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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인어공주 / 강필선


  동해안서 인어 발견

  인터넷에 동해안에서 인어가 발견 됐다는 기사와 사진이 공개 되었고, 이것은 실시간 검색순위 일위에 올라 있었다. 인어는 해운대 앞바다 1㎞ 떨어진 지점에서 출몰하였다고 전했다. 흐릿하게 찍힌 사진에는 분명 반인반어의 형체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 사진의 출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네티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댓글을 달아 내려갔다.

  '사진 합성이다.' '빛이나 그림자 효과일 뿐이다.'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다.' '병신.' '환경오염 때문에 돌연변이가 나왔을 것이다.' '인어고기는 어떤 맛일까?' '미친년이 수영하는 거다.' '고질라나 괴물도 만들어 지는 세상에 인어는 시작에 불과하다.' '어떤 사기꾼 짓이냐? 관심 받고 싶어서 별 짓을 다한다.' 등의 비슷한 내용들이 빠르게 업데이트 되고 있었다. 나는 네티즌들의 댓글 중 어느 하나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진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다만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단지, '인어'라는 것이 내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여자아이는 엄마를 잡아끌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는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흘러내린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나는 푸른색 형광등 빛 아래에 앉아 있었다. 색 바랜 불가사리 스티커는 이제 다 떨어지고 몇 개만 듬성듬성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나는 사장에게 자리를 바꿔주거나 꾸며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될 일이었다. 사정은 상어나 조개, 게나 고래, 그 밖에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달 전부터는 수족관이 문을 닫는다는 말까지 들리고 있었다. 사장이 다른 곳에서 사업을 망쳐 수족관이 넘어갔다는 것이 소문의 이유였다. 실제로 아침 저녁으로 수족관을 둘러보던 사장의 얼굴을 본지도 한참은 된 것 같았다.

  "엄마, 인어공주야."

  예전 같았으면 이런 손님은 전혀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게 더욱더 친절한 미소와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니까. 여자아이가 가리키는 인어공주는 비닐로 된 분홍색 꼬리를 입고 있었다. 꼬리보다 진한 분홍색의 긴 가발을 쓰고, 살구색 쫄티에 조개껍질 브라를 가슴에 걸치고 있었다. 진주 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이가 말한 '공주'와 나를 일치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만약 내 모습이 공주와 같다면 동화속의 여러 주인공은 실망할 게 분명했다. 같은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에 열 시간을 식사시간도 없이 앉은 자세를 유지했다. 물고기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쪽은 수월해 보였다. 통풍이 되지 않는 비닐속의 두 다리는 경직되었고, 허벅지 안쪽에는 오돌토돌한 수포가 생겼다 터졌다를 반복했다. 수포는 마치 선물상자에나 들어 있을 것 같은 뾱뾱이 같았지만, 이것이 터지는 순간은 기쁘지 않았다. 같은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은 허리의 힘을 동반했다. 일이 끝난 직후에는 허리를 굽히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몸이 어느 정도 풀어진 뒤에야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이것도 요즘 들어 증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피부의 증상 같지가 않았다. 직업병의 일종이랄까. 로션이나 연고를 발라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근육이나 신경, 혹은 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했다. 또한 이것은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 발생했다. 걷거나, 변기에 앉거나, 책을 보거나, 밥을 먹을 때도 같은 통증은 하체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인어 역을 맡게 된 것은 만원 때문이었다. 공과대학을 졸업한 나는 일 년 정도 취업준비 기간을 가졌었다. 대기업을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중소기업만 되도 취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당시의 내 경제 형편이 오랫동안 준비기간을 가지기에는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취업은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다. 괜찮은 기업은 이력서만 보고 내 능력을 판단하고 거부했다. 중소기업은 대부분 공장 쪽이었는데, 업무가 힘들 거라며 여자인 나를 받아 주지 않았다. 생활비에 쪼들리기 시작한 나는 아르바이트라도 구해 볼 요량으로 신문을 뒤졌다.

  행사 도우미 급구(초보자 환영)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

  ○○수족관 연락처 010-○○○○-○○○○

  내가 인어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 나는 하루에 한 끼만을 먹고 살았으니까.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위기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선택한 것이 인어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게 밥 때문에 性을 바꾸는 것과 같았다. 생계를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써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장은 수족관에서 인어는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며 한 달 이상 일하게 될 경우 일당을 만원 올려 주겠다고 말했다. 그 금액은 수족관 직원들과 비슷한 금액으로 아르바이트로서는 적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망설이지 않고 수족관에서 인어가 되기로 했다. 나중에 다른 직원들을 통해 알게 된 정보지만, 대부분의 인어 역을 맡은 여자들은 하루나 이틀, 오래면 일주일 안에 그만둔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인어가 되면서부터 몸으로 알 수 있었다. 내 다리는 비닐꼬리 속에서 하나로 붙여지는 듯한 통증을 삼년 째 느끼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며 내 옆에 섰다.

  여름에 인어가 되는 일은 더욱 곤혹스러웠다. 나는 사장에게 통풍이 잘되는 꼬리를 주문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조금만 기다려, 라는 말은 사장이 직원들에게 하는 입버릇이었다. 그리고 입버릇의 결과가 늘 그랬듯이 사장은 내가 요구하는 꼬리를 주지 않았다. 나는 그 해 여름부터 내 꼬리를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하루의 조금이라는 시간과 한 달의 조금이라는 돈을 투자했다. 시작할 때는 비닐보다는 좋은 것을 입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래도 하루의 절반가량을 입고 지내는 옷이었으니까.

  나는 조금씩 만들어 가는 꼬리에 애착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안에 만들어 입어보겠다는 계획은 벌써 이년 넘게 어긋나고 있었다. 다섯 가지 색의 가죽을 덧 붙였고, 단순한 비닐의 무늬를 그린 것이 아니라, 진짜 물고기 비닐처럼 하나씩 모양을 만들어 붙였다. 그 비닐 조각 하나하나 마다 투명 매니큐어를 칠해 윤기가 흐르도록 만들었다. 이제 남은 작업은 반짝이는 큐빅을 꼬리의 윤곽선을 따라 다는 작업뿐이었다. 내 꼬리는 어느 인어의 것보다 화려해야 되는 것 같았다. 꼬리를 만드는 동안 나는 편안했다. 마치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어로써의 업무가 끝나면 나는 짧은 머리가 된다. 옆머리는 귀를 절반 이상 덮지 않았고, 앞머리는 눈동자 위에서 하늘거렸다. 언뜻 보면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남성 아이돌 스타의 헤어스타일 같기도 하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젝스키스나 HOT의 스타일이 떠올랐다.

  나는 한 번도 머리를 길게 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 준비를 해야만 했다. 머리 모양뿐 아니라, 남성용 트렁크 팬티와 바지를 고집하고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 습관이 나를 왕따로 만들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스포츠 브라를 착용했다. 내게 가슴이 작다는 것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다행스런 일이었다. 브라를 안 입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는 겨드랑이나 다리에 제모도 하지 않았다. 머슴아, 남자새끼, 젠더, 변태 등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달기 시작한 별명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머슴아나 변태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이미 두 아이를 낙태시켰었다. 차가운 쇠꼬챙이가 어머니의 자궁을 난자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어머니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라도 내 배속을 도륙하지는 못할 테니까. 어머니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토록 아들을 바라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은 할머니의 유언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였다. 아버지는 딸들까지 교육 시킬 형편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집이 공부를 못 시킬 정도로 가난한 건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사고방식을 납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죽은 언니들은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다만 나는 그 살육의 장에서 변태로 태어난 것이다. 여기서 나를 지켜준 것은 자궁 속에서 양수를 나눠먹은 오빠의 존재였다.

  목사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를 어디서 어떻게 사귀게 된 것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가장 마지막까지 우리 집을 찾아준 사람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목사는 전도를 시도했고, 아버지는 용서받을 방법이 없을 때나 한 번 들리겠다고 답했다. 아버지의 대답은 늘 같았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오빠와 나를 임신한 후부터 목사는 매주 수요일에 우리 집을 찾았다. 목사는 기도했다. 아버지는 오빠가 건강하게 나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했지만, 목사는 두 아이의 생명을 축복하며 기도했다. 나는 나를 기도해주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오빠는 온전하게 육신을 유지하고 자궁을 빠져 나갔다. 갈기갈기 찢겨진, 토막 난 조그만 언니들과는 다른 배출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역시 남자의 탄생은 뭔가 달라도 다른 거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웃을 수 없었다. 수술실 안의 누구도 웃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내게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며 힘을 주고 있었다.

  오빠는 남자라서 그런지 울지 않았다. 나보다 작고 말라 보였다. 나란히 누운 내 모습이 부담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오빠는 수척했지만, 나는 3.9킬로그램이라는 우량아가 되어 있었다. 의사는 이미 배 속에서부터 오빠는 죽어 있었다고 했다. 누구도 오빠를 살리려는 처치를 하지 않았다. 소란스럽던 수술실에는 내 울음소리만 퍼지고 있었다. 텅 빈 어머니의 가랑이 아래에 서있는 아버지는 나와 오빠를 번갈아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그리스신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나는 그 중 제우스가 제일 좋았다. 번개를 휘두르며 세계를 지배하는 신중의 신.

  아버지는 내게 피아노와 미술 대신, 태권도를 배우게 했다. 항상 바지를 입었고, 머리는 스포츠형을 유지했다. 열 살 때까지는 항상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내게 자신의 등을 맡겼다. 아버지 앞에서는 투정부리거나 울어서는 안됐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내가 오빠의 피를 빨아먹고 태어난 놈이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때마다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 다만 소리가 나는 입을 보았고, 붉고 길게 말려진 혀와 깊은 동굴을 보았다. 실제로 아버지는 내가 오빠를 굶어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죽은 언니들의 원혼 탓이라는 뒷집 할머니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혼나는 나를 볼 때마다, 자신의 업보 때문이라며 자책했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통해 제우스와 형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호메로스 자신조차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제우스가 형제 중에 몇 번째 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고, 호메로스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서로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첫 번째로 포세이돈이 첫째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원천적으로 포세이돈이 가장 먼저 태어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제우스가 첫째라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태어난 제우스만이 아버지인 크로노스에게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다른 형제들은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인 크로노스의 배 속으로 들어갔지만 제우스는 먹히지 않고 계속 자라서 형제들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는 제우스가 신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뒷받침되었다. 나는 집안의 첫째이자, 외동이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 형제들의 존재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배 속에서 죽은 형제들을 생각한다면 나는 네 번째니까. 특히, 아버지는 내 생일이면 술에 취해 오빠만을 찾았었다. 나는 첫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를 두고 족보상의 혼란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호메로스라도 되는 것처럼, 나의 위치를 어디에 둘지 몰랐다. 그리고 결국, 나는 아버지의 교육방식에 순응하기로 했다. 남자가 되기로 했다. 아니 최대한 남자로 살아보기로 했다. 가장 강한 신인 제우스와 닮아지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김 씨는 밤 열두시가 되면 내게 문자를 보냈다.

  '잘자요~ 인어공주!!!'

  요즘은 김 씨의 문자를 통해 잘 시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문자가 온 것으로 미루어, 지금 시간은 열두시가 맞을 것이다. 꼬리에 큐빅을 다는 일은 앞의 어떤 작업보다도 신중해야 했다. 가장 외곽에 드러나는 부분일 뿐만 아니라, 비닐처럼 끝 부분이 가려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발광효과를 최대화 하면서, 지저분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큐빅들 사이의 간격이 중요했다. 나는 이 간격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큐빅 하나를 달 수 있었다.

  김 씨도 처음엔 내가 남자인 줄 알았다고 했다. 곱상하게 생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놈이 수족관에 들어왔다면서, 사장이 급하니까 인어로 남자를 다 쓴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는 수족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직원이라고 했고, 상어 역을 맡고 있었다. 상어의 쩍 벌린 입에 머리를 넣고 밖을 보았고 등에는 은빛 지느러미를 달고 있었다. 그는 수족관의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사진을 찍었다.

=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김 씨가 내 주위에 오는 횟수는 잦아졌다. 그는 업무시간에는 활발하게 수족관을 누볐지만, 가면을 벗으면 과묵하고 어깨에 힘이 없는 중년의 사내일 뿐이었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같이 살자고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마흔의 이혼남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김 씨는 단지 내가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것이 다듬기 귀찮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다. 힘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강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일종의 자격지심이라 여겼고, 친구가 없는 것이 수줍음을 모르고, 과장되게 털털한 척 하는 성격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로, 내게 심적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김 씨는 나를 몰랐다. 한 달 전 김 씨는 내게 반지를 하나 주었다. 결혼하자고 말했다. 나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김 씨의 생각 중 맞는 것이 있다면,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 나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처럼, 나는 인어 분장을 한 남자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애인이나 아내가 될 자신이 없었다. 그가 나를 진정으로 아끼는 것인지,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모든 것은 내가 완전한 여자였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나는 김 씨를 남자로, 나를 여자로 어떻게 견주어야 할지 따져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를 찾게끔 동기 부여를 한 사람이 김 씨다. 물론 그는 내 아버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다만 어렸을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다가왔고, 내게 청혼한 것이 내가 아버지를 찾는 이유가 된 셈이었다.

아버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자라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었으니까. 내게 남겨진 유일한 혈육이기도 하니까.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부산 어딘가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는 우연히 내게 다가왔다. 마치 내가 알아야 되는 것처럼, 운명적이면서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교회에서 단체로 수족관 관람을 나온 모양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내게 뛰어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 손을 꼭 잡은 목사는 우선 기도부터 했고, 내게 주님의 뜻이라고 덧붙였다. 나를 먼저 알아본 그는 오른쪽에 성경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말하기 전까지 누군지 알지 못했고, 인어 복을 입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가끔 말을 걸거나 엉덩이를 만져보는 남자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르르 떨며 혐오스러운 기분을 느껴야했다. 목사는 다짜고짜 내게 기도부터 했다. 그리고 나는 목사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를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그는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십여 년을 나를 기도해준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의 정체를 알아채고서야 나는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꼬리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김 씨가 급하게 쫓아오다가 내가 인사하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분장을 하고 있는 나를 단번에 알아챈 목사가 신기했다. 보통사람과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섬뜩하기도 했었다.

  목사는 아버지의 행방을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목사는 아버지가 부산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게 마지막이라고 말했고, 나는 네, 라고 답했다. 나는 목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목사도 기도가 끝나자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발을 돌렸다. 목사는 일행에게 섞이면서도 내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벌써 한 달 가까이 쉬는 날이면 부산을 찾았다. 아버지가 교회를 다닌다는 정보는 놀라웠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얼마 안 되서 떠난 아버지가 교회를 다닌다니. 그렇다면 아버지는 오래전 말하던 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일까? 아버지는 무슨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가득 찼다.



  먼저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부산의 교회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이름을 대 보았지만, 같은 이름의 사내들은 모두가 아버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부산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부산을 찾았다. 교회를 찾았고, 아버지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남자를 수소문 했다.

  새벽에 내 잠을 깨운 것은 엉덩이를 적시는 축축함이었다. 팬티가 찝찝하게 엉덩이에 붙어 있었다. 어떤 사전 징후도 없었기에 나는 짐작하지 못했다.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빠르게 시작 된 생리는 무방비 상태의 나를 덮쳤고, 내 속옷과 침대는 붉은 얼룩을 남겼다. 나는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피비린내의 흔적을 가진 시트와 속옷을 모아 욕조에 담아두는 일을 치러야 했다. 뜨거운 물이 핏자국 위에 쏟아지고, 욕실은 금세 수증기로 가득 찼다.

  나는 다시 잠들지 않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부산에 간다는 것은 서울에서는 제법 먼 길이었기 때문에 서두를수록 좋았다.

  내가 첫 생리를 한 것은 중학교의 첫 중간고사를 치르던 봄이었다. 어머니는 자궁암으로 이년 넘게 병원에 계시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룬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침부터 배가 아팠지만 나는 무시했었고, 결국 일이 난 것이었다. 누구도 내게 배란이나 월경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고, 나는 생리대가 뭔지도 몰랐다. 화장실에서 피를 본 나는 내가 엄마처럼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죽음이야 오랫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내 경우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시험시간을 놓치고, 나는 아버지가 보이지 말라던 눈물을 변기위에 앉아 서럽게도 흘렸다.

  담임선생님이 여자였던 것은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시험에 늦은 나를 찾아 화장실에 왔고, 내게 생리대 착용법을 알려주며 축하해, 라고 말했다. 나는 선생님이 무엇을 축하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남성용 트렁크에 생리대를 붙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팬티를 돌돌 말아 거의 삼각형의 모양을 만들어야 했다.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에 붙여둔 것이 떨어지지나 않을 지 걱정됐다. 우선 빨리 집에 돌아가야 했다.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내가 흘린 피는 여자로서의 탄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이 됐다. 분명한 것은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빠 피를 빨아먹고 태어난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오늘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오빠 피를 빨아 먹고 태어난 년이 되어야 맞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들을 소리와 엉덩이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집에 가는 길을 멀게만 느끼게 했었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엉덩이에는 땀이 난 것 같았다. 가랑이 사이가 쓸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나는 우선 아버지가 오기 전에 샤워를 했다. 그렇다고 숨길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선생님 말에 의하면 며칠은 이런 증상을 보일 것이고, 한 달에 한번 씩 찾아올 테니까. 나는 뭐 이런 게 다 있냐, 며 불만스런 표정으로 다리를 벌리고 피를 씻어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목사 친구가 몇 번 와서 밥을 사주고 갈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떠난 이유를 생각했고, 내가 여자가 됐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버지는 내가 남자이길 바랐으니까. 여자가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남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어찌 됐든 내 의지였다. 아버지가 없었지만 나는 여자로 살 수 없었다. 여자는 평생을 외로워야 할 것 같았다. 변기에 혼자 앉아 피를 흘리는 존재처럼. 의지로 안 되는 생리적인 것을 빼고서 나는 최대한 남자로 살았다. 태어나면서 나는 머슴아였고, 변태였으니까. 그러나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여자가 되는 일은 내 머리를 망치로 치는 듯한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었다.

  엉덩이에 기저귀 같은 것을 붙이고 집을 나섰지만, 어느 때보다 자신이 없었다. 단순한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서 여자 냄새를 맡을 것 같았고, 여자인 내가 싫어 더 멀리 달아날 것 같았다. 엉덩이에서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고, 내 가랑이 사이는 땀이 나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하자 김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딜 갔냐고 물었지만, 나는 바람 쐬러 나왔다고 말했다. 얼마 전부터 그가 초조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청혼 이후 내가 아무 대답도 없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김 씨의 목소리는 조금씩 무언가에 쫓기거나, 압박을 느끼는 것처럼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는 불안해했다. 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최대한 그의 마음이 상처 받지 않도록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김 씨는 내게 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거칠게 말했다. 욕설을 섞어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사장이 계속해서 월급을 미루는 것에 화가 난 상태였다. 간신히 연락이 닿았지만 곧 주겠다고 말한 후 끊어버렸다고 했다. 실제로 내 월급도 두 달 동안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김 씨나 나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얼굴 본지도 한참이나 됐으니까. 나는 김 씨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느낌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사장과 비슷하게 곧 들어오겠죠, 라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늦은 오후가 됐지만, 교회에서 아버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직 안 가본 교회가 많고, 부산이 넓다는 것은 내게 희망적이었다. 만나게 된다고 무슨 대책이나,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만나야 될 사람 같았다. 나는 서울에 올라가기 전 해운대를 찾았다. 숙박시설과 식당들이 줄을 잇고 있었지만, 붐비지는 않았다. 봄이지만, 제법 쌀쌀했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는 게 전부였다.

  나는 백사장에 서서 멀리 보았다. 혹시 인어를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어가 출몰했다는 일 킬로미터 지점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래도 나는 먼 바다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바다는 서서히 금빛 노을을 덮고 있었다. 바다가 이불을 덮고 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불이 꺼지고 바다는 잠이 들 것이었다.

  터미널로 향하는 1002번 버스는 빈자리가 없었다. 큰 가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터미널이 목적지인 승객들도 제법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맨 뒷좌석의 아줌마에게 가방을 치워줄 것을 부탁했고, 그 자리에 어렵지 않게 앉을 수 있었다. 버스는 조용했고, 모두가 앞을 보거나 졸고 있었다. 나도 새벽부터의 일정으로 피곤한 탓인지 눈이 감겼다.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느님이 있어 부모가 있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식입니다. 효도하십시오. 그러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실 겁니다……."

  버스 내의 승객들이 술렁였고, 잠에서 깼지만 얼마가지 못했다. 승객들은 말씀이라는 것을 전하는 사내를 무시하고 잠을 자거나 앞을 보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는 짧은 생애 동안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생은 짧습니다. 이곳을 떠나면 불지옥 속에서 살고 싶습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모든 걸 용서하십니다. 더 늦기 전에 용서를 빌고,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격양되어 갔다.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천국이라는 곳으로 잡아가려는 기세였다. 그는 덮어진 성경책을 왼손으로 꼭 쥐고 오른손만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버스 반동 때문에 사내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지만, 잘 버텨내고 있었다. 성경책은 귀퉁이의 검은 가죽이 벗겨져 갈색 안감을 뱉어내고 있었다. 머리는 제법 깔끔하게 빗질을 한 것 같았지만, 옷은 구겨져 있었고 혹한에나 어울릴 것 같은 갈색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군데군데 흰털을 덮고 있는 수염은 사내의 연륜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깊게 파인 입가의 주름에 침까지 하얗게 고여 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내의 입 모양이 낯설지 않음을 알았다. 길게 말린 혀는 갓 잡은 생고기처럼 붉었고, 목구멍은 컸다. 깊고 어두웠다. 나는 마치 진실한 신자라도 된 것처럼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사내의 소리에 따라 혀와 입술, 목젖과 주름이 같이 움직였다. 그것은 내가 오래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아버지도 그렇게 움직였었다.

  사내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두개골의 절반을 잘라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끊기자 승객들은 다시 잠깐 동안 술렁였다. 하던 말이 중간에 뚝 끊어진 것은 주위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사내가 나를 보았고 나도 피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몇몇 승객들이 나와 사내를 살피고 있었다. 중간쯤에 앉은 학생 두 명은 비웃으며 수군거렸고, 옆에 앉아 있던 아줌마는 가방을 꽉 쥐며 긴장하는 듯 보였다.

  버스의 이상한 분위기를 인식한 건 사내였다. 그는 먼저 시선을 바로 잡았고, 자세를 고치더니 코트를 만지고 성경책의 위치를 겨드랑이 사이에 고정시켰다. 엄지와 검지를 브이 모양으로 만들어 입가를 쓸어 내렸다. 입가에 고였던 침을 닦아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세기를 통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느님이 자기 형상.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다고……."

  사내의 눈이 붉게 충혈 되고 있었다. 목소리도 아까와는 달랐다. 끝까지 차분하면서 묵직한 톤을 유지했고, 속도도 짜여진 것처럼 일정했다. 버스의 반동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전혀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막힘없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관심이 없던 승객들까지 쳐다보도록 만드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승객들은 목소리 보다 사내의 눈물에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랫배가 저리면서 가랑이 사이로 뭔가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피 비린내가 생리대와 옷을 뚫고 코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내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진동 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자세로 말씀을 전했다. 나는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사내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정거장은 부산카톨릭대입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몇 무리가 버스 복도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섰다. 버스는 금세 북적거렸다.

  "아멘"

  사내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승객들의 머리 사이로 어렵게나마 사내가 소매를 눈가를 닦는 것이 보였고, 곧 그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 사내는 용서받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동해안의 인어는 가짜

  며칠 전 검색순위 일위라는 인지도를 얻었던 인어에 대한 소식이 다시 한 번 인터넷 뉴스에 등록되었다. 보도 내용은 서른 두 살의 남성이 만든 합성사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5년 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고, 단순히 '인어'가 세상에 있으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하다가 만들게 됐다고 진술했다. 사진을 만든 장본인은 자신이 만든 건 사실이지만, 유포시킨 적은 없다며 일부 사실을 부인하기도 했다.

  처음 사진이 올라왔을 때처럼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네티즌들이 뉴스 밑에 댓글을 달아 놓은 상태였다.

  '병신 장난까냐?' '그 나이 처먹고 그러고 싶냐?' '그렇게 사니까 백수를 못 면하는 거다.' '할 일 없지?' 등 대부분의 댓글은 그를 비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직 한 줄의 댓글만은 앞선 것과 내용이 달랐다.

  '인어란 거 실제로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있지 않을까요?'

  다수의 네티즌들에게 반기를 든 한명의 네티즌은 다음 희생자로 지목되었다. '그 새끼 마누라냐?' '너도 백수지?''병신들끼리 지랄들을 해라.' '너 그 놈이지?' 등 댓글의 거친 문장들은 멈출 줄 모르고 업데이트 됐다.

  나는 그 곳에 댓글을 달고 싶지 않았다. 거짓을 만든 남자가 피해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해자는 남자와 그의 편에 선 한명의 네티즌을 욕하는 다수의 네티즌들인 것 같았다. 더 이상 댓글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그 곳에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꼬리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꼬리를 가방에 넣고 출근길에 나섰다. 신발에 돌이 들어갔는지 발바닥이 자꾸 걸렸다. 이것은 요즘 느낀 통증과 비슷한 것 같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신발을 확인했지만, 깨끗했다. 걸리는 느낌은 점점 심해져 갔다. 따끔거리는 것이 양말에 가시라도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직장으로 향하는 버스정류장의 벤치에 앉아 양말을 벗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작은 조각이 내 발을 찌르고 있었지만 그것의 원인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정류장에서 양말을 벗은 채로 사장을 보았다. 그는 독일제 고급 승용차에 올라 신호대기를 받고 있었다. 신호등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고, 초조한 듯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을 떨고 있었다. 김 씨가 사장과 통화했다는 게 기억났다. 나도 사장에게 말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은 발이 신발을 구기고 올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했다.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양말을 신었다. "사장은 금방 괜찮을 거야, 곧 월급을 줄 테니까." 라고 말하겠지만 말대로 해주지 않을 테니까. 원래 말 뿐이었으니까.

  완성된 꼬리는 제법 무거웠다. 가방의 밑이 축 쳐졌고, 끈이 어깨를 조였다.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앉아만 있으면 되니까. 평소처럼 이른 출근을 했기에 아무도 없을 거라 기대한 수족관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다. 같이 일을 하던 직원들이 주저앉아 울고 있거나 소리를 질렀다.

  불가사리 역할을 하던 최 씨와 고래 역을 하던 이 씨가 보였다. 김 씨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나를 발견했고, 친절한 인사 대신에 욕부터 쏟아냈다. 그것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씨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 중 이 씨는 흥분한 탓인지 사투리로 문에 대고 소리쳤다.

  "염뱅할놈의 새끼, 만나기만 하믄 고놈의 햇바닥부터 뽑아블라니까. 잡히기만 해봐. 준다고 말은 뻔질나게 잘 하드만……."

  이 씨가 말하는 혀를 뽑아 버릴 놈은 없었다. 이미 독일제 승용차를 타고 멀리 가버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 차는 시속 300㎞를 달린다고 하니까, 우리는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그를 버스정류장에서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족관 문은 쇠사슬에 자물쇠를 걸어 굳게 닫혀 있었고, 폐쇄 사실을 알려주는 공문만이 붙어 있었다.

  내 월급통장은 두 달째 입금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도망간 사장을 잡지 못한 것은 단순히 양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무겁게 들고 온 꼬리를 입어 볼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쉬웠다. 삼 년의 '조금씩'이 누르는 듯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가방을 다른 어깨로 바꿔 매고 조용히 직원들 틈을 빠져 나왔다.

  직원들은 내가 사라진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이제 그들을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씨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휴대전화를 꺼내는 순간, 문자가 도착했다.

  "너에게 지쳤다. 반지 돌려줄래?"

  문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받았던 반지는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발의 통증은 심해지더니 다리 전체가 쑤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무릎의 힘이 자꾸만 빠져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가방은 더 무겁게 날 눌렀고, 발바닥은 뜨거웠다. 다리에서 바늘이 돋는 것 같았다.

  "이번 정류장은 부곡시장입니다."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만나러 간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했었다. 일부러 출입문이 잘 보이는 앞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시장에서 버스가 멈추자 허리가 굽은 노파가 힘겹게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보다 큰 보따리를 밀어 넣는 노파는 힘겨워 보였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를 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앉은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노파는 버스 안을 살피기도 힘겨운지, 보따리를 끄집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뒷자리에 앉은 노파의 거친 숨소리와 생선의 비린내가 내 감각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 헝클어진 머리털을 내 옆으로 쑥 내민 노파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나는 "바다에 간다."고 짧게 답했다. 이번에 노파는 웃음을 띠며 물어왔다. 노파의 틀니에 낀 사다리꼴의 고춧가루가 보였다. "총각 혼자 놀러 왔는가 보네." 노파는 처음부터 나를 남자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차창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노파는 이후에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을 스스로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낮의 바다는 은빛이었다. 그물을 치면 갈치 때가 올라 올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스타킹처럼 파도가 돌돌돌 말리고 펴졌고, 조개처럼 하얀 거품을 뱉어내고 있었다. 백사장에는 파도의 흔적들이 등고선처럼 이어졌고, 나는 그 곳에 발자국을 찍었다.

  나의 몸은 뜨거웠다. 하체는 혈액순환이 안 되는 듯 저려왔다. 더 이상은 서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몸이 무거웠다. 옷이 나를 조이는 것 같았다. 외투를 벗었을 때 증상이 호전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 탓으로, 나는 몸의 이상 증상은 단순히 옷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바다를 향해 서서 신발을 벗었다. 하나씩 하나씩. 겉옷을 다 벗어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생리대를 붙여둔 팬티뿐이었다. 작은 젖가슴의 유두가 유난히 봉긋하게 도드라졌다. 나는 내 몸에서 빠져 나오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전의 것과는 달랐다. 단순히 비리거나 역하지 않았다. 바다의 짠 냄새와 갈대 잎을 만지는 것과 같은 촉각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 바다의 염분 섞인 공기가 썩어가는 것을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몸은 한결 편안했고, 가벼워져 있었다. 나는 발뒤꿈치로 모래를 파기 시작했고, 필요한 깊이를 파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팬티를 내리자 하얀 생리대에 흡수된 검은 혈흔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났다. 나는 팬티를 모래 속에 묻었고, 피가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고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꼬리는 햇볕인지 물결인지를 받아 더욱 빛나고 있었다. 오색 가죽은 매니큐어 때문에 반짝였고, 빛이 반사되어 바닷물에 비춰지기까지 했다. 수면에 무지개 같은 것이 그려졌다. 나는 옷 대신에 꼬리를 입었다. 내게 맞춰진 옷이기 때문에 꼭 맞았다. 꼬리를 입자 서 있을 수 없었고, 나는 주저앉았다. 전방 1㎞는 보이지 않았다. 인어도 보일 리 없었다. 그 지점이 어디인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 곳이 간절하게 보고 싶었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꼬리로 밀면서 바다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가죽의 무게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힘들었다. 꼬리가 모래에 묻히면서 길이 생겼다. 바닷물이 손바닥을 덮었고, 엉덩이에 차더니 목까지 차올랐다. 물속에서는 확실히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수영을 했다. 손을 뻗고, 꼬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더 멀리, 멀리. 나의 몸은 가벼웠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몸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사진을 찍는다면, 인터넷 검색순위에 오른다면, 네티즌들은 이야기 할 것이다. 또 장난친다고. 그러나 나는 장난이라고 생각한적 없었다. 한 네티즌처럼 인어는 진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사진의 주인공이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른다.

  바다는 내게 편안함을 주었다. 하얀 물방울들이 눈에 맺히기라도 하는 듯 시야가 볼록해졌다. 나는 수면 깊은 곳으로 꼬르륵 잠수하고 있었다.


<당선소감>

   "저의 것'을 배설하는 수단"

  당선 통보를 받았던 순간, 매섭기만 하던 겨울 바람이 저를 공중에 띄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바람이 육체를 휘감았을 때, 저는 잠시동안 처음 경험한 어색함을 벗어나려는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 바람이 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했습니다. 창작은 제 삶의 일부로서 항상 저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것은 '불안'이라는 그림자를 달고 있었습니다. 소설은 저를 몸서리치도록 외롭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창작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뇌의 시간을 극복하고 이뤄 낸 한 편의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쓴 뒤의 카타르시스는 오래 묵은 것을 시원하게 배설하는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소설은 '저의 것'을 배설하는 수단입니다. 배설하지 못하는 인간은 죽습니다. 저는 소설이 있기에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제가 어떤 자리에 있든 간에 창작은 멈출 수 없는 행위입니다. 매일 화장실을 가듯, 저의 창작은 지속될 것입니다.

  제 소설을, '저의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기회가 생겨 기쁩니다. 저는 이 기쁨을 저의 연인이자 스승인 청명이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제게 소설쓰기의 길을 안내해 주고 쉽지 않은 길을 같이 걸어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청명이에게는 '고맙다.' 보다는 '축하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녀가 가진 사랑과 믿음은 축하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평소 표현이 서툴러 부모님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멀찍이서 마음으로 후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사랑은 항상 제 마음 한 켠에서 난로 같은 존재였습니다. 힘들 때마다 응원과 격려를 보태준 누나들과 조카들이 있었기에 삶의 태도가 긍정적일 수 있었습니다. 넓은 가슴으로 제 소설을 읽어주신 이승우 선생님. 예리한 지적 속에 울고 웃으면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 속에서 희망을 찾아주신 한승원 선생님, 문학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주신 나희덕 선생님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인내할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신 김형중 선생님, 전성태 선생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유아입니다. 앞으로 걷고 달려서 선생님들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문인이 되겠습니다.



  ● 1985년 전남 나주 출생

  ●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중


  

  <심사평>

  "불안한 내용,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집

  심사를 마치고, "소설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그 자신의 규범을 갖고 있지 않다"는 바흐친의 주장을 상기해본다. 소설에는 어떤 확립된 틀도 없으려니와 그래서 소설은 늘 변전하는 양식이라는 뜻이리라. 우리의 현실이 변화 중에 있으니 거기에서 이야기를 취하는 소설도 변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예선을 거쳐 올라온 8편은 청년 실업, 가족 공동체 붕괴, 성 정체성 혼란, 고용 불안, 계층 갈등, 몰가치적 세태, 부박한 연애, 사기와 횡령 등 모두가 부정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다. 각기 그 소재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불안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불안의 시대가 소설을 '불안소설'로 변전시키는가?

  다소 불안한 심기를 다스리면서 다음 다섯 편을 골랐다.

  「곤충채집」(한상도)의 경우 룸쌀롱 접대원의 변신과정과 곤충표본 작업을 대비하여 몰가치한 세태를 비꼰 점은 그런대로 설득력을 지녔으나, 인물의 성격화에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결말처리도 좀 상투적이다.

  「노블 클럽」(이은미)과 「숨」(지형서)은 공히 직업적 일상과 배우자와의 심리적 갈등관계를 대비하는 구조로 짜여졌다. 안정된 문장력이 심리 묘사를 받치고 있고 가족공동체 붕괴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소품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차미숙)의 경우, 청년실업이라는 묵직한 내용을 밝은 문체로 이끌어가는, 또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청년들의 심리 상태를 부박한 연애라는 가벼운 호흡으로 처리하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서의 반전이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려면 앞의 사건들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인어공주」(강필선)는 앞의 네 작품이 다루고 있는 부정적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거기에 성정체성 혼란과 고용주의 횡포 문제도 건드리고 있어서 '불안'의 백화점이라 할만하다. 이 작품의 장점은 그런 불안한 부정적 내용들을 '인어공주'라는 낭만적 이미지로 결집해내는 아이러니 효과가 돋보인 점에 있다. 게다가 주인공의 죽음은 그런 효과를 다시금 아이러니컬하게 함으로써 결말에 이르러 중층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 작품 역시 단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불안 내용들을 하나로 꿰어가는 구성 과정이 조금은 불안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다소 불안한 구성'이 다양한 불안한 내용을 낭만적 이미지로 결집해내는 역할을 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송하춘, 임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