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안나의 방 / 홍기라 당선작> 안나의 방 / 홍기라 정래는 토요일 새벽 안나에게 청혼을 해왔다. 신혼여행으로 함께 하와이에 가자고 했고 자기는 거기서 파도를 탈거라고 했다. 그때 그들은 여러 종류의 술을 섞어 마시고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나는 정래가 했던 말들은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둘은 흔들리는 그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안나는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을 벗어 머리에 둘러썼고 정래는 캔맥주 뚜껑 따개를 뽑아 안나의 새끼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약지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따개는 새끼손톱에 걸쳐져 우스웠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은 계속 낄낄대고 있었다. 늦봄의 새벽 공기는 쌀쌀했고 어두운 밤하늘은 조금씩 엷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입속에 혀를 집어넣었다. 안나는 지난 밤 이태원 클럽에서 정.. 좋은 글/소설 2개월 전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작] 호모 헌드레드 / 이상민 호모 헌드레드 / 이상민 1 소설이 지났지만 꽃은 아직 피어 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공원의 풍경은 다른 세상이 펼쳐진 듯 설면설면하다. 공원이 꽤 넓기에 낯섦은 조악하지 않고 특별한 정취를 풍긴다. 사실, 공원의 꽃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철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시의 용역을 받은 조경 회사가 주기적으로 새로 심고 품 들여 유지하는 인위적 화단이다. 세상의 옆구리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공원의 화단 사이로 마른 바람이 분다. 익숙하지 않은 첫추위가 매섭다. 그래도 아직 영상의 기온이고, 조금은 가벼운 코트로 멋을 부려도 시의에 적절하다. 공원 안의 사람들은 회귀한 계절과 새로운 공간에 들떠 각자의 영감을 착상하고 있다. 그들은 서울의 사대문 안에 이처럼 너른 공터가 있다는 것이 예기하지 못한 .. 좋은 글/소설 약 1년 전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오랜 날 오랜 밤 / 임택수 오랜 날 오랜 밤 / 임택수 머릿고기, 순댓국, 부속 일체. 악기점 옆 빈대떡집 간판은 언제 봐도 애매했다. 두희가 읽어내지 못하는 악보 같았다. 부속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빈대떡집에서 하는 것이 더 묘했다. 두희는 저도 모르게 보도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져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대여섯 사람이 건널목 앞에 서 있을 뿐, 딱히 수상쩍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미세 먼지 때문에 원근감이 사라져 낡은 스크린 속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백만 달러짜리 플루트는 어떤 소리를 내는 걸까. 두희는 잰걸음으로 걸으면서 아까 악기점에서 들은 갖가지 플루트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가격에 놀라 웃음만 지었는데 율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겸연쩍은 .. 좋은 글/소설 약 1년 전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러브레터 / 권희진 러브레터 / 권희진 결국 여기로 왔다.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으나 막상 여기 16층에 와서는 마땅히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하고 그저 가만하고 있다. 가만히 있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그걸 집 밖에서 해본 적은 없다. 집이 아닌 곳에서 정지해 있으면 사람에 치이고 차에 치이고 무언가에 자꾸 치이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 이동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여기 16층에는 흐름이 없다. 바람이 있고 소음이 있지만 딱히 흐름이랄 것은 없다. 낮 시간대에는 사람들이 와서 담배를 피우거나 사적인 전화를 하다 가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마저도 한곳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가 목적을 다하면 다시 자신들의 층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그런 곳에 나는 무엇 때문에 왔나, 라고 물으면 흡연을 하기 위.. 좋은 글/소설 약 1년 전
[2024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말을 하자면 / 김영은 말을 하자면 / 김영은 우리 모두 형우다. 나는 피켓 문구를 바라보았다.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문구가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 아래에는 정의연대연합 마크가 찍혀있었다. 너는 목이 말랐던지 음료를 단숨에 마셨다. “자기소개서는 잘 쓰고 있어?” 나의 물음에 너는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다. 너는 경쟁률이 높기로 소문난 H신문사에 입사 준비 중이었다. 경기도 본가에서 생활하는 너는 가끔 나의 자취방에 놀러오기도 했지만 졸업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뜸해졌다. 나는 네 소식을 SNS로 자주 접했다. 매번 피드에 올라오는 네 글에선 너의 말투가 그대로 느껴졌다. 단호하고 직설적인 말투. 물론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정치적 이슈들을 다루는 글이 더 많았다. 캣맘 사건, 민식이법, 스쿨 미투, 동성결혼.. 좋은 글/소설 약 1년 전
[2024 농민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내규에 따라 / 곽재민 내규에 따라 / 곽재민 올해 농번기부터는 주말 당직을 서도 시간외수당을 받지 못한다. 근로자들의 근로시간 초과 방지라는 이유였고, 당직비 대신 평일에 하루 휴무를 받게 됐다. 총무과 박 대리 말로는 인건비가 너무 많이 나간다는 것이 실상이었다. 규정이 바뀐 뒤로 직원들은 더 이상 당직을 사고팔지 못한다. 주말 당직 거래는 회사의 개입 없이 직원들만의 규칙으로 형성되어 오랜 기간 유지되어왔다. 육아하기 바쁜 직원들은 주로 당직을 팔았으며, 홀몸인 나는 그들의 당직으로 용돈벌이를 했다. 파는 쪽에서 돈을 지불했던 이 시스템에는 당직비 8만원에 추가적인 값을 얹어주는 규칙이 존재했다. 공휴일이 낀 당직은 기본 당직비에 7만원을 얹어 팔기도 했다. 나는 최대 15만원까지 들어오는 당직을 마다하지 않았고, 작년엔.. 좋은 글/소설 약 1년 전
[2024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i / 허성환 i / 허성환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과 아내의 손이 닿은 공간에 땀이 찼다. 우리의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방사선사가 화면을 띄웠다. 우선 아기 크기를 재볼 건데요. 여기 하얗게 보이는 게 위에서 본 머리뼈예요. 좀 더 내려오면……. 심장 뛰는 거 보이세요? 이쪽 아래가 배 부분이고요. 까맣게 보이는 게 위장이에요. 여기 보시면 양수를 먹기 때문에 위 안이 이렇게 차 있습니다. 여기가 머리고… 이게 뒤통수, 요게 정수리, 이 안에 하얀 거 보이시나요? 이게 코뼈 부분인데요. 뼈를 확인하는 이유는 이 주수에 코뼈가 안 보이는 아기들이 다운증후군이나 염색체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확인하는 거예요. 같은 의미로 목뼈 뒤에 투명한 이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데 아기의 척추뼈 일부가 불완전하게 닫.. 좋은 글/소설 약 1년 전
[2024 불교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나비춤 / 김성희 나비춤 / 김성희 오전 10시의 시곗바늘은 옛 고궁의 돌담을 따라서 천천히 도는 듯했다. 도심의 높고 웅장한 빌딩마저도 초겨울 들판의 미루나무같이 다소곳했다. 나란히 쓸쓸해서 나란히 다정한 11월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화윤에게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역으로 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 사월의 벚꽃처럼 눈꽃이 흩날렸다. 낮고 흐린 하늘을 온통 뒤덮은 눈꽃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미묘한 하늘빛을 내 머릿속에 이미지로 저장했다. 지하 70여 미터의 캄캄한 지하철 안에서 그 하늘을 잇대어 내내 달릴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끝에 그가 서 있을 것 같았기에. 그러니 11월은 내게 영원히 지속되는 암전이다. 차가운 찰나에서 뜨겁게 치솟는 그리움의 침전물이.. 좋은 글/소설 약 1년 전
[2023 전라매일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택배 / 박시안 택배 / 박시안 계산대 앞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택배기사의 전화라는 걸 연수는 발신번호를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은 택배기사 밖에 없었다. 연수는 전화기로 손을 뻗으며 마트 출입구 쪽을 살폈다. 열 체크를 마친 사람들이 소독제를 손에 바르거나 카트 손잡이를 닦으며 매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오면서 매장 안에 하나둘씩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감염병이 유행하면서 불황이 이어졌지만 연수가 계산원으로 일하는 대형 마트는 한 번도 문을 닫지 않았다. 확진자가 늘어나고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지면 오히려 마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매출이 올랐다. 그럴때면 소문처럼 떠돌던 감원 이야기도 잦아들었다. 할인특가 방송이 나오는 정육코너로 사람들이 몰.. 좋은 글/소설 2년 전
[2023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기적의 남자 / 김동승 기적의 남자 / 김동승 덕수가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찾았다. [김덕수 씨? 관악경찰서 박래신 형사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무슨 일이시죠?] 덕수는 잠시 보이스피싱인가 싶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은행 대출이나 검찰, 부모님의 사고 같은 흔한 레퍼토리가 나오면 가차 없이 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덕기 씨 아시죠?] 예상치 못한 형사의 질문에 덕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겼다. 이덕기? 이덕기? 이덕기! 10초 정도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이름이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덕기, 병원 사람들은 그를 이기적이라 불렀다. 이름 전체로 부르면 의도치 않게 비난하는 꼴이 되어, 성을 떼고 기적 씨로 부르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좋은 글/소설 2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