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영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황동나비경첩 / 이상수 황동나비경첩 / 이상수 화초장 위에 황동나비가 고요히 앉아있다. 흡밀吸密이라도 하듯 미동이 없다. 철심鐵心이 박힌 나비의 반쪽은 몸판에, 다른 쪽은 문짝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황금빛 날개가 팔랑거린다. 친정 안방에 놓인 화초장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 두 칸짜리 문판에 단아하게 매화가 그려져 있고 황동나비 세 마리가 돋을새김 되어있다. 안쪽엔 해충의 침입을 막으려 한지를 덧발랐다. 위 칸엔 모시적삼을 비롯해 두루마기와 유건이 걸리고, 아래 칸엔 치마저고리며 처녀 때 손수 수놓은 베갯잇이 포개져 있다. 친정 부모님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육십 년 전이었다. 열다섯에 가장이 되어 책임감 강한 아버지와 놀기 좋아하던 철없는 막내딸 어머니는 초례청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엔 으레 .. 좋은 글/수필 5년 전
[2020 경제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아버지의 신용카드 / 곽흥렬 아버지의 신용카드 / 곽흥렬 습관은 낯설던 것도 익숙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는가보다. 이십여 년쯤 전의 일이다. ‘신용카드’라는 말이 처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무렵, 카드를 만져보기는커녕 구경조차 하기가 힘이 들었었다. 카드란 것이 마치 무슨 특권을 부여받은 특정계층의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물건인 줄 알던 때였다. 이를테면 지금으로부터 불과 이삼 십여 년 전 자가용이 보편화 되지 않았을 시절,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검은색 세단을 보면 우리 같은 샐러리맨들과는 상관없는 별세상의 사람들만 소유하는 물건인 양 생각되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나 할까. 어쨌든 자가용은 보통사람들로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엄청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언제 저런 걸 한 번 가져 보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좋은 글/수필 5년 전
[2020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아버지 게밥 짓는다 / 김옥자 아버지 게밥 짓는다 / 김옥자 달무리 속으로 언뜻언뜻 구름이 흘러들다 사라지는 밤, 정월대보름 놀이를 하느라 한껏 들뜬 여흥이 가시기전 경광등을 켠 경찰차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에서 내리더니 보호자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농한기를 맞아 도시에 사는 지인들과 관계의 밥을 짓고 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는 속도의 바퀴에 무참(無慘)하게 부딪쳤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빠와 언니에게 당부의 말도 일러 둘 겨를도 없이 그 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위중했던 병세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적응되고도, 근 1년여의 투병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진 대퇴부까지 석고 깁스를 하고 목발에 의지한 채 집으로 오셨다. 한 집안의 대들보이자 기둥처럼 튼튼했던 몸이 사고의 후유증 때.. 좋은 글/수필 5년 전
[2020 전남매일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불씨 / 제은숙 불씨 / 제은숙 장작이 탄다. 불이 붙기 시작하면 확확 타오른다. 마른 나무가 몸을 뒤채며 터지고 끊어진다. 치솟을땐 다가 갈 수도 없게 뜨거웠던 것이 잦아들면 은은한 열기와 함께 옆자리를 내어준다. 숯불은 불길을 제 속에 불러들여 스스로 발광한다. 온전히 붉은 것이 아니라 노랗거나 빨간 빛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린다. 심장이 뛰듯 두근대기도 한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어디 먼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불기운이 주는 나른함 때문이리라. 어느 가을 우리 가족은 캠핑을 시작했다. 한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줄기차게 짐을 꾸렸다. 소꿉놀이하는 듯한 기분도 좋았지만 밤이 이슥하도록 화롯불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즐거움이 그만이었다. 아울러 불향이 밴 고기까지 먹으니 캠핑의 진수를 맛 본 것 같았.. 좋은 글/수필 5년 전
[2020 제주신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붉은사슴이 사는 동굴 / 서정애 붉은사슴이 사는 동굴 / 서정애 붉은 불빛 한 줄기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확대기에 필름을 끼우고 적정 빛을 준 인화지를 바트에 넣고 흔든다. 마지막 수세를 거치면 흑과 백의 피사체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액체 속의 인화지를 살짝 흔들어준다. 비로소 필름 속에 갇혀있던 사물이 제 존재를 드러낸다. 중국 윈난성에는 ‘붉은사슴동굴’이 있다. 동굴 벽면에 붉은사슴이 그려져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만 오천 년 전쯤의 벽화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슴은 큰 뿔을 들이밀며 금방이라도 벽을 박차고 나올 듯 뒷다리를 앙버티고 있다. 빙하기에 살았다는 붉은사슴동굴인은 어떤 연유로 캄캄한 곳에서 벽화를 그렸던 것일까. 주술이나 신앙의 표현이었겠지만 자연의 위대함을 빌려와 자신의 소망을 거기에 투영한 게 아니었을까. 혼신의 힘을.. 좋은 글/수필 5년 전
[2020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새 / 조혜은 새 / 조혜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새를 보고 새를 볼 수 없을 땐 새를 상상해 왔다. 여덟 살 때부터 치기 시작한 피아노마저 건초염으로 오년 전 그만둬버리고 내게 취미라고는 새를 보고 새를 상상하는 것이 유일하다. 눈앞에 있지 않은 새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무실 내 옆자리의 후배는 신기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유독 새빨간 입술이 백문조를 쏙 빼닮았다. 뭐 때문인지 매사에 부루퉁한 얼굴로 혼잣말이 잦은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새카만 까마귀를, 아파트 근처 편의점의 스물 남짓한 야간 알바생은 검푸른 눈매가 도드라진 동고비를 닮았다. 세상에는 새를 닮은 사람이 아주 많다. 개나 고양이를 닮는 것처럼 사람들은 새를 닮기도 하며 특별하거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 하필 새를 보는가 하면.. 좋은 글/수필 5년 전
[2019 기독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궤 / 하미경 궤 / 하미경 처음으로 혼자 방을 쓰게 되었을 때였다. 방 한쪽 구석에 그것이 있었다. 거무튀튀한 색의 반닫이였다. 칠이 벗겨진 건지 칠을 한 적이 없었던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표면이 거칠었다.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가운데에는 까만 쇠 구멍이 위에 두 개, 아래에 세 개가 있었다. 다섯 개 구멍을 일렬로 꿰어 길쭉한 쇠를 걸어 두었다. 걸쇠 아래쪽에는 경첩이 있었는데 군데군데 녹이 슬어 얼룩덜룩했다. 오래된 물건처럼 보였다. 나보다 먼저 방을 차지하고 있는 궤가 어쩐지 방의 주인 같았다.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상상해보았다. 슬그머니 열어볼 생각도 했지만 열쇠도 없었고 혹시 열었다가 뭔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무섭기도 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나와 닮아 보이.. 좋은 글/수필 6년 전
[2019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연잎밥 / 조경숙 연잎밥 / 조경숙 연잎밥을 지었다. 큰 솥뚜껑을 열자 향을 껴안은 주먹만 한 연밥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오뉴월 땡볕에 싸움질을 하던 아이들이 마치 한 이불 속에 서로의 몸을 포갠 채 잠자는 모습 같다. 하나 둘 조심스레 펼치니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는 김이 오른다.평소 '옴마밥'이라며 찬 없이도 밥그릇을 단숨에 비워내던 열 명이나 되는 식솔들은 연밥을 싸는 동안 신기한 듯 하나둘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굳이 이런 풀이파리에 밥을 싸는 이유가 뭐냐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한 주걱씩 푼 밥을 연잎에 올리고 고명으로 대추 은행 잣을 올려 마음을 포개듯 돌려가며 동여맸다.밥은 하루를 잇는 징검다리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사 일상의 소박한 행.. 좋은 글/수필 6년 전
[2019 영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마디 / 안희옥 마디 / 안희옥 하늘 향해 뻗은 대나무의 기상이 옹골지다. 미끈한 몸매에 둥근 테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은 흡사 초록 옷을 입은 병사들의 열병식을 방불케 한다. 이따금 간들바람이 푸른 대숲을 훑고 지나간다. 무성한 댓잎 사이로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햇살에 눈이 부신다.굵은 대나무가 길을 가로막는다.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손안에 가득 찬다. 매끄러운 줄기 사이, 마디가 껄끄럽다. 볼록한 부분은 특별히 다른 곳에 비해 단단하고 힘이 있다. 대나무는 기후가 나쁘거나 수분이 부족할 때 성장을 멈추고 힘을 모은다고 한다. 이때 생기는 것이 마디다. 성장판을 닫고 힘을 비축한 뒤 기회가 되면 다시 커간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대나무는 휘지 않고 곧고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아들 귀한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 좋은 글/수필 6년 전
[2019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수탉의 도전 / 이인숙 수탉의 도전 / 이인숙 수탉이 철조망 틈새 끼인 날갯죽지를 빼느라 발버둥을 친다. 눈망울을 껌뻑이고 붉은 볏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힘겨운가 보다. 틈새가 비좁아 수탉이 탈출하기엔 불가능해 보이건만, 포기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탈출을 향한 집념이 팔월의 태양 볕보다 뜨겁다. 급기야 부리로 땅을 쪼아대며 용을 쓴다. 수탉의 몸짓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오기마저 느껴진다.드디어 탈출이다. 수탉이 날개를 펴고 텃밭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철조망 아래 땅을 파헤쳐 틈새로 탈출을 성공한 것이다. 닭이 머리가 나쁘다는 말도 옛말인 것 같다. 철망과 땅의 틈새를 파헤치면 구멍이 생기는 걸 어찌 알았을까. 수탉은 볏을 꼿꼿이 세우고 개선장군처럼 풀밭을 활보하고 있다. 그 모습은 더없이 늠름하다. 수탉의 탈출은 한 번에.. 좋은 글/수필 6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