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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어머니의 계절 / 최영랑

 

빈집엔 봄이 오지 않고 여름도 오지 않고 빈집의 계절만이 서성거린다


빈집은 쉽게 들어갈 수 없고 대문 안에 들어서도 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끄럽고 어스름한 저녁 누구라도 거부하는 빈집만의 습관이 있다


그림자 없는 대문에서 빈집의 툇마루를 바라보면 그곳은 포근했던 무릎, 포근한 미소가 떠올라 헐렁한 하루가 부풀었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나는 경직된 다리를 뻗는다


가끔 무릎을 내어주는 거기, 정류장처럼 너그럽다 잡초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영역 다툼에 휘말려도 장독대의 도깨비풀이 항아리 속을 욕심내어도 그냥 말줄임표만 사용할 뿐이다


빈집은 기다린다 밤나무가 뒷마당에 밤톨을 툭 툭 던지고 바람이 기왓장을 와장창 깨뜨릴 때도 빈집은 그냥 좋은 날이야라고 말한다 빈집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집이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 집에 가까이 가야 한다 들어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가서 닳은 무릎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당선소감>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그대로 사랑합니다


폭풍으로 집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진이 가시질 않아 따끈한 차 한 잔을 들고 출렁이는 생각들을 눈발에 하나둘 날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평온해지려는 시간 속으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예지몽이었나! 무너짐이 새로운 시작이라니.

낙숫물을 즐겨 바라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했던 댓돌에 둥근 홈이 생겨나고 그곳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현실과 꿈속을 넘나드시는 어머니, “좋은 날이야라고 하시면서 활짝 웃을 때마다, 가슴에 찬바람 부는 빈집으로 웅크리고 계셨음을 알기나 하시려나. 아무리 덮어도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 지금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돌이켜보니 고마운 분들. 새로운 상상력을 분출하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늘 따뜻한 벗이 되어준 정동진카페 식구들, 누구보다 기뻐하실 부모님, 묵묵히 응원해주던 남편 그리고 경표, 경훈, 친구들, 일일이 마음 전하지 않아도 소식 듣고 기뻐해주실 저를 아는 분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들을 문장에 가둬 놓고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 때쯤, 동토의 땅을 새롭게 일굴 수 있도록 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 이름에 허물이 되지 않도록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길을 내어 주신 문화일보에도 감사드립니다. 개성적인 시인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약속합니다.

눈이 내립니다. 빈집에 가봐야겠습니다.

툇마루에 가서 다리 한번 쭉 뻗어 봐야겠습니다.

 

1958년 전북 정읍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모성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 깨달아

 

신춘문예는 한국 문학의 축제다. 새로운 시인이 탄생하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이 축제에 참여한 이는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고 오랜만에 배도 좀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번 축제의 상에 놓인 음식들은 숙성과 발효가 되지 않은 겉절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는 겉절이보다 오래 숙성되고 발효된 맛의 깊이를 요구한다. 그릇에 담긴 음식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면 그릇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모순과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시라 하더라도 부조리하다는 메시지밖에 없다면 그 또한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박현영의 <유형에 대한 탐구>, 박민서의 <실록>, 김재인의 <오늘의 만남>, 최영은의 <어머니의 계절> 4편이었다. <유형에 대한 탐구>는 유형에 대한 구체성이 모호했다. 제목이라는 그릇만 크고 그릇에 담긴 내용은 유형에 대해 날마다 간구했지만/ 질문은 의문으로 남아/ 이곳을 비추는 하나의 불빛이 된다처럼 모호했다. <실록> 또한 무화과 묘목을 심으려고 판/ 마당 한 귀퉁이에서 녹슨 자물통이 나왔다고 했으나, ‘녹슨 자물통이 시의 내용물로 제시만 되고 그 의미에 대한 추구가 결여되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수사는 화려하나 만남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모성을 빈집에 비유한 <어머니의 계절>은 비교적 완성도가 높았다. 모성을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는 점 또한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노력하는 일이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단의 밑거름이 되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 황동규·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