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늑대가 나타났다 / 명은숙

 

  보름달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둠 속 달빛에 비친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눈꼬리를 따라 빛은 점점 강해지고, 머리에 있던 털들이 자라고 있었다. 빳빳하고 거친 털들이 자라나 눈을 가리고, 뺨과 턱을 덮었다. 나는 올려다 볼 수 없었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곧 커다란 입에서 송곳니들이 튀어 나올 거야!'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림자가 커지고 있었다. 달은 더욱 노란빛을 띄며 그림자를 키웠다. 늑대는 달빛을 받으며 변했다. 커다란 어깨를 벌리고, 잔뜩 웅크렸던 날카로운 발톱을 펼치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연지네 집은 우리 집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은 가야한다. 낮에는 걸어가기도 했지만 저녁엔 위험하다고 엄마가 버스를 타라고 했다. 나는 조금 있으면 내려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지한테 나오라고 이야기할 걸. 나는 손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다시 기사아저씨 머리 위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깊이 눌러쓴 모자 아래, 울퉁불퉁하고 까만 얼굴이 험상궂었다. 나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앞자리로 들이밀었다. 꼭 확인해야 했다. 그때, 번뜩이는 눈과 마주쳤다. 나는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내 바로 뒤에 앉아 있었다. 등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전화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걸 수가 없다. 통화내용이 다 들릴 테니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휴대폰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버스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앞자리 등받이에 쿵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발밑에 떨어진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서면서 뒤로 밀려간 것이 틀림없었다. 머리가 서늘함으로 쭈뼛거렸다.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등 뒤에서 늑대가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금세라도 늑대가 덮칠 것만 같았다.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늘 혼자였다. 엄마가 많이 늦는 날은 가끔 연지네 집에서 놀기도 했다. 하지만 방과 후부터 엄마가 올 때까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나에게 언니나 동생을 만들어주지 못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물이 한통 왔다. 엄마는 가장 먼저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사진 속 얼굴을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모습은 사람이 아니었다. 늑대였다. 잔뜩 올라간 눈꼬리에 까만 얼굴, 구레나룻이 얼굴까지 내려온……. 늑대랑 똑같았다. 엄마는 근처에 사는 성 범죄자를 알리는 우편물을 받은 뒤로 더 전화를 자주했다. 아침저녁으로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했다. 학원을 갈 때도 친구랑 꼭 같이 다니라고 신신당부했다.

늘 나를 걱정하는 엄마 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필 오늘 같은 날 버스를 혼자 타야하는지, 왜 오늘 꼭 엄마가 늦는 건지. 엄마는 나를 두고 날마다 일을 나가야 하는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두려움과 원망으로 뒤죽박죽된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휴대폰은 버스 통로 뒤쪽에 떨어져 있었다. 뒤를 돌면 늑대의 눈과 마주칠 게 뻔했다. 지금도 힐끔거리는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곧 내려야 한다. 나는 용기를 냈다.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이거 네 꺼니?"

늑대는 바닥에서 주은 휴대폰으로 내 팔을 툭툭 쳤다. 뾰족한 가시들이 등에서 솟는 기분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받아들고 얼른 앞으로 고쳐 앉았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버스가 어서 다음 정류장에 서기만을 기도했다.

나는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내렸다. 목덜미로 들어온 빗방울이 차가웠다. 우산이 없었다. 오늘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늘 엄마가 챙겨주던 버릇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가 내려서 우산을 폈다. 그 사이 거리가 좀 멀어졌다. 나는 잰 걸음을 걸었다. 종아리가 뻐근했다. 더 이상 빨리 걷는 건 힘들었다. 왠지 뛰어가면 늑대가 같이 뛰어서 따라올 것만 같았다.

"얘야! 어디까지 가니?"

나는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어느 새, 늑대가 내 옆에 와 있었다. 늑대는 내 머리위로 우산을 기울였다. 말을 해야 하는데 입안에서 웅얼웅얼 맴돌기만 했다.

"이 동네에 사니? 비가 많이 오는구나."

가늘게 내리던 비가 제법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따라 짧은 치마가 신경 쓰였다. 연지가 예쁘다고 부러워하던 옷이었다. 후회가 됐다. 괜히 자랑하려던 마음이 벌 받은 기분이었다. 치마는 비에 젖어 자꾸만 다리에 붙었다.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늑대와 나는 가까워졌다. 늑대 팔이 내 팔에 자꾸 닿았다. 나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

"추운 모양이구나. 이쪽으로 더 오렴."

늑대는 나에게 바싹 붙었다. 심장이 쿵쾅 거렸다. 어깨에 닿는 늑대의 팔이 신경 쓰였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늑대 팔에 전해질 것만 같았다. 늑대의 목소리는 무척 친절했다. 해와 달에서 나오는 호랑이가 그런 것처럼. 그리고 또 한참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서 이 위험한 우산을 벗어나야 한다.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비가 그만 그치기를 빌었다. 비가 그치면 우산을 쓸 필요도 없고 늑대와 나란히 걷지 않아도 될 것이다. 버스에 내려 연지에게 바로 전화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내 심장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길은 좁지 않았지만 비가 와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 그림자만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느 새 비가 다시 가늘어졌다. 하늘이 내 소원이라도 들어준 걸까? 가늘어지던 비가 거짓말같이 그쳤다. 나는 몰래 늑대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비가그쳤어요."

늑대는 우산 밖으로 하늘을 보더니 우산을 접었다. 신경 쓰이던 팔도 닿지 않았다. 이때다. 바로 지금이 늑대에게서 벗어날 기회였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왜 혼자니?"

갑자기 늑대가 말을 걸었다. 아까보다 더 친절한 말투다. 우산 속에서 찰싹 붙어 있을 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왜 물어보는 거지?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나는 망설였다. 엄마가 늦게 와서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힘을 주고 이야기 했지만, 자꾸만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에 나무들도 한쪽 얼굴을 가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에서 소리가 났다. 검푸르게 변한 나뭇잎들이 흔들거렸다. 금세라도 나무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고요 속에서 들리는 풀벌레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거리엔 늑대와 나뿐이었다. 모두 늑대가 나타날 것을 알고 숨어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했다.

하늘에 잔뜩 꼈던 먹구름이 바람에 밀려갔다. 그리고 숨어있던 달이 나왔다. 커다랗고 동그란 보름달이었다. 늑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늑대의 한쪽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졌다. 달빛에 반사된 눈이 빛나고 있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의 눈이었다.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보름달이 뜨는 날, 늑대인간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달이 하늘 가운데 뜨고, 달빛이 깊어지면 늑대인간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어둠 속 달에 비친 눈은 날카로운 빛으로 번뜩였다. 눈꼬리를 따라 빛은 점점 강해지고 머리에 있던 털들이 자라났다. 빳빳하고 거친 털들이 길게 자라나 눈을 가리고, 뺨과 턱을 덮었다. 입가에 난 털들 사이로 기다랗고 날카로운 이빨이 비집고 나왔다. 털 속에 숨어 있던 두 귀가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옆으로 솟았다. 늑대인간의 옷이 찢겨지고 털로 뒤덮인 어깨가 드러났다.

차갑게 식어버린 땀으로 손이 축축했다. 들고 있던 휴대폰이 자꾸 미끈거렸다. 점점 좁아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로등 불빛도 점점 멀어졌다. 아직 여름이었지만 방학 때 다녀온 동굴 안처럼 서늘해서 나도 모르게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골목으로 더 들어가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갑자기 늑대가 멈춰 섰다. 캄캄한 좁은 골목 앞에서 늑대는 나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얘야,……."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달빛아래 송곳니가 나오고 털들이 수북해지는 늑대의 모습.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는 좁은 골목으로 냅다 뛰었다. 지금은 짧은 치마도, 형편없는 달리기 실력도 상관없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어둠 끝에 보이는 빛만 보고 뛰었다.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늑대가 내 등 뒤까지 쫓아와 있을 것만 같았다. 집을 나설 때 먹은 저녁밥이 자꾸 넘어오려고 울렁거렸다. 체육대회 때도 이렇게 뛰진 않았다. 어지러웠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골목을 벗어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연지가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단지 사이에 있는 횡단보도만 건너면 된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땀범벅이 되어서 번들거렸다.

녹색등이 바뀌자마자 나는 또 뛰었다. 발이 무거웠다. 다리에 쇳덩이를 단 것 마냥 걸음이 무거웠다. 단지 입구에 경비실이 있었다. 그제야 한숨이 나왔다. 연지가 일층에 살아서 너무 다행이었다. 나는 급히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연지가 집에 없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불안했다. 현관문에 귀를 대보았다. 집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늑대였다. 늑대가 여기까지 쫓아왔다. 나는 주먹으로 현관문을 마구 두드렸다. 늑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모자를 눌러 쓴 바로 그 늑대가.

"연지야!"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더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 유진이 왔네. 왜 문을 두드리고 그래? 문 부서지겠다."

나는 말해야 했다. 연지에게 늑대가 왔다는 걸 알려야 한다.

"늑대야! 늑대가 나타났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악을 썼다.

"무슨 소리야? 늑대라니?"

연지가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저기저기 늑대가……."

나는 늑대를 가리켰다.

"? 삼촌!"

나는 갑자기 다리 힘이 풀렸다. 연지가 만날 자랑하던 삼촌?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나라에서 선행상도 받아 신문에 나왔다고 연지는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 연지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준다는 그 삼촌이란다.

지금껏 힘 있게 달리던 다리가 흐물흐물한 오징어다리가 된 것처럼 맥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전단지속 늑대얼굴과 보름달 뜨면 변하던 영화 속 늑대인간이 겹쳐 떠올랐다. 나는 일어서려고 바닥을 짚었다. 하지만 다리가 마음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다시 주저앉았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눈물이 자꾸 나왔다.

"유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뒤늦게 나온 연지엄마가 놀라서 나에게 물었다.

삼촌과 연지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소리쳤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뭣 때문에 다들 그러는데……. 무서워 죽겠단 말이야!"

계단 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비온 뒤 부는 선선한 바람이 젖은 옷에 스몄다. 노란 보름달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당선소감>


   "-"


평생 몇 번 안 되는 가슴 벅찬 순간이 오늘 일듯 합니다.

저에게 동화는 우연이 필연이 된 인연입니다. 글을 쓸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고, 또 아이들에게 읽어주기만 하던 동화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강렬한 한 번의 만남은 잠자던 저를 깨웠습니다. 꿈꾸게 만들었습니다.

동화를 읽으며 저 자신을 치유하였고, 함께 공부하는 문우들의 꿈을 보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숨겨놓았던 나만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설레고 기쁩니다. 물론 글이 당선되어 기쁜 건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기쁜 건, 마음 속 이야기보따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일 것입니다. 이제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습니다.

맨 먼저, 군포어린이도서관'창작동화아카데미' 문우님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거칠고 엉성한 제 글들을 진솔하게 같이 고민해주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처음으로 글이라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박경태 선생님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선생님으로 인해 동화라는 아름다운 문학을 알게 된 것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신 위로와 격려, 철학 안에 깊이 있는 글을 써야한다는 말씀, 늘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작년 초에 갑자기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에서 글은 저에게 큰 힘이 돼주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알고 남편이 보내준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소중한 선물을 지키고 키워나가겠습니다. 저에게 희망을 주신 매일신문과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1973년 서울출생.

  ●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TESOL학과 졸업. 

  ● 군포어린이도서관 '창작동화아카데미'수료.


 

  <심사평>


  "-"


밋밋하게 흐르는 강 보다 굽이쳐 흐르는 강이 더 아름답다. 산허리를 휘도는 물줄기가 바위절벽을 만들고, 소에서 용틀임치는 물이 흙과 모래를 옮겨 갈대밭과 습지를 품기 때문이다. 동화도 밋밋한 이야기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앞부분에서 주인공이 확실한 목표(동기)를 설정하고, 그 목표달성을 위해 펼쳐지는 사건이 갈등과 뒤틀림으로 꼬이면서 굽이치는 강물처럼 그렇게 아름다움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동화 작가의 능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은 정선옥의 '말하지 않아도' 윤슬의 '퍼팩트 워치' 강다현의 '괴짜 할아버지의 비밀' 정미영의 '완벽한 내짝꿍' 그리고 명은숙의 '늑대가 나타났다'이다.

'완벽한 내 짝꿍'은 전학 온 로봇이 짝꿍이 되면서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을 통계적 숫자로 제시함으로써 완벽함을 보여주지만, 너무 기계적이라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특히 사진처럼 그려낸 로봇의 그림보다 내가 싫어했던 영미의 그림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물질문명에 압도되는 현실에서 인간애를 조명한 수작이지만 미약한 갈등과 느슨해진 긴장감이 아쉬웠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서두에서 늑대의 야만성에 성범죄자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켜놓고, 버스를 타고 친구 집에 갈 때까지의 성범죄에 대한 과민반응을 다룬 작품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연이 삼촌을 중간 어딘가에 암시로 언급하지 못한 게 옥에 티였다. 그럼에도 시적 리듬을 탄 간결한 문체와 남다른 심리묘사로 펼치는 짜임이 깊은 내공을 헤아리게 한다. 큰 나무의 어린 싹으로 믿고 뽑으니 정진 바란다.

 

심사위원 : 김상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