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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당산나무 연대기 / 정지윤

 

마을이 사라지면 그뿐,

그 누가 전설을 남겨두겠는가

마을보다 먼저 뿌리내렸을 당산나무

나이테에 지나간 그림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황량한 벌판의 바람이 주인이었던 때가

아름드리 등고선에 박혀있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드린 치성이

깊은 주름 골로 새겨 있다


점차 들어오는 발길보다 나가는 발길 잦아진

내리막 황톳길 희미하게 새겨 있고

사십 넘겨 맞선 보러 간 큰집 삼촌

퇴짜 맞고 거나하게 부르던 ‘목포의 눈물’이 묻어 있다

고모가 맡기고 간 젖먹이를 업어 키우는 할머니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해거름 당산나무 가지에 자장가를 걸어두었다


족보의 어디쯤 마디를 잘랐는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내 가지들

당산나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백 년 전 어느 그림자 내 지문을 닮아있다


마을은 캄캄한데 당산나무만 밤새

팔이 근질거린다




  <당선소감>


   "기록되지 않은 삶의 숨소리’를 기록하겠습니다"


  기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입니다.

  존재와 부재, 모순되는 두 현상이 공존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대신 자아의 내면에 투영된 쓸쓸한 풍경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오래된 마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어 많이 안타깝습니다. 톨스토이는 “당신이 우주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의 마을을 노래하라"고 했습니다. ‘마을’은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이며 일상적인 삶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무한하게 녹아 쌓여 있는 곳입니다. ‘마을’이란 단순히 경제적인 가치로 환원되는 물리적인 공간만일 수 없습니다. 한 마을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거대한 역사책이면서 다양한 형태의 생활사가 누적된 신화적인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외피에 연역적으로 명기된 역사적 사실보다 그 사실들의 보이지 않는 행간에 숨어있는 ‘기록되지 않은 삶의 숨소리’가 진정한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의 행간을 살다간 민초들의 찰나적인 생과 아픔 그리고 햇빛과 바람과 꽃들을 누가 호명해 줄까요. 기억은 사랑보다 아름답습니다.

  뜻 깊은 상을 받게 되어 기쁘고 행복합니다. 문학의 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모두 고맙습니다. 부족한 작품에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께 깊이 감사드리며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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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해 거듭할수록 작품 수준 높아져…현장감 넘치는 흡입력"


  시 부문에서는 작품의 수준이 극명하게 갈렸다. 출품작은 많았으나 마지막 심사 대상에 오른 응모자는 박용운·이은주·강신명·정소망·정미경씨 5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박용운씨의 '불씨를 품다'와 이은주씨의 '타래실', 그리고 정미경씨의 '당산나무 연대기'가 경합을 벌였다.

  '불씨를 품다'는 불타기 위해 "어깨를 맞대고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는 장작들"을 "인력시장에 줄지어 선 사내들"에 빗대어 쓴 매우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아직은 관념적이어서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타래실'은 "엄마와 내가 함께" 실패에 실을 감고 풀었던 ‘실의 시간’을 성공의 반대 개념인 '실패'와 연결해 매우 유니크하게 풀어간 수작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다른 동반 작품들이 아쉬웠다.

  '당산나무 연대기'는 당산나무에 서리었을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연대기’적으로 풀어가는 솜씨가 뛰어났다. "벌판의 바람이 주인"이었을 때부터 "젖먹이 업어 키우는 할머니의 자장가"까지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당산나무'를 그립게 만드는 정미경씨의 출품작을 우수작으로 선정한다. 함께 응모한 '경주마', '나의 느티나무' 같은 작품에도 오랜 습작의 시간들이 녹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시인으로서 정진하시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유안진, 손택수,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