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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도와줘요, 레스큐맨! / 송은혜

 

  오늘이다. 개교기념일이자 나의 중고 거래 성사일.

카페인D: 물건 아직 있나요?

열두 살 인생: ! !^^

카페인D: 진열장에 얘 자리만 비어서 허전했거든요.

가치 있는 물건을 알아본 사람이었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로 들어가 악수하고 싶었다. 우리는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페인D님은 레스큐맨 후드 티셔츠를 입고 나온다고 했다.

나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레스큐맨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레스큐맨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는 귀 때문에 괴로워하는 만화 주인공이다. 그는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라이프 그물로 멋지게 사람들을 구해낸다. 아직 나에게도 레스큐맨이 필요하다.

나는 미술 붓으로 레스큐맨을 꼼꼼히 살폈다. 매일 들여다보는 피규어라서 먼지 한 톨 없었다. 누나 침대 밑에서 에어캡을 꺼내 포장했다. 얇은 검이 부러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엄마는 밥을 먹다 말고 꼭 소화제를 마신다. 엄마 휴대폰에서 또 벨 소리가 울렸다. 꼭꼭 숨어버린 아빠를 찾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형님, 저 마트 월급까지 차압됐어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갚을게요."

내가 상 위의 계란말이를 엄마 쪽으로 슬쩍 밀어도, 엄마는 물에 맨밥을 말아서 꾸역꾸역 먹었다. 누나는 헛기침을 하고서 물을 마시더니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밥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놓고서 상자에 테이프를 단단히 붙였다.

'나중에 비싸지더라도 꼭 데려올게.'

말끔히 단장한 레스큐맨 쪽으로 긴 머리카락 한 올이 날아왔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누나를 보았다. 누나가 드라이어로 머리 말리는 모습이 웃겼다.

"누나 머리 꼭 대파 같다."

"까불지 마. '중고 천국' 사기꾼 천국이다. 조심해라."

누나가 손가락 준비 운동을 하고 화장품 주머니를 열더니 거의 새사람으로 변하는 마법을 선보였다. 누나가 의자를 휙 돌리더니 말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혹시 아름다움?"

누나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 아빠는 누나가 대학에 가길 바랐지만 누나는 아빠가 숨고 난 뒤에 책을 버렸다. 그러더니 네일아트 학원에 등록했다. 주말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누나는 악덕 편의점 사장님을 물리치고 그 자리에 네일아트 숍을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수요일 대낮에 돌아다녀서 기분이 묘했다. 혼자 고독을 오도독 씹어보고 싶었지만, 옆에 누나가 있다. 누나는 성가신 듯 말했다.

"바짝 붙어서 걷지 마."

나는 게걸음으로 두 발자국 멀어졌다. 누나는 홍대입구역에 간다고 했다. 좋아하는 힙합 그룹이 공연한다고 응원봉까지 챙겼다.

"너 지하철 요금이 얼마인 줄은 아냐?"

누나는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 제일 환하게 웃는다. 누나가 지갑에서 교통 카드를 꺼내주었다. 내가 개찰구를 통과한 사이 누나는 운동화에 날개라도 달린 듯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누나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내가 태어났다. 따끈따끈한 백일 떡을 돌린 사람도, 동화책을 실감 나게 읽어준 사람도 누나였다. 누나는 자기가 나를 업어서 키웠다고 했다. 누나는 나를 실험 대상 삼아 장난을 쳤다.

"준아, 누나가 파마해줄까?"

누나는 짧은 내 머리카락에 용케 볼펜을 여러 개 말아서 고무줄로 묶어놓았다.

", 양말 벗어봐."

언젠가 누나가 구피를 구해다가 세숫대야에 풀어놓았다. '닥터피쉬'를 체험한다고 했다. 나는 오줌을 참으면서 발을 담갔다. 구피 세 마리가 죽어서 물에 떠올랐다.

"준아, 손톱에 봉숭아물 들여 줄게."

내 손가락은 김칫국물 색으로 벌겋게 물들여져 모두를 놀라게 했다. 누나라서 참았지 동생이었으면 벌을 세웠을 거다. 그때는 누나가 있어서 엄마 아빠가 과일 가게에서 늦게 와도 무섭지 않았다.

"발을 넓게 벌리고 타."

누나가 지나가듯 말했다. 나는 지하철이 달려오면서 내뿜는 환한 빛에 눈을 감았다. 많은 사람 틈에서 가방을 움켜잡았다. 그런데 문이 닫히고 보니 누나가 옆에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음 칸으로 가려고 버튼을 눌렀을 때, 옆에서 누나가 튀어나왔다.

"까꿍!"

누나는 유치한 장난에 성공했다고 좋아했다. 나는 숨바꼭질이 싫어서 맞장구치지 않았다. 진짜 숨바꼭질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아빠는 들키지 않고 숨어 있다. 하지만 엄마는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칠 힘조차 없다.

"근데 피규어 팔아도 정말 괜찮겠냐?"

누나가 레스큐맨 상자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레스큐맨에 당첨되었을 때, 미래의 행운까지 끌어다 쓴 느낌이었다. 만화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한정판 피규어가 딱 100개 제작되었다. 나는 레스큐맨에게 보내는 구조 메시지 이벤트에 참여했다.

레스큐맨, 내 말도 들리니?

아빠가 상가 사람들한테 돈을 빌리고 도망갔대.

우리 싱싱 과일 가게 천막에 빨간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누나는 아빠 생각도 하기 싫대.

레스큐맨, 우리 집을 구해줘.

내가 응모한 사연이 뽑혔다. 부풀린 부분도 있어서 뜨끔했지만, 레스큐맨을 갖게 되어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돈 벌어서 엄마 줄 거야."

"널 효자로 임명하노라! 나 내린다."

누나는 응원봉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 누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내렸다. 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했다. 자그마치 열일곱 역을 더 가야 했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코트 입은 아저씨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딴 곳을 쳐다보았다. 레스큐맨을 보낼 생각에 잠을 설쳤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야 돼!'

살짝 눈뜰 때마다 옆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덩치 큰 아저씨가 내 자리까지 침범해서 인상을 찌푸렸다가 눈을 번쩍 떴다. 강남역에서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서둘러 내렸다.

나는 10번 출구 안내 표지판을 따라 빙빙 돌았다.

"10번 출구가 어디예요?"

야구 모자를 쓴 형은 못 들은 척하고 가버렸다. 아까 지나쳤던 휴대폰 가게가 다시 나왔다. 내가 출구를 묻자 휴대폰 가게 아저씨는 시큰둥하게 고개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나는 역 근처 하트 조각상 앞에서 서성거렸다. 이제야 걱정되기 시작했다. 누나가 알려준 중고 천국 사기 수법을 떠올렸다. 물건만 받고 줄행랑치는 사람, 물건이 고장 났다고 물어내라는 사람, 입금했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 원숭이 인형 탈을 쓴 사람이 다가와서 영어 학원 전단을 건넸다. 나는 꼬부라진 알파벳을 읽다가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열두 살 인생님? 아이였구나."

"? , ."

나는 레스큐맨이 도드라진 후드 티셔츠를 보며 대답했다. 카페인D님은 배가 불룩한 임신부였다.

한정판 이벤트에 응모했다가 떨어졌지 뭐야. 아기랑 날 지켜줄 히어로를 드디어 구하다니.”

카페인D님이 웃으면서 배를 쓰다듬었다. 나는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아빠가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사랑한다. 건강하자. 행복하자. 우리 집에서 그런 말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나는 레스큐맨 상자를 안고 가는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스큐맨을 잘 부탁해요.”

나는 지하철을 타자마자 빈자리에 얼른 앉았다. 그러고 가방 속의 봉투를 꽉 쥐었다. 내가 멋지게 해냈다는 걸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할아버지가 무거운 짐을 들고 탔다. 할아버지는 백화점 쇼핑백을 열 개도 넘게 들고 있었다. 나는 퍼뜩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했다. 할아버지는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중요한 기밀을 전달하는 요원이란다.”

중요한 기밀요?”

내가 없으면 백화점이 돌아가지 않지.”

나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에 쇼핑백을 삼십 개나 들어봤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백화점이 세 군데 있다는 역에서 내렸다.

빈자리에 앉아서 무심코 가방 속으로 손을 넣었을 때,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봉투가 없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프니?”

저 할아버지가! 내 봉투!”

나는 어떤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서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주머니가 앞장서서 역무실을 찾아 주었다. 나는 우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역무원 아저씨는 피해 금액과 연락처를 적어 놓고 가라고 했다.

찾을 가능성은 희박해도 기다려 봐야지. 어쩌겠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잘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할아버지를 만나서 다 망쳐버렸다. 아까운 레스큐맨. 결국 엄마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온종일 뭐 하고 돌아다녀?”

나는 대답을 하려다가 또 눈물이 날까 봐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화가 나서 보조 가방을 거꾸로 들어 짐을 탈탈 쏟았다. 만화책 사이에서 봉투가 툭 떨어졌다. 그제야 마음이 놓여서 눈물이 흘렀다. 의심했던 할아버지에게 미안했다.

다음 날 아침, 가계부 사이에 봉투를 끼워 놓았다. 이상하게 봉투가 더 두툼했다.

너 늦잠이나 퍼질러 잘 거야?”

엄마는 누나 방문을 세게 두드렸다. 나는 누나 방에 슬며시 들어갔다. 누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누나도 봉투에 돈 넣었어?”

그냥 네가 다 모았다고 해. 엄마! 준이가 엄청 아끼던 레스큐맨 팔았대요!”

누나가 기지개를 켜면서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나는 계란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당선소감>


   "내 동화는 '웰컴 키즈 존' 아이들 배꼽 접수하고파"


잘 꾸며진 카페가 새로 오픈해서 유모차를 밀고 들어가려는데 보기 좋게 퇴장을 당했습니다. '노 키즈 존', 아이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제 동화는 '완전 웰컴 키즈 존'입니다. 특별한 독자들 마음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 독자들 배꼽을 접수할 만큼 재밌는 동화를 쓰고 싶습니다. '델리카테사 윈도셰이드 맥크렐민트 에스레임즈 도우터 롱스타킹'. 동화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해준 주인공입니다.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지만 사랑스러운 말괄량이. 저의 앞집 910호에 사는 어린이도, 태권도 노란 차에서 내려 경례한 아이도, 우리 집에 뒤엉켜서 싸우는 연년생 꼬마들도 다 사랑스러웠습니다.

올해 뜻하지 않게 이사를 두 번 했습니다. 위층 누수로 인해 곰팡이 꽃이 화려하게 핀 집에서 뜨거운 여름과 가을을 보냈습니다. 집주인과의 언쟁, 이웃과 얼굴 붉힌 일 때문에 몰래 눈물을 찍어냈습니다. 그런데 울다가 웃었습니다.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은 집 안에서 아이들은 까르르 숨넘어갈 듯 장난치고, 엉덩이춤을 추었습니다. 다시 웃어넘길 수 있었던 건, 아이들 덕분이었습니다. 신춘문예 접수가 마감된 뒤 이사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합니다. 동화의 깊이와 진정성을 알려주시고, 묵묵히 응원해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 제 작품을 잘 씹고, 뜯어보고, 진지하게 조언해준 글벗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새벽까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어도 코를 골며 자 준 라임이와 라율이, 당선 소식에 "그럴 줄 알았다"면서 환하게 웃어준 남편 최원상님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 1987년 서울 출생.

  ●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건강한 말맛으로 가족의 문제를 꼬집다"


응모작 290편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어린이를 둘러싼 상황을 고루 보여주었고, 좋은 작품으로서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작품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어린이의 삶이 잘 드러난 작품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날'은 사춘기 여자아이들의 처세나 이성에게 풋풋한 정이 시작되는 심리를 묘사하는 감각이 저작자의 장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다 할 구성이 없고 주인공이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밋밋하다.

'고양이 엄마'는 미혼모라는 사회적 문제를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드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엄마의 나이를 몇 살로 봐야 하는지 헷갈리고, 감자탕 가게에 엄마가 없다는 마지막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호하다.

'도와줘요, 레스큐맨!'은 빚지고 도망간 아빠 때문에 힘들어진 엄마를 도우려고 피규어를 팔러 가는 아이 이야기다. 이 행위가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감동을 끌어내기 어려워도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건 인물과 상황을 그려내는 문장의 건강한 말맛이다. 가족 간의 연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어울리는 작품이라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어린이의 문제를 건강하게 짚어내는 작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황선미, 송재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