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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숨비들다 / 고은경

  소라들이 알을 낳는 동안에도 엄마는 쉬지 않았다. 6월에서 8월은 소라 산란기이자 해녀들의 금채기였다. 한쪽의 숨이 트이기 위해 다른 한쪽은 숨을 돌려야 했다.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지면 엄마는 밭일에 매달렸다. 다시 물질하러 다닐 때 먹기 좋을 소라젓과 마늘지도 담갔다. 때로는 서해 쪽으로 해삼 채취에 나섰다. 어떻게든 물질을 이어가야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기에 부득부득 자리를 얻고자 했지만 실력 좋은 상군 삼촌들에게 밀릴 때가 많았다.

  소싯적엔 상군 중의 상군이었다는 엄마가 수심 10미터의 중군 영역으로 밀려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눈썰미 좋고 손이 빨라 상군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리곤 했으나 깊은 바다에 부려온 기억들을 떨쳐내진 못하는 듯했다.

  엄마는 방학을 맞아 내려온 나보다 바다를 더 무시로 건너다 보았다. 돌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며 바람이 자다는 둥 물때가 됐다는 둥 불쑥 말을 꺼내곤 했다. 엄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움직이는 바다가 보였다. 들뜨는 듯 부푸는 듯 잔물결이 굼실거렸다. 어서 올라가 네 할 일 하라고 채근하는 누구처럼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들통의 물이 끓어올라 문어를 집어넣었다. 넘칠 듯 부르르 거품이 일었다. 뚜껑이 들썩거리는 통에 꼭지를 잡고 있어야 했다. 엄마의 기운을 북돋울 뭉게죽은 방학 때마다 내가 한 번씩 준비하는 보양식이었다. 불그레해진 문어를 찔러보는데 문기척이 났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이 큰 게 뭐냐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털며 부엌 밖으로 나가자 엄마 허리까지 오는 상자가 보였다.

"이게 무싱거냐? 느가 산 거가?"

"내가 주문했어. 제습기라고, 습기 빨아들여서 건조하게 해주는 기계야. 서울에선 많이들 써. 여기도 너무 습하니까 한 대쯤 둬야 해."

"느 모르커냐? 어멍은 물에 들어강 이실 적이 반이여. 쓸데어신 짓을 해신게. 축축한 거는 무신 축축한 거. 사방이 물이고 습긴데 이걸 어떵허코. 물렁(무르면) 안 되는 거?"

  용돈을 건네면 바닥에 패대기치는 엄마라서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고른 건데 역시나 순순히 받으려 하지 않았다. 무르긴 왜 무르냐고, 보송보송해져서 좋다고, 물통 차는 거 보면 깜짝 놀랄 거라고 되받아쳤다. 엄마는 엄마대로 이런 덩치 없이 잘 살아왔건만 좁은 집에 꼭 들여야 하냐며 성화였다. 학교 선생 봉급 가졍(가지고) 쓸데어신 걸. 부엌으로 돌아서는데 엄마의 눅진한 말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오늘 오후 …경 제주시에 여행 온 …살 …씨 모녀가 실종됐습니다. 텔레비전 뉴스 한 도막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달군 냄비에 문어를 넣자 촤아아 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기름이 튀었다. 수도꼭지 찬물에 팔뚝을 들이밀었다. 휘이, 휘이이. 물소리 사이로 숨비소리가 섞여들었다. 물 밖으로 올라온 언니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맴돈 지 오래였다. 고향 집에 머물 때면 더 자주 들렸다. 이젠 언니가 말 걸어오는 것 같아 아무 때고 들려도 거리낌 없을 정도였다.

  냄비 속이 복작복작했다. 다시 주걱을 잡고 문어를 뒤적거렸다. 언니도 먹고 싶은가 보네 하고 되뇌었다. 어렸을 때 내가 빨판을 흘기며 질색하면 이 맛있는 걸 못 먹는다고 핀잔주던 언니였다. 물속에서 흡착력 강한 뭉게 다리에 콧구멍이 막힐 뻔했으면서도 케이크 같다고, 아니 훨씬 맛나다고 칭송을 했다.

  찬은 엄마가 담근 마늘지였다. 죽 한 숟갈을 뜨자 바닷물을 뜬 듯 비린내가 끼쳤다. 아무래도 문어를 잘못 삶은 탓이었다. 엄마는 별말 없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숟갈질을 계속했다. 언니의 숨비소리와 엄마의 죽 먹는 소리가 번갈아 여울졌다.

"먹고 나갔다 올게. 대학 선배가 일이 있어서 왔는데 비자림 가보고 싶다네. 구경 좀 시켜주려고."

"소나이(남자)야?"

  엄마가 마늘을 써걱 씹었다.

"응, 남자 선배.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어. 제주도는 세 번짼데 아직도 비자림을 못 가봤대."

"고향이 어디랜햄시니?"

"서울인가, 수원인가."

"도시 사람달믄게(도시 사람인가 보네). 경허믄(그럼) 됐져."

  엄마는 섬사람은 안 된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딸이 지난한 섬 생활에서 벗어나길 바란 까닭도 있지만 외항선을 탄 남편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엄마 못잖게 물을 밝혔던 아버지는 엄마가 잡은 해산물을 운반하거나 중국 어선이 못 들어오게 감시하는 일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 번 나가면 두어 달 있어야 집에 들르더니 내가 태어난 뒤에는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언니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한테서 풍기던 짠내, 아버지가 손에 쥐여 주던 일제 카라멜, 아버지가 들려주던 바람의 고마움과 매서움을 언니는 지나가듯 풀어놓았다. 엄마의 억센 욕보다 그런 이야기가 와닿던 시절이었다. 아방은 무능하고 쩨쩨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비밀 아닌 비밀을 바닷바람 사이로 날려 보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운 엄마 곁을 지킨 건 무엇이었을까. 언니마저 잃고 나서야 오롯이 깨우쳐졌다. 아버지 없이 일궈온 엄마의 바당밭에 대해서. 엄마는 살기 위해 숨을 참았다. 죽자고 하는 일인지 살자고 하는 일인지 헷갈릴 때 더 힘껏 자맥질을 했다. 누구는 서방과 싸우고 물속에서 운다는데, 서방 머리 같은 전복에 빗창을 찔러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질을 마친 뒤 천 근 같은 해산물 망사리를 끌고 돌길을 걸을 때에야 죽어 나자빠질 것 같았다. 망사리 들어주는 서방을 둔 동료들이 부러워서, 그 부러움이 기막히고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딸들만은 못 하게 하리라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물질을 배우겠다고 나선 언니를 막을 순 없었다. 내가 갯바위에 걸터앉아 엄마를 기다릴 때 언니는 고무옷도 없이 엄마 뒤를 따랐다. 공부보다 그 일이 좋다고 했다. 기특하게 여긴 해녀 삼촌들이 고무옷과 테왁을 선물하자 언니는 웃었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면 움직이는 바다가 보였다… 들뜨는 듯 부푸는 듯 잔물결이 굼실
  휘이, 휘이이, 물소리 사이로 숨비소리가 섞여들었다
  무엇이 언니를 욕심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영 모를 일

  엄마와 언니가 물에 들어가면 나도 숨을 멈추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볼 작정이었다. 내 얼굴이 벌게지는 동안 바다는 별의별 빛깔의 자태로 갯가를 보아 넘겼다. 검다가도 푸른, 잿빛이다 은빛이 되는, 누렇다가도 금실처럼 너울거리는 바다가 이물스러웠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숨을 토하면 둘은 아직도 물속이었다. 붉은 깃발이 꽂힌 엄마의 테왁과 큼직한 꽃이 수놓인 언니의 테왁이 물결에 넘놀았다.

  엄마가 올라온 지 한참이 지나도록 언니가 감감하던 날이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은 온화하기만 했다. 숨 참기도 하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대는데 오늘 참 맨도롱하다(따스하다) 싶었다. 네 언니 못 봤냐고 엄마가 고함칠 때까지 그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이 언니를 욕심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영 모를 일이었다. 엄마가 중군으로 밀려난 까닭만이 확연했다. 더 이상 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에도 엄마는 기어이 물질에 나섰다. 단단해지고 또 단단해지는 엄마를 지켜보는 게 꺼림칙했다. 껌으로 귀를 막고 허리엔 납덩이를 찬 어멍을 바다가 끝 모를 곳으로 데려갈 것 같았다.

  죽 좀 더 자시란 말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문어가 바다의 인삼 격인 전복을 먹는 놈이니 오죽 맛이 좋냐 하면서도 물질 전후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많이 넘기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양쪽 어깨를 번갈아 두들겼다. 물에 못 들어가서 안 아픈 데가 없다고 했다. 안마해 주려 손을 올리자 이내 간지럽다고 뿌리쳤다.

"나신디는(나한테는) 바당이 최고여."

  입에 배어 굳은 말을 하며 엄마가 일어섰다.

"아멩(암만) 잘 아는 사람이라도 조심허여. 경헌(그런)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허는 법이여."

  엄마에겐 부모도, 서방도 해주지 못한 걸 내주는 바다보다 간이나 보고 내빼기나 하는 사람들이 훨씬 께름칙한 존재였다.

  엄마의 낡은 아반떼를 몰고 나섰다. 세화에 들를 생각이었다. 제주 바다는 넓고 사람마다 꼽는 해수욕장도 제각각이지만 내겐 세화리 바다가 각별했다. 울적하면 그려보는 곳, 실은 울고 앉아 있기 싫을 때 더 찾게 되는 곳이었다. 비자림과 멀지 않아 들렀다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늦더라도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실종 사건 이후 어수선해진 탓에 인사가 늦고 말았다. 라디오를 틀자 어김없이 그 뉴스가 흘러나왔다. 종적을 감췄던 여자아이가 해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귀를 곤두세우는데 은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분위기 뒤숭숭하지? 인터넷에 아이 찾았다는 기사 떴더라."

"엄마는 아직 못 찾았나 봐. 아이랑 같이 바닷가로 갔다던데…."

  어디냐고 물어보니 선배는 우리가 이미 아는 곳이라며 곧 비자림으로 건너갈 거라고 했다.

"저녁에 다금바리 먹으러 갈까? 진짜 제주산 쓰는 집으로."

  특산물이긴 하지만 워낙 고가여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취직 턱을 내겠다는데 말문이 막혔다. 모교 교직원 채용에 합격한 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 모습이 순진하면서도 속없어 보였다. 학술 심포지엄 때문에 왔다면서 관광할 시간이 나는지도 의문이었다. 갈치 맛있는 집을 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차창을 조금 열었다. 휘이이, 휘이. 숨비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창틈을 넘나들었다. 밖으로 보이는 해면의 한 지점이 칼치 등처럼 번뜩였다. 소라 잡지 맙서예, 바당에 저축허게마씸. 어촌계에서 내건 플래카드가 방호벽 위에 나부꼈다. 꼭 화난 사람들처럼 '육짓것'이라고 내뱉는 삼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선배와 나는 역사교육과에서도 같은 학회였다. 술 마시며 난상토론할 일이 잦았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상생 같은 거시적인 화두부터 국사교과서의 표지 같은 지엽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티 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를 갖춘 선배는 보통 남자들이 지닌 괄괄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여성항일운동에 대해 말할 때도 누구보다 섬세한 입장이었다. 최초이고, 최대였어. 1차 시위 때 삼백 명, 2차 시위 때 천여 명이 호미 들고 빗창 세워 막아서니까 일본인 제주도사가 줄행랑을 쳤대. 그러고 나서 잡혀간 사람들은 몸이 비틀리는 고문을 당해야 했지만. 시위 전에 모여 섰던 해녀들의 뒷모습 사진을 봤었어. 등에 아이가 업혀 있고 양식 보따리가 걸려 있는데, 그건 어떤 투사의 앞모습보다 결기가 넘쳤어. 섬에서 초중고를 나온 내가 제주 해녀들의 투쟁을 알게 된 건 은수 선배 덕분이었다.

  그가 일러준 자료들이 있었지만 바로 찾아보지 않았다. 과제 때문이든 학회 때문이든 향토사를 접할 때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여성운동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섬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이곳 사람들은 허가 없이 육지로 드나들 수 없었고 육지 사람과 혼인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엄마가 육지 사람, 도시 사람을 만나라고 성화를 부릴 정도가 됐으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세월은 현무암 몰골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꺼멓게 굳어버린 난항의 궤적. 공부가 곧 그것을 헤집고 흉터마저 들추는 행위 같았다. 항파두리의 삼별초부터 이재수의 난을 거쳐 48년 4월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되짚고 있으면 직접 겪어오지 않았음에도 돌아가고 돌아가 검은 돌에 꼬라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2005년 제주는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나는 유의미하면서도 손쉬운 선포라고 느꼈다. '평화의 섬'은 너무 점잖은 말이었다. 바다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이국적인 풍경인 양 바라보기나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도 닮아 있었다. 평화는 무슨 무슨 연구를 하고 센터를 세우고 포럼을 연다고 해서 사람들의 내면에 차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다친 곳이 돌에 눌리다시피 하며 장아찌처럼 절여지고 곰삭혀진 기억들이 있는데 바다가 가로막는 것인지, 바람이 발목 잡는 것인지 짱돌들은 걷히지 않고 있었다. 내가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돌 치우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상식적인 사회를 위해, 균형 잡힌 안목을 길러내기 위해 적당히 알맞춤하게 안내하는 일로 여겨질 뿐이었다.

  잘해야 하는데. 언니 만날 때 나 이만큼 살았어 할 정도로는 해봐야 하는데. 엄마는 내가 완전히 떠나길 바랐다. 담임이 권유한 대로 서울 소재 대학에 가라고, 서울에서 직장 잡고 나긋나긋한 서울 사람과 결혼해 살라고 했다. 여긴 들락날락 안 해도 되컨게. 명절이고 자시고 비행기 탕(타고) 오멍(오느라) 돈지랄 할 거 없다. 나 역시 기왕 가는 거 촌사람 태를 벗어던지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올 필요 없다는 말은 좀 서운했다. 여기 안 오면 어딜 가. 요즘 저가 항공도 많은데 뭘. 엄마는 테왁 천에 난 구멍을 기우느라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하루아침에 서울 사람 되커냐. 허기사 이 어멍 똘(딸)인디 무신건들 못 하겠냐만 여기서 놀멍 지낸 세월만큼 거기서 사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안으커냐. 이제 느 수발들기도 힘들고. 남은 인생 물질이나 허멍 살고 싶어.

  세화 바다는 엄마의 태도만큼이나 무심하게 움직였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비구름과 맞닿은 수평선조차 스산했다. 가까운 세화오일장터의 휑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1931년 그곳에 해녀들이 운집했던 걸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해 장이 서던 날 해녀들은 사력을 다했었다. 근수 속이지 말라고, 조합비 매기지 말라고, 일본인 도사가 조합장까지 해먹지 말라고, 일본인 상인은 빠지라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응한다면 죽고 말 거라고 외쳤었다. 어릴 적 언니와 내가 엄마를 쫓아 구경 다니던 그 장터에서였다.

  뭘 모르던 우리였다. 매일이 아니라 5일에 한 번이어서, 그나마도 엄마가 나서야 따라갈 수 있어서 설레기만 한 나들이였다. 장터에 이르자마자 몽생이(망아지)들처럼 뛰어다녔다. 청과전 앞에서 제일 빨간 사과 고르기 시합을 했다. 리어카에 쌓인 가요 테이프를 살피며 아는 가수 이름을 찾아내기도 했다. 의류전에 걸린 옷들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났지만 어쩌다 원피스 한 장이라도 건질 때면 냄새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건 돌아가기 전에 하는 외식이었다. 메뉴는 항상 멸치국수와 오징어튀김이었다. 이름 있는 날만 고기국수와 돔베고기를 시켰다. 식당의 어느 자리에 앉아도 옥빛 바다가 마주 보였다.

  엄마는 먹을 때 말이 없었다. 언니와 나도 비슷했다. 오직 국수 빨아올리는 소리와 튀김 씹는 소리만이 우리의 탁자를 들두드렸다. 너무 곱닥헌(예쁜) 바당을 보면 뛰어들고 싶어. 언니가 먹는 와중에 했던 몇 마디 중 한 구절이었다. 그 말 사이사이로 국수 가락이 떨어져 내렸다. 오징어튀김이 한 개 남으면 뒤늦게 시끄러워졌다. 나는 작고 어린 내가 더 먹어야 한다고 고집부렸다. 언니는 언니대로 물질 배우느라 지친 자신이 임자라고 우겼다. 그제야 엄마가 혀를 차면서 반 갈라 먹어 치우라고 목청을 높였다. 느네 둘 다 안 먹젠 허믄 어멍이 먹으켜!

  바다는 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쪽에서 어떤 일들이 너울대는지, 휘이이 소리가 언제 터져 나오는지, 이명 같은 소리는 어느 물줄기서부터 들려오는지도. 요 바당으로 튀었다 저 바당으로 튀는 내 생각들을 한 방울로 수렴한다면 무엇이 남을지, 얼마나 짤지, 그것마저 알지도 몰랐다.

  비자림 앞에 도착했을 땐 구름이 한결 짙어져 있었다. 은수 선배가 입구 안내판 앞에서 서성이다 손을 번쩍 들었다.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가 입은 체크무늬 셔츠에도 구김살이라곤 없었다.

"방학하니까 좋지? 얼굴이 폈네."

"그런가? 선배 얼굴이 더 좋아 보여."

  여름의 숲은 깊고 어두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들이 우짖었다.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들이 머리 위를 가로지르면 꼭 나무들이 비명 치는 것 같아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휘이. 미지근한 바람이 목덜미를 감았다. 선배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이렇게 하면 향기가 난다던데.

  껍질을 벗기려 했으나 그의 손은 빗나가기만 했다. 휴대폰에 달아놓은 펜던트로 내가 대신 긁어주었다. 한 꺼풀 벗긴 나뭇가지를 코 밑에 갖다 대자 귤 냄새가 올라왔다. 진짜네. 선배가 야단스럽게 킁킁댔다. 앞서 걷던 사람들이 흐린 날 숲길이 좋다고 한마디씩 했다.

  정수리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졌다. 빗방울인가. 머리를 젖혔더니 나무와 나무, 또 다른 나무가 닿아 만들어진 초록의 타래가 보였다. 물속에서 너풀대는 수초들도 저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비자나무 잎들이 밀리고 쓸리며 파도 소리를 냈다.

"나 장터 갔다 왔어. 세화오일장터."

"정말? 나도 세화 들렀다 왔는데."

  우리는 둘 다 눈을 크게 떴다.

"아침 일찍 일어났거든. 학회 때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 가봤는데 장 안 서는 날이더라. 간판 아래 해녀 조형물만 보고 왔어."

"상상이 안 가지? 거기에 그 많은 해녀들이 모였다는 게."

"한 번 발도장 찍은 걸로 얼마나 선명하게 복원할 수 있겠어. 그래도 의미심장하더라. 뜻이 뭉쳤던 곳엔 그 기운이 계속 남는 것 같아. 사람은 떠나지만 뜻은 머물러 있는 거지. 어떻게 행진하고 구호를 외쳤는지 고스란히 느끼진 못해도 그분들과 같은 자리에 서봤다는 사실 자체가 난 좋았어."

  선배의 얼굴에 뿌듯한 표정이 어렸다. 그 얼굴을 받친 반듯한 셔츠 칼라가 눈에 들어왔다. 빨아서 탁탁 터는 것만으로는 저런 각이 안 나올 텐데. 너무 단정한 나머지 못 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옷 다려서 입어?"

  기어이 선배를 장터 밖 현실로 불러내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셔츠를 한번 내려다보곤 씩 웃었다. 펄에서 게를 잡아 기분 좋은 아이 같았다.

"여동생이 다려줘. 주말에 일주일 치를 다려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다."

  비 몇 방울이 더 떨어졌다. 선배가 갖고 있던 우산을 폈다. 그의 동생이 왜 옷을 다려주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힘들까 봐 그럴 수 있었다. 오빠를 끔찍이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선배의 흰 운동화 앞코에 흙탕물이 튀었다. 얼룩이 졌어도 비 내리는 숲길을 걷기엔 여전히 말쑥해 보였다.

  어느새 연리목 앞이었다. 사랑 나무, 부부 나무라고도 불리는 그 나무와 맞닥뜨리자 선배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두 나무가 한 나무가 되느라 맞닿은 부분이 갈라지고 비틀려 있었다. 그렇긴 해도 숲에 있는 나무들의 수령이 대부분 500년을 넘어 어떤 나무든 연리목처럼 보이는데 선배에겐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무끼리 붙은 흔적을 찾듯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뗐다.

"큰 줄기가 맞닿으면 연리목이고 나뭇가지가 붙으면 연리지라더라. 뿌리가 만난 경우는 연리근이고. 저렇게 두 나무가 연결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린대. 그냥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강하게 압박하느라 무지 고통스럽다는 거야. 껍질은 깨지지, 맨살은 맞부딪혀 갈라지지. 그런 다음에야 둘이 섞여서 함께 살아갈 공간이 생긴다는데. 인간관계도 그렇잖아. 시간을 들이고 아픔도 주고받고 해야…."

  공부를 해온 것 같았다. 교사는 이분이 됐어야 해.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배가 나를 흘끔 봤다. 한 우산 아래여서 숨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 듯했다.

"그런 건 낭(나무)이니까 허주 사람이 어떵허젠(어떻게 해)?"

  선배가 멈칫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굵어진 빗발이 우산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너… 화났어?"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화는 무슨. 나무는 나무고, 사람은 사람이니까. 그냥 그렇다고요."

  숲을 돌고 나오니 옷이 꽤 젖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우산이 뒤집혀 푹 젖었다. 택시로 왔다는 선배를 엄마 차에 태웠다. 어쩐지 기운 빠진 모습이었다. 내가 교직원 생활은 어떠냐고 묻자 할 만하다고 했다. 대기업 다니는 동기들도 부러워한다고 덧붙일 때야 비로소 홍조가 비꼈다. 그가 다금바리를 먹으러 가자고, 아니면 갈치라도 먹자고 거듭 권해왔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힘들다고 답했다. 그저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이명처럼 들리는 휘이 소리 때문에 옆 사람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중문관광단지의 호텔 앞에 그를 내려주었다. 또 보자며 웃는 얼굴이 만날 때보다 그늘져 있었다.

  해안도로로 들어서자 비를 품는 바다가 펼쳐졌다. 엄마는 뭘 하고 있을까.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잘 리는 없고, 해녀의 집에 가서 해산물을 손질하거나 음식 조리를 거들 것 같았다. 라디오 뉴스를 틀었다.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로 잿빛 바다가 일렁였다.

  이제 물질 그만두고 서울 가서 살자는 말에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었다. 아직도 느 어멍을 경(그렇게) 모르커냐. 물에 안 들어가면 어멍이 잘 살 것 같으냐. 엄마가 물질한 시간만큼 나도 애들을 가르칠 거라고,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엄마랑 쭉 살 거라고 하자 코웃음을 쳤다. 바당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육지 사람들이 못 보는 곱닥헌 것들을 보지만 전복 욕심에 죽을 수도 있고 상어에 물릴 수도 있어. 는(너는) 이제 시작이잖아. 몸 가볍게 허영 걸어야지.

  동부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데 성산일출봉이 자태를 드러냈다. 마치 테왁을 붙잡고 떠 있는 해녀의 등허리 같았다. 물살에 몸을 맡기는 모든 것은 머리를 낮추기 마련이었다. 물때와 바람에 순응하고 힘을 빼야만 했다. 더 좋은 물건들이 있다 해서 타고난 숨길을 거슬러선 안 됐다. 휘이 소리가 긴 꼬챙이처럼 양쪽 귀를 뚫고 지나갔다. 바다 위에 엎드린 일출봉이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받아내고 있었다.

  가라앉은 언니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내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달았다
  두 나무가 연결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린대… 무지 고통스럽다는 거야
  나를 괴롭혀온 것은 그 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언니는 엄마처럼 상군이 되고 싶어했다. 노력하면 될 거라고, 엄마와 같은 바당밭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욕심내다 뒈진다는 삼촌들의 엄포보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본다는 언니의 포부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 어멍 바당으로 가. 언니가 그렇게 말할 때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다운 계획이었다. 언니의 숨이 길어지는 만큼 언니의 망사리와 이야기보따리는 한결 풍성해지리라.

  언니가 내 귀에 대고 비밀이라 못박았다. 엄마는 물론 어떤 삼촌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며 힘주었다. 어른들이 알면 물질을 아예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아버지 이야기와 달리 진짜 비밀이었다. 고무옷을 챙겨 입는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내가 언니를 밀어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가라앉은 언니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내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달았다.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은 지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모한 잠수부에겐 입 무거운 동생보다 서슴없이 고자질하는 동생이 있었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후회가 사무쳤다. 비밀이란 말이 소름 끼치게 싫어졌다. 그딴 건 깨라고, 누설하라고, 동네방네 떠들라고 있는 건데 왜 입을 다물었을까. 바다를 따라 깊숙이 내려가면 총천연색으로 어룽지던 빛깔들이 사라져 검고 칙칙한 색들만 남는다고 상군 삼촌들이 말했었다. 그러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나는데 그 절벽 아래엔 바다 괴물의 뱃속 같은 심연이 도사린다고 무서운 옛이야기 들려주듯 으름장을 놓았었다. 보지도 못한 그 세계를 확인시켜준 사람은 바로 언니였다.

  다시 이명이 일었다. 머리 꼭대기가 찡 울리더니 반으로 짜개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세화의 파도가 높았다. 풍랑이 거센 잿빛 바다에 자비라곤 없어 보였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물결을 추어올렸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바다에 뭔가 떠 있었다. 검고 둥근 형체가 사람 머리 같았다. 단지 머리인지 고무옷을 뒤집어 쓴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도로 밑으로 내려갔다. 젖은 돌길이 가팔랐다. 울퉁불퉁하다 못해 모지락스러웠다.

  검은 물체는 물살에 실려 잠겼다 뜨길 반복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 이수광? 소리를 질렀지만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해경과 어촌계장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주머니를 뒤지다 발이 미끄러졌다. 검은 돌들이 팔뚝과 무릎을 강타했다. 넘어진 쪽은 나인데 가격을 당한 듯 아팠다. 왼쪽 새끼발톱이 뒤집혀 피가 배어나왔다. 붉은색을 보자 정신이 났다. 재차 본 바다 위엔 바람과 파도뿐이었다. 이런 날씨에 누가 저길 들어간단 말인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랄 맞은 두통도 가신 뒤였다. 차로 돌아가니 실종된 아이 엄마를 찾지 못했다는 뉴스가 반복되고 있었다. 와이퍼의 동작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른 쪽에서 빠졌으나 조류를 타고 여기까지 흘러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헛것을 본 거라면. 휴대폰을 든 채 잠시 망설였다. 냉정하게 생각할 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릇된 판단으로 애먼 사람들을 고생시킬 수 없었다. 빗물이 머리칼을 타고 줄지어 떨어졌다. 덥고 습한 와중에도 알알한 한기가 어깨를 스쳤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야트막한 지붕을 줄로 묶고 그 지붕까지 돌담으로 에워싼 우리집을. 흔한 모양새여도 쉽게 지나쳐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고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산 집이었다. 내겐 언니와 복작이다 언니를 먼저 보낸 나루터였다. 엄마에겐 옹이가 박힌 채 흠집을 늘려온 통나무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몬딱(다) 잠수병 때문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물질도 하지 않는 내가 이명에 두통에 흐린 시야까지 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돌담길 옆에 차를 세웠다.

  엄마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마당의 물웅덩이를 비췄다. 문을 열자 텔레비전 앞에서 죽을 떠먹는 엄마가 보였다. 아침에 남은 뭉게죽이었다. 오랜 기간 수압에 노출돼온 엄마는 귀가 많이 어두웠다.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듣지 못했다.

"나 와수당."

  엄마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앉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막 헤어나온 듯했다.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나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죽그릇 속에 조각난 문어 다리들이 떠다녔다. 방 안 가득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엄마가 입을 앙다물며 내 등짝을 힘껏 쳤다.

"지지빠이(계집애)야, 어딜 쏘다니다 지금 기어 들어왐시니. 꼬라지는 또 이게 무싱거고. 세상에, 피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데다 팔뚝과 다리에 긁힌 자국들이 선명했다. 한차례 넘어진 탓에 흙모래 알갱이가 몸 여기저기 들러붙어 있었다. 뒤집힌 발톱에서 흐른 피로 장판 위엔 붉은 무늬가 생겼다. 엄마가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느 무신 일 이서시냐?"

"일? 비 좀 맞고, 넘어지고 그랬지."

"그 소나이랑 무신 일 치른 건 아니고?"

"치르긴 뭘 치러? 비자림 간다고 말했잖아."

"숲엘 무사(왜) 간, 영헌(이런) 날. 사람도 얼마 어서실 텐디. 일부러 느 불러낸 거 아녀?"

"무슨 소리야. 거기만 한 바퀴 돌고 헤어졌다니까. 저녁까지 먹자는데 됐다 그랬다고."

"근데 무사 영(이렇게) 늦엄신고? 뉴스에서 사람 실종됐다고 떠드는디 걱정을 안 햄시니. 여기도 마냥 안전한 데가 아니잖여. 정신 똑바로 차려야 허여."

"그거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잖아.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서른도 넘은 자식을 이런 식으로 걱정해?"

"안 하면. 꼴은 영 되영(돼서) 뭘 잘했다고. 오늘 본 그 소나인 못쓰컨게. 지지빠이를 이 꼴로 돌려보내는 놈은 더 볼 거 어신게."

"노망났어? 별일 없었다니까. 차 타고 오다가…."

"그만 고라(그만 얘기해)! 애들 가르치는 게 몸 파는 지지빠이 같이…."

  엄마가 말을 멈췄다. 일그러진 얼굴이 떠난 아방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아방과 붙어 살 누군가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한마디 언질 없이 바다보다 깊은 곳으로 가버린 딸을 좇는 듯도 했다. 그렇지만 얼마나 후회하려고 저런 말을 하나. 잠자코 문어 다리를 쏘아봤다. 온통 젖은 딸에게 수건은커녕 막말이나 퍼붓는 엄마였다. 무엇을 돌려줘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명이 울렸다. 모든 것이 지겹게 느껴졌다. 나를 괴롭혀온 것은 그 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나 감수다. 강(가서) 안 오쿠다. 엄마 혼자 삽서. 나보다 죽은 언니가 중요하지? 그래서 독하게 물질허는 거꽈? 잘 알아지쿠다(알겠어). 그렇게 언니 끌어안고 삽서. 난 못 말려. 이제 안 말리쿠다."

  붉은 자국을 밟으며 방을 나왔다. 엄마 얼굴은 보지 않았다. 작은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덜렁거리는 발톱을 잡아뗐다. 대충 소독한 뒤 연고를 발랐다. 빠진 자리에 한 번은 새 발톱이 날 것이다. 문을 닫고 제습기를 틀었다. 습도를 알려주는 표시부에 형광빛 숫자가 떴다. 엄마가 언니를 보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물에 들어간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요를 펴고 드러누웠다. 휴대폰이 웅웅거렸으나 내버려두었다. 엄마 방의 텔레비전 소리가 배에 실린 듯 건너왔다. 이대로 자도 될까 싶은데 혼곤히 잠이 왔다. 사람 머리처럼 검은 물체가 파도를 따라 넘실댔다. 끝도 없이 짠물을 먹으며, 그러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나는 그것을 뒤따랐다.

  눈을 떴을 때 집 안엔 나 혼자였다. 아침을 지나 거의 점심 무렵이었다. 선배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괜한 소릴 한 것 같다는 메시지도 함께였다.

  연리목 앞에서 청산유수로 말하던 그가 떠올랐다. 숲 해설가 해도 되겠다고, 다음엔 오일장에 가보자고 답을 보냈다. 제습기에서 꽉 찬 물통을 뺀 뒤 방문을 열었다. 비 갠 하늘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돌담 너머의 바다가 말갛고 눈부셔서 어제 일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샌들에 묻은 피는 빗물에 씻겨 있었다. 축축한 신발을 꿰어 신고 바닷가로 향했다. 오늘 바당은 어제 바당이 아니지. 지금 저 바당은 그때 그 바당과 다르지. 이것은 언니에게 건넨 말이었다. 내가 나한테 당부하는 말이기도 했다. 봐, 이젠 섬 한쪽에서 큰 군함이 왔다 갔다 해. 바다 건너 온 사람들이 뱃일이며 양식장 일에 뛰어들기도 하고. 어디까지 품을까, 바다는. 품는 것 같다가도 사정없이 뱉어내거나 삼키는 게 일인데.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떼선 안 될 것 같아.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는 저곳을 지켜보고 또 지켜보는 게 한몫이야.

  바닷물에 발을 담근 아이와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발 장난만으로도 즐거운지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 꼭 파도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같았다. 잡히지 않는 사연들이 포말을 이루며 퍼져 나갔다. 모두 아는 일이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건 흔쾌히 거뒀다 미련 없이 밀어 보내는 파도였다. 그 대화를 알아들은 사람처럼 한동안 붙박인 채 서 있었다. 수평선 근처에서 물결이 설렌 듯했다. 지금은 고요하지만 언제 태풍이 몰려와도 이상할 것 없었다.

  집 앞에 다다르자 뭔가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담 안쪽으로 깔린 평상에 상이 놓여 있었다. 보리밥 한 그릇에 엄마가 키운 푸성귀와 된장, 미역국과 계란찜으로 단출히 차린 밥상이었다. 미역을 널듯 빨래를 널어 나가는 엄마도 보였다. 뭐라고 말 붙여야 하나. 젖은 옷이 걸릴 때마다 출렁이는 줄을 곁눈질하며 잠시 고민했다. 엄마의 걸걸한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난 아까 먹었져. 혼져(빨리) 먹어라."

  어제 벗어놓은 옷이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엄마의 속옷과 내 속옷, 엄마의 고쟁이와 내 추리닝이 두서없이 나부꼈다.

"어멍 태안 가기로 했져. 느 현오 삼촌 알아지커냐(알지)? 그 양반네 누구 초상이 나서 재기재기(급히) 내려와야 한단다. 대신 가게 됐져."

  엄마의 검정 티셔츠와 검정 고쟁이를 붙여놓으면 위아래가 이어진 고무옷과 구별이 안 될 터였다. 다른 때 같으면 내 방학 어떡하냐고 한소릴 했겠지만 지금은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머물당 가든지, 올라가고 싶으면 재기재기 올라가고."

  거침없이 다부진 뒷모습이었다. 촘촘히 걸려 있는 빨래들에 눈길을 주자니 어제 나를 닦아세우던 엄마가 얼마나 엉성했는지 믿기 어려웠다. 국 한 수저를 뜨는데 부엌 찬장 어딘가에 있을 차롱이 아른거렸다. 그걸 찾아 도시락을 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보리밥을 담아야지. 밭에서 상추, 고추도 따고. 된장과 젓갈은 새지 않게 꽁꽁 싸야지. 엄마는 뭘 이런 걸 쌌냐고 하면서도 한 끼 값을 아끼기 위해 챙겨 갈 것이다.

  먼바다의 어디쯤 내 시선이 가닿는 데서 뭔가 올록볼록 솟아오르려 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엄마가 물질하러 간 사이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수업 틈새에라도 배치할 섬의 자취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귀에 익은 숨비소리가 들리면 언니도 궁금한가 보네 하고 이야기해줄 작정이었다.

  실종된 여성이 바닷가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어느 바다인지 듣지 못한 것은 진행자가 그 부분을 너무 높거나 낮게 말한 까닭이었다. 엄마가 딸아이를 안고 바다로 향했으리란 추정이 이어질 때 우리 둘 다 손을 멈췄다. 오늘의 바다는 청초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얻거나 잃어놓고도 파르라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끝>

 

  <당선소감>

 

   "또 다른 세계를 꾸려갈 때 비로소 나와 내가 맞붙었다"

  이 지면에서 수정 언니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기쁘다. 우리 둘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언니를 기억하며 <숨비들다>를 쓰고 고쳤다.

  수정 언니를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다. 그런 가운데 잘 살아야 한다고, 잘 살아보자고 힘을 내곤 한다.

  말하는 재미보다 쓰는 즐거움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고백하건대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가까운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새 소설을 구상하거나 이야기 짓는 작업의 희열이 그 괴로움보다 컸다.

  조금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또 다른 세계를 꾸려갈 때 비로소 나와 내가 발 디딘 곳이 맞붙었다.

  하성란 선생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선생님과 함께 소설을 쓰는 동안 읽는 사람의 눈을, 쓰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대해 배웠다. 내내 믿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만큼 더 나아간 글로 보답하고 싶다.

  소설가로서의 나이를 세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그 나이가 드는 걸 반가워하며 꾸준히 쓰겠습니다.

  이런저런 작가가 되자고 다짐 나눴던 은영,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시은 언니, 같은 글을 읽고 또 읽어준 은아. 고집 센 자식한테 늘 져주신 엄마 아빠. 혼자 써야 하지만 한편 혼자 써낼 수 없는 것이 소설이란 걸 이제는 압니다.

  빈틈 많은 아내의 꿈을 한결같이 지지해온 김희상에게 고맙습니다. 다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연아야, 네가 있어서 엄마는 계속 할 수 있었어. 다독가 연아도 손에서 놓지 않는 그런 작품을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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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꾸민 흔적 없이 자연스레… 제주 고둥의 언어로 표현"

  소설이 대설이 아닌 까닭은 거창한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창하다는 말에는 여러 풀이가 있을 테지만 뜻이 많거나 강하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그리고 소설의 영어식 표현은 픽션이다. 허구지만 거짓말과는 달라서 잘 만들어낼수록 읽는 이들이 좋아한다. 잘 만든다는 말은 꾸며낸 이야기이되 꾸며낸 이야기 같지 않았을 때 듣게 되는 칭찬이다.

  당선작 '숨비들다'는 꾸민 흔적이 없다. 힘써 말하지 않는데, 그럼으로써 오히려 이야기는 어느새 높은 파도가 되어 읽는 이의 마음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애써 뜻을 전하려다 보면 그 대상을 분명히 하려하고 따라서 윤곽이 지나치게 뚜렷해지며 생경해질 수밖에 없는데 '숨비들다'는 바다 이야기와 가족의 삶이 스푸마토의 연속성을 띠며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소설에서 걸어 나올 것 같은 엄마라는 인물, 그리고 바다에 대한 남다른 경험을 제주 고둥의 언어로 표현해내는 솜씨 때문일 것이다. 모녀실종사건을 통해 나와 엄마 사이의 긴장을 조절하는 가 하면 제주 해녀의 역사를 배경에 두어 면면히 이어지는 거친 삶의 구원성을 슬쩍 비추는 요령도 갖췄다.

  무엇보다 가족을 삼킨, 끝내 알 수 없는 바다와도 함께 살아가야 하듯이 이해와 사랑뿐만 아니라 오해와 원망도 삶을 구성하는 원소라는, 물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점이 돋보인다.

  '도미노의 사회학'의 공력도 만만찮다. 페인트 회사 유튜브 채널 론칭의 첫 작품으로 선보이기로 한 도미노 게임에 참가한 아르바이트생들이 어떤 사회적 소속도 없을뿐더러 도미노 시연이 끝나는 대로 흩어져야 할 한시적 신분이라는 점을 문제적 시각으로 착안하여 다룬 수작이다.

  '쓰러짐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도미노'라는 아이러니의 진실이, 현재로서는 쓰러진 형편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어떤 삶의 변곡점이 되어줄 수 있을지 기대하게 만드는 소설인데, 제목도 그렇고 도미노가 가진 역설의 뜻에 너무 기댄 나머지 안타깝게도 불필요해 보이는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말하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살을 기도하며 더러는 그것에 성공하는 로봇 청소기 얘기라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아린의 연산'이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이 로봇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와 함께 진행되는데 아린의 이야기에도 아내를 잃고 자살바위를 찾은 관석이라는 인물이 병치된다. 썩 잘 된 구성임에도 어째서 자주 '과연 이런 로봇은 몇 년 뒤에나 가능할까?'라는 궁금증이 독서를 방해하는 것일까.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미래 서사가 매혹적이고 흥미로운 만큼 그에 상응하는 정교함, 즉 독자의 어설픈 궁금증을 일소시킬 개연성의 치밀함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응모자 모두에게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구효서, 최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