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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단말들의 사막 / 이윤훈

 

눈물이 사라진 곳 사막이 자라난다

풍화된 말에 덮혀 잠귀 어두운 길

눈을 뜬 붉은 점자들 혓바닥에 돋는다


금모랫빛 말들이 줄을 이뤄 쌓인 언덕

전갈이 잠행하는 미끄러운 행간 속에

슬며시 꿈틀거리며 입을 벌린 구렁들


눈물샘 깊은 데서 오래 맑힌 말들

발걸음 자국마다 한 그루씩 심어놓아

파릇한 수직의 빛들 방사림을 이루고


신열 오른 말들이 아른대는 신기루 속

물 냄새 맡은 낮달 사막을 건너간다

어디서 선인장 피나 마른 입 속 뜨겁다




  <당선소감>


   "절제-자유의 조화 익히기까지… 이제 시작이다"


여느 때처럼 걷는다. 일터에서 집까지 한 시간 남짓 길을 구부리고 구름다리에 올라 먼 곳을 끌어들이며 휜 골목으로 기어들어 베트남 사람들 틈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쌀국수를 먹는다. 오늘 같이 바람이 찬 날에는 이만한 것도 없다. 한적한 카페로 자리를 옮겨 여느 때처럼 아무 일 없었던 양 차를 마신다. 양손을 연꽃잎처럼 옹그려 따끈한 머그잔을 감싼다. (온혈동물은 온기로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갑자기 가슴에 파문이 인다. 정오의 당선소식이 해거름에 다시 물고기처럼 불쑥 뛰어오른 것이다. 스무 해 전 시조가 처음 내게 왔을 때 시가 그랬듯 그 일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내 삶의 불가해한 비약이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후로 지금까지 헛발을 딛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먼 길을 왔다. 그러나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구속되지 않는' 절제와 자유의 조화를 익히기까지 아직 멀다. 이제 시작이다.

뭇 얼굴이 떠오른다. 늘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엄경희, 정수자, 염창권, 박현덕, 김유, 윤하 선생님, 독자를 자청한 이유경 작가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종종 안부를 물어오는 동창과 시벗들, 먼 길 떠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은 가족들, 모두 소중하게 다가온다. 설된 작품을 선뜻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손 모아 예를 표한다. 새해에는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는 서설이 내렸으면 좋겠다.


  ● 1960년 평택 출생
  ●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하노이 KGS 국제학교 교사


 

  <심사평>


  말의 세상… 실험적이면서 철학적 사유 거느려


신춘문예 심사는 보물찾기 같은 작업이다. 오래 정성 들여 보내온 작품을 읽는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설레기까지 한다. 미래의 일꾼 아니, 바로 내일의 일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읽어갔다. 처음 눈에 든 작품들은 「‘목련’이라는 새」 「어떤 수사학」 「을숙도에서」 「꽃패」 「말들의 사막」 「정지에서」 등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을 살피면서 작품 수준이 지나치게 고르지 못한 것, 외래어를 남발한 것, 소재나 주제가 이미 너무 익숙해진 것, 기성의 기법을 비판 없이 모방한 것, 긴장감이 없는 것 등을 중심으로 가린 끝에 마지막 2편이 남았다. 「‘목련’이라는 새」와 「말들의 사막」이었다. 서정성이 잘 발효된 전통적 작품과 깊은 사유를 거느린 다소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어느 것을 뽑아도 손색이 없다고 느껴져서 오랜 시간 숙독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그 결과 올해의 영광은 이윤훈 시인의 「말들의 사막」에 얹어주기로 했다. 실험적이고 철학적 사유를 거느린 이런 작품 경향이 우리 시조발전에 더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말의 순기능과 역기능 혹은 말의 지시적 기능과 서정적 기능 속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의 세상이다. 말이 주는 기쁨, 말이 주는 상처, 말이 주는 희망, 말이 주는 증오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니까 일방적인 말, 진정성을 잃어버린 말, 서정이 결핍된 말은 세상을 사막이 되게 한다. 말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고 말에 대한 각성이 필요한 이 시대, 그가 그린 상상력은 아름답고 가치 있을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적 외침으로 유효하다고 보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대승을 빈다.

심사위원 : 이우걸, 이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