면이었지만, 그 정도론 꼬치어묵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습니다. 된장, 호박, 양파, 조개, 고추 등이 보였습니다. 그래, 된장찌개다! 저는 서둘러 재료들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된장찌개의 팥소(앙꼬)랄 수 있는 두부가 없더군요. 고민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이 추위에 나가서 두부를 사올지, 두부 빼고 찌개를 끓일지, 그냥 라면이나 먹고 말지.

그때였습니다. 냉장고 위에 놓아둔 스마트폰이 울렸습니다. 벨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당선이라는 단어가 들려왔습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끓이던 물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더 이상은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배가 터질 듯 했거든요.

당선작을 처음 구상한 건 2년 전 쯤입니다. 현란한 옵션의 변동성과, 그것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우리 인간들의 삶. 이 두 재료를 버무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후의 집필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쓰고, 지우고, 고치고, 날리고, 그러다 화가 나 휴지통에 버리고, ‘아차싶어 다시 복원하고···.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면서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뛰어난 문청들과 경쟁하려니 주눅이 들기도 했고요.

어쩌다보니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대상이라는 벅찬 선물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90도로 인사 올립니다.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뒤늦게 창작병(?)에 걸려 허우적대는 저를 묵묵히 지켜봐준 가족들 사랑하는 아버지, 호진, 누나, 매형, 진우···. 다들 고맙습니다. 특히, “그 나이 먹도록 왜 장가갈 생각을 안 하느냐며 추석 날 눈물을 보이신 어머니께 이 상을 바칩니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제 불효가 상쇄되길 바랍니다.

끝으로, 머니투데이 신문사와 금융위원회 측에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