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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만유인력 / 양승수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재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 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당선소감>

 

   "민슬기, 권미양… 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델이라는 영국 가수가 컴백 콘서트를 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싶었다고 한다. 너에게서 내가 모르던 나를 발견하고 너의 상처가 나의 용기가 되고 너의 용기가 나의 기쁨이 되고 네가 지나친 너를 귀띔해준다. 너로 하여 시간이 휘고 거리도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를 먹이로 먹고 사는 종족인가. 어떤 슬픔으로 벌어진 입은 잘 닫히지 않는다. 입맛을 쩍쩍 다시며 어쩌면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 벌어진 입을 그곳에 버려두고 다른 입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벌어진 채 버려진 입에 와 닿는 것들의 맛을 느끼게 된다. 아니 그보다 벌어진 입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달고 걸어간다. 도망치려고 뛰어가면 그 소리가 더 커진다.

  살금살금… 우리가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그 사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읊조린다. 내 상처에 아무리 약을 발라도 낫지 않던 것이 너의 상처를 어루만져 나아가는 임상을 겪으며 어디가 상처였는지 깨닫게 되기를 밤 하늘에 흩뿌려본다. 알 수 없음과 실패라는 축복까지.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별은 기억해주리라. 어둠은 속삭여 주리라.

  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내 친구 민슬기 뚜벅뚜벅 권미양 김병용 모스부호 노치성 김희섭 김경수 신애영 박경만 환한 서영채 최두섭 임철우 최수철 주인석 높은 먼먼 나희덕 안도현 박남준 복효근 이희중 가파른 장창영 한정화 최기우 미소 짓는 김의수 뜨끈한 전성진 섬세한 꾸준한 튼튼한 함한희 이정덕 예리한 윤중강 조명환 멋진 박윤지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본다. 맑은 비스듬한 화사한 포근한 숯검댕이 먹먹한 그렁그렁한 무던한 칼칼한 글썽글썽한 부르지 않아도 서운타 않을 빛이 빚임을 안다. 길이 아직 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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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뉴튼 사과와 이 시대 일상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당

  시는 언어예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언어가 박제된 문장으로만 남아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언어는 화자의, 그리고 시인의 목소리가 실린 '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말이 살아 독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독자의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시인이 되고자 꿈꾼다는 것은 또 언제나 이 언어와 말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사람의 새 시인을 찾기 위해 1,000편이 넘는 응모작을 만났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증이 시 쓰기에도 가위 누르기를 한 까닭일까, 전반적으로 활기차고 패기 넘친 작품보다는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또 상투적인 언어와 생경한 이미지의 나열로 인해 박제화 되어버렸거나, 최소한의 형상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기억과 일상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는 응모작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일차 걸러낸 후 남은 작품들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심사자의 감식안을 시험한 응모작에는 오랜 숙련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작품도 있고,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읽어낸 작품도 있었다. 홍여니의 〈를리외르〉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책 제본 과정에 빗대어 쓴 작품이었다. 그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묘사와 진술을 중첩시킨 어법에서 몇 군데 억지스러운 이미지가 정서적 몰입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고경자의 〈끈의 방식〉은 직장인의 삶의 방식과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내면서 체험과 사유를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 부분에서 시적 긴장이 유지되지 못한 채 느슨하게 풀려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응모작은 최형만의 〈새들의 삽화〉와 양승수의 〈만유인력〉이었다. 두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삼아 무방할 시품을 갖추고 있었다. 〈새들의 삽화〉는 언어를 다루고 시상을 직조하는 능력이 대단히 숙련되고 단단하였다. 굳이 흠을 잡자면 그 단단함 때문에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활달함이 덜 느껴졌다는 것이다. 고민 끝에 〈만유인력〉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거기에는 인간 존재의 무게와 삶의 부피를 응축시키는 상상력의 힘이 있었다. 뉴튼의 '사과'와 이 시대의 '일상'이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특히 꽤나 긴 호흡으로 끌고 간 작품인데도 끝까지 시상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점이 앞으로의 시적 성취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다. 당선인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 김동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