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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빈 세상을 넘어 / 나규리

  오랜만에 말바우 시장을 찾았다. 코로나를 핑계로 계속 미뤄온 귀향이었다. 판매하는 물품의 종류만 다를 뿐 비슷한 표정을 가진 상인과 손님이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짙은 억양과 험한 표정으로 흥정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눈가를 휘며 덤을 챙겨 줬다. 오늘 같은 장날이면 코로나와 상관없이 인파는 더 몰렸다. 시장길에는 축산물 센터에 매달아 놓은 고깃덩이 냄새, 수산물이 품고 온 비릿한 냄새, 말린 고추와 산야초의 텁텁한 냄새가 났다. 그것들은 걸을 때마다 서로 얼기설기 엉겼다. 봄에는 모종을 사러 온 손님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더디지만 그만큼 생기가 돌았다.

  부모님은 시장 어귀에서 40년째 손두부 집을 운영했다. 가게에서는 늘 두유 냄새가 풍겼다. 이 장사는 호황도 없지만, 불황도 없었다. 두부와 콩물이 유명한 곳. 부모님은 직접 키운 콩으로 만든 두부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팔아왔다. 손님들은 소포장이 된 콩이나 비지의 부피를 눈으로 쟀고, 몇몇은 고개를 쭈뼛 내밀어 남은 콩물의 개수를 손으로 세기도 했다. 아버지는 김이 채 식지 않은 두부를 능숙하게 전용 용기에 담고 밀봉했다. 용기에 곧바로 더운 김이 서렸다. 옆에서 아르바이트생인 훈은 아버지가 밀봉해준 두부를 팔았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도 포장하는 손을 멈추지 않고 왔냐는 말 대신 시큰둥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어머니는 상가 안쪽에 두부를 받쳐 놓고 그 옆 평상에 걸터앉아서 콩을 분류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머니도 평상에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오랜만에 보는 아들에게 인사한 셈 쳤다. 부모님은 이제야 한숨 돌리고 있을 터였다. 두부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건데 언제까지 할 수 있겠냐고 앉자마자 불평했다.

"이짝 일이 원래 심깨나 드는 일이여."

  어머니는 심드렁하게 말하다가 아버지가 있는 쪽을 흘깃 바라봤다. 어머니는 못 본 사이 비슷한 연배보다 빠르게 늙어 있었다. 두부 장사 덕에 없던 살림이 더 어려워지진 않았지만, 더 나아지는 법도 없었다. 그간 우리 가족은 두부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을 먹고 살았다.

"엄마 나이도 생각해야지. 권리금이라도 건질 수 있을 때 가게 팔아서 투자하면 기회비용이 얼만데……."

  어머니는 못 들은 척 어깨로 귀를 비볐다. 예전부터 답하기 곤란한 일에는 꼭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무덤처럼 쌓인 꼬투리를 매만졌다. 오전 내내 만든 두부 채반에서 빠져나온 물이 타일 줄눈을 타고 서서히 배수구를 향해 길을 냈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같이 고르던 콩을 잠시 내려두고 밖을 바라봤다. 부모님은 장날이면 훈을 불러 아르바이트를 시켰다. 훈은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두고 왜 여기서 일을 하는 걸까? 일찍이 상경하지 않았다면 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제대로 된 학원 한번 다니지 못한 채 독학으로 서울 쪽 대학에 입학했지만, 첫 학기부터 학점은 좋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했다. 졸업 후에는 전공과 무관한 몇 군데의 중소기업을 다녔다. 야근과 특근을 병행해도 먹고살기 빠듯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더 늦으면 꿈도 꿀 수 없을 것 같아서 모아둔 적금을 들고 노량진 고시원으로 향했다.

  길게 잡아 2년 생각하고 들어갔지만, 연이어 낙방했고 수험 생활은 1년씩 연장됐다. 아내도 그 학원에서 만났다. 나보다 더 열악한 상황인데도 확신에 찬 모습과 1원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야무진 생활력에 끌렸다. 만약 그해에도 낙방하면 나 또한 물류센터에 가서 상하차 업무라도 하리라 다짐했었다. 시골로 내려오는 것은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태가 아니고서야 선택지에 넣지도 않았다. 그 사이 아내가 먼저 공무원이 됐다.

"나 임신이래."

  공부는 미뤄두고 합격 수기만 찾아 읽고 있는 내게 아내는 초음파사진을 보여줬다. 처음에 그것은 먼 우주에 있을법한 행성의 표면 같았다. 그리고 그 작은 점은 점점 우리의 우주가 됐다. 서둘러 식을 올렸다. 합격만 빼고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아들의 이름은 민우였다. 하늘 민(旻) 넉넉할 우(優). 평생 넉넉한 삶만 살게 해주고 싶었다. 아들에게 콩 비린내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합격 의지를 불태웠다. 혼곤히 잠든 아내와 뒤집기도 어려워하는 아기를 보면서 단칸방 한쪽에 작은 조명등만 켜두고 밤새워 공부했다. 세무공무원 9급에 합격해서 임명장을 받은 게 불과 4년 전 일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내 합격 소식에 7급이냐고 되물었고 나는 처음 몇 번은 고개를 저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공무원이 되기 위해 수년을 바쳤지만, 결과적으로 철밥통일 것 같았던 공직이 내게는 치수가 크거나 작은 옷이었고, 시간이 지나도 업무에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기피 부서만 주어진 것도, 그런 상사를 만난 것도 내 팔자려니 했지만, 그렇게 눙치기엔 최선을 다했던 시간이 생각나서 억울했다. 출구가 이미 단단히 응고되어버린 두부 속에 갇힌 것처럼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적성이 맞아 업무 효능감을 느끼는 동기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질감의 땅을 밟고 있는 기분이 들었고, 치열한 경쟁 구도는 수험생 시절과 다를 바 없었다. 상관의 말은 곧 법이었고 동기들은 인사평가에서 내가 물리쳐야 할 경쟁자였다. 아내는 나와 직군은 달랐지만, 공무원이 꽤 적성에 맞았고 육아휴직을 썼음에도 무사히 복직했다. 물론 육아휴직 기간을 다 쓰지는 못한 채 복귀를 해야 했지만…….

"그 인간들이 나를 완전 이 콩처럼 갈아 쓰더라니까."

  어머니는 내 하소연에 콧방귀만 뀌었다. 눈처럼 녹아버린 퇴직금 얘기를 꺼냈을 때도, 카드사 독촉문자에 초조해하는 나를 보고도 일관되게 그랬다. 부모님은 점점 나이 들고 쇠약해졌다. 나중에 가게를 물려받아도 두부를 만드는 사람이 나일 리는 없었다.

  세상에 안 그러는 부모가 없겠지만, 아들 민우에게만큼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민우가 막 태어났을 때 반 뼘도 안 되는 녀석의 발에 입을 맞추며 자상한 아빠가 될 거라고 다짐했다. 민우가 태어나던 날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말했다. 그곳에 있으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도 분했다고.

"다 엄마 아빠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일 그만하고 취미생활만 하면서 살면 좋잖아."

"느그 아부지랑 왜 평생 두부 맹그는 줄 몰라서 허는 소리여?"

  안다. 알고 있다. 배운 기술이 두부를 만드는 것뿐이라 각자의 고통을 상기시키는 두부를 만들면서 평생 시장의 일부처럼 살지 않았던가.

  콩 자루가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무게였던 시절, 나는 고기 대신 두부로 단백질을 채우며 자랐다. 사람들은 내 이름 대신 두붓집 아들이라고 불렀고, 두부는 모서리부터 조금씩 부서져 나와 내 삶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열 살 생일 때였나. 부모님이 케이크 대신 두부에 초를 꽂아놓고 일을 나갔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나는 이왕이면 쉴 대로 쉬라고 밥상에 그대로 두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해가 다 저물 때까지 친구들과 쏘다니다가 돌아왔다. 퇴근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쉰 두부를 말없이 싱크대에 올려뒀다.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하지만 승리감은 곧 패배감으로 변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시큼해진 두부에 묵은지를 걸쳐 술잔을 기울였고, 어머니는 간장을 한 숟갈 넣고 으깨서 밥을 비볐다. 쉰내가 집안에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살면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그때의 그 쉰내가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다가 고스란히 호흡기로 침투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숨을 쉬고 살아야 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면 족했다.

"엄마, 여기 우리 민우 사진 좀 봐 봐."

  어머니는 민우의 사진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지만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쉽게 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머니의 의견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어머니의 긍정적인 답변이 현재 상황을 풀 유일한 열쇠였다.

"퇴사를 쉽게 결정한 건 아니야. 국가만큼 계약을 잘 지키는 회사가 없어서 들어갔던 거였고, 그 안에서도 부당함을 느꼈을 뿐이야. 다들 배불렀다고 철 좀 들라고 그러더라. 적성에도 안 맞고 싫은 일 하며 사는 게 맞는 거야? 엄마도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아따 붙을 때는 잘릴 걱정 없겠다고 좋아라 헌것이 누군디."

  어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수년간 다양한 업종의 중소기업을 전전하면서 시작부터 기울어진 계약을 했고,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멀리서 본 공무원은 그나마 남은 정상적인 직장처럼 보였다. 합격이 어렵지 그 허들만 넘으면 안전한 테두리 안쪽에 속하는 곳. 만일 내가 큰 실수를 한다고 해도 나를 쉽게 자를 수 없는 곳. 이런 요소들은 정말 매력적인 장점이었다. 다만 그 매력적인 장점은 곧 치명적인 단점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에게 밉보인 후임을 괴롭히는 계장. 승진 시점에 부서가 옮겨진다고 해도 계장과는 계속 마주칠 거였다. 계장 역시 무슨 짓을 하건 정년이 보장됐다. 업무 분장표에 없는 업무가 하나둘 내게 넘어왔다. 내 성과는 곧 계장의 성과로 탈바꿈되었다. 민원인들은 국민 혈세, 세금도둑, 이라는 단어를 섞어 모욕했다. 그들이 심하게 무례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사이에 내가 실수라도 하면 어김없이 징계를 받았다. 동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집에서도 시간을 쪼개서 개정세법들을 공부했다. 정년을 향해 올라갈 동안 정신이 갈려서 본래의 나를 완전히 잃게 되리라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영향력 있는 뭔가가 되기도 전에 나는 영향력을 가진 것들에 평생 시달리다 사라질 영양가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갈리고 갈려 결국 뭉개질 그저 콩 같은 운명.

"니가 서울 삼서 고생힌 거 모르것냐마는 우리도 여그 지킬라고 시상 고생 다 했씨야."

  어머니는 돌이나 상한 콩을 한쪽으로 골라내며 내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에 어머니는 콩 몇 알을 손바닥 중앙에 두고 엄지로 살살 굴렸다. 순옥 이모가 생각날 때면 하는 행동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야, 순옥 언니가 죽순을 을매나 좋아라 허는지 알믄 니 까무러칠 것이다. 오죽 허믄 귀빠진 날 선물로 죽순이나 한 봉지 달라고 한 언니여, 그 언니가."

  순옥 이모 이야기는 늘 앞뒤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때문에 나는 어머니가 그토록 그리워하면서 왜 만나지 않는 것인지 오랜 시간 궁금했었고, 중학생이 돼서야 어머니가 매년 오월에 가게를 일찍 닫고 망월동 묘지에 다녀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태어나기 전 순옥 이모와 어머니는 같은 산부인과에 다녔다. 당시 두부 전문 식당에 다니던 어머니는 병원에 함께 가기로 했던 날, 일하는 식당에서 실수로 완성된 두부판을 엎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교대시간에 퇴근하지 않고 남아서 저녁 장사할 두부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날 가게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순옥 이모는 결국 홀로 병원에 갔다. 그리고 귀가하는 길에 시위자로 몰려서 험한 일을 당했다. 복부에 수차례 가해진 타격. 하혈이 묻어 붉게 물든 하얀 치마. 가느다랗게 퍼지던 애국가. 순옥 이모는 절차에 맞춘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다. 이미 도시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장인 시절이었다.

"어쩔 수 없었잖아. 엄마 잘못이 아니야."

  나는 순옥 이모 이야기를 전해 듣던 날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그런 말을 했는데 어머니는 작게 중얼거렸다. 뭐가 어쩔 수 없던 거였냐고. 그날 두부판을 엎었던 게? 그 죽음이? 우리가 잘살고 있는 게? 어머니는 두서없이 허공에 묻고는 쓸쓸한 모습으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당시에 나는 우리가 잘살진 않는다고 반론하려다가 삼켰다. 어머니는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고통의 영역으로 멀리 달아나 있었다. 그 이전에도 나는 견학으로 기념관에 방문할 때마다 남몰래 자료 사진 속에서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찾았었다. 그러나 어머니랑 대화한 이후로는 얼굴도 모르는 순옥 이모를 함께 찾았다. 얼굴을 모르니 모두가 순옥 이모로 보였다. 그러고 나니 모두가 아는 얼굴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 뒤로도 순옥 이모를 자주 가까운 과거처럼, 때로는 현재처럼 말했다. 어머니는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같이 병원에 갔더라면 어쩔 뻔했냐고 메마른 목소리로 작게 덧붙였는데, 어머니의 그 말이 어느 순간부턴 순옥 이모 얘기를 끝맺기 위해서 반드시 거처야 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미 골라놓은 콩 바구니를 거칠게 흔들었다. 콩이 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쓸리며 자갈 소리를 냈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검게 일렁였다.

"가게 이야기하다가 순옥 이모 이야기가 왜 나와"

"요새 느 아부지 이 시원찮은 거 보믄 순옥 언니가 꿈에 나와싸야."

"아빠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데 요새라니, 엄마도 새삼스럽게."

"긍께……. 긍께 말이다."

  어머니 말대로 아버지의 치아는 성치 않았다. 아버지는 어금니 임플란트를 했음에도 아직도 습관처럼 앞니로 음식을 씹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집에 없으면 학교에서 돌아와 집을 탐색했다. 때때로 찌그러진 천 원짜리나 동전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고, 어머니가 냉동실 속에 숨겨놓은 홍색 진미채를 한주먹 끄집어내서 냉장고에 기대고 앉아 냉동실 냄새가 밴 비릿한 진미채를 질겅질겅 씹었다. 하루는 장롱에서 아버지의 검정 가방을 발견했다. 거기엔 아마추어 대회 트로피 몇 개와 새빨간 권투 글러브가 담겨 있었다. 가슴에서 조용한 흥분이 일었다. 오래된 가죽 냄새가 진득하게 퍼졌다. 가죽이 조금 벗겨진 글러브를 양손에 끼고 티브이에서 본 복서들을 따라 움직여봤다. 눈을 감고 왼손으로 찢어진 내 신발을 놀림거리 삼았던 녀석을 향해 펀치를 내질렀고, 오른손으로 바로 잽을 날렸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음으론 녀석의 형편이 나보다 더 났다는 이유만으로 나만 혼냈던 선생을 완전히 타도했다. 퇴근한 아버지는 나를 빤히 바라봤고, 어머니는 나에게서 글러브를 빼앗듯 벗겨 검정 가방에 구겨 넣었다. 어머니는 곧이어 내 등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가만 안 둔다고 화를 냈다. 어머니가 떨고 있었다. 진심으로 화내고 있는 걸 알아서 억울함이 북받쳤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내방으로 건너와 넌지시 운동을 배워보고 싶냐고 물었지만,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아서 억울한 마음이 남았던 나는, 그딴 거 안 한다고 데퉁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혼자 마루에서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다. 나는 그 뒤로 몰래 글러브를 끼고 뒷마당에 홀로 서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날리고 타도했다. 아버지가 그 글러브로 무엇을 날렸는지, 어머니는 그 글러브를 왜 그렇게까지 숨기려 했는지, 궁금했지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처음엔 감당하기 싫어서 묻지 않았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물을 수 없는 것이 됐다. 사춘기가 지나면서는 글러브 없이도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보며 끊임없이 상상으로 잽을 날렸다. 상대는 사람이기도 했고, 상황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야 하나둘 퍼즐이 맞춰졌다. 그때마다 나는 만약 아버지가 서울에 갔더라면 우리 가족의 삶은 더 나았을까? 하는 질문을 셀 수 없이 해왔다. 80년도에 전국 프로복싱 신인왕전이 있었다. 가난해서 복싱을 시작했던 아버지는 아마추어 전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서 대회 전까지 서울의 유명 권투 코치에게 훈련받을 예정이었다. 그즈음 어머니가 뒤늦게 임신 소식을 알렸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는 것만 보고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만삭이 됐을 때 도시의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부모님의 계획은 한순간에 틀어졌다. 아버지는 같은 체육관을 다니던 어린 학생들의 허망한 죽음을 보면서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고, 각목 하나 들고 금남로에 나갔다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연행됐다. 아버지가 출소한 후에 한동안 찾아와서 다시 대회를 준비하자고 끈질기게 설득하던 체육관 관장도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다녀와서 같이 밥을 먹은 이후로 더는 복싱을 권하지 않았다.

"다신 그럴 일 없다니까."

  어머니는 내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코인에 실패한 것은 바이러스로 인한 투자자의 위축심리 탓이었는데 하나뿐인 아들 앞에서 이혼을 요구한 며느리 편만 들었다. 어머니는 '퇴직금을 잘도 말아먹었다'라는 말로 나를 굴복시키려 했고, 나는 양손으로 둘둘 마는 시늉을 하며 '이번엔 제대로 말아 올리겠다.'라고 어머니를 회유했다.

"시상 일이 네 멋대로 돼간? 코피숍인지 코인인지 헐 시간에 퍼뜩 올라가서 싹싹 빌어라잉. 코로 시작하는 거슨 기냥 다 신물이 나니께."

  어머니는 코인 투자에도 카페창업 계획에도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그렇지만 기초자본 없이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돌아가야 하는 일이었고, 그 모험을 할 여력이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투자라는 게 다 시간 싸움이라고, 진짜 부자들은 어느 때에 돈을 어디에 옮겨 놓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설파했다. 최근에 상가 전문 매물 사이트에선 좋은 조건의 상가가 이따금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것도 아니었던 것에 상실감을 느꼈다. 어머니에게 취미를 만들어 보라고, 용돈도 올려 드리고 더 자주 내려올 테니 말년에는 손주 재롱 보면서 살라고 애원하듯 말했다.

"아부지가 두부 맹글 때게 어떤 모습인지 뻔히 암시롱 그라믄 못쓰제"

"모르긴. 우리 권여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처지도 뻔히 암시롱 야박하시네. 성공해서 나중에 이 두붓집 두 배로 다시 차려 드리려고 그라제."

"이놈이 배깥에서는 말 한지리도 못헌 것이 집에만 오면 지랄 딴스여. 다시는 고런 소리 허덜덜 말어."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일갈에 놀란 나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끅… 그럼 나중에 이 두붓집 끅… 나 물려 줄 거야?"

"이 일이 말마따나 심깨나 드는 일인디 뭐시 좋다고 물려주고 말고 헌다냐. 그라고 니는 손이 션찮응깨 줘도 못혀."

"아, 엄마! 끅…."

  흥분하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털털하게 웃으며 콩 속으로 두 손을 깊이 푹 파묻고 장난치듯 뒤적거렸다. 딸꾹질이 멈췄다. 물끄러미 나를 건너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일렁이는 어머니의 눈에서 내가 태어난 해의 아버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출소하는 날 어머니가 건네준 두부를 씹지도 않고 삼키며 말없이 울었을 아버지. 어머니의 등에 붙어있다가 이유도 모른 채 더 크게 울었을 나.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나를 추어올리느라 애가 탔을 어머니. 어쩌면 그날 아버지는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치아가 성하지 않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만만하고 영양가 있는 유일한 음식이 두부라는 것을. 그 두부가 당신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을.

  쌓아온 꿈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는 밭을 빌려 콩 농사를 시작했고, 어머니는 다니던 두부 전문 식당에서 잡다한 일을 거들며 생계를 꾸렸다. 거기서 배운 손두부 비법으로 장날에 종을 울리며 두부와 콩을 내다 팔던 부모님은 2년 만에 작은 손두부 집을 차렸다. 청소년기에는 나와 같은 상황인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의 부모님도 아빠의 치아처럼 그때 평생 잊지 못할 무엇을 잃었다. 팔이기도 했고, 다리기도 했고, 시력이기도 했고, 배우자나 자식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부모님께 우리도 국가 유공자 보훈 가족을 신청하자고 말했지만 결국 부모님은 한사코 마다했다. 보상과 혜택을 받으면 유가족에게 돌아갈 보상이 적어진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사글세 단칸방에 살던 가족의 작은 성공과 더 잦은 실패의 합이 지금 이 두부 가게로 고스란히 남았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왜 하필 두부를 만드는 거냐고 볼멘소리를 했었다. 아버지는 편안한 자세로 봉지에 두부를 한 모씩 나눠 담으며 말했다.

"두부를 맹글고 있으믄 딴생각이 안 들어야, 나쁜 맴이 들어올 새가 없어."

  뚱해 있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는 막 만든 두부를 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든다고 덧붙였다. 그 말이 그냥 그럴싸한 핑계 같았다. 왜 하필이면 두부여서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쪽에 나를 세워두는지, 왜 더 세련되고 돈 되는 것을 욕심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봐라, 두부는 지가 부서질지언정 암것도 해롭게 허진 않은께."

  이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손으로 으깬 두부 조각을 내 입술 안쪽으로 밀어 넣어줬다. 부드럽고 담백했다. 한동안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그 미지근하고 유연한 비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사회생활을 했을 때도 내 생각은 변함없었다. 나만 부서지는 건 역시 억울했고, 그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날도 그랬다. 계장과 동기 몇몇과 모여서 술을 먹었다. 술자리 분위기가 무르익어갈수록 서로 던지는 농담도 거칠고 모났다.

"너 인마 광주에서 왔으니까 내가 더 특별히 아끼는 거 알지? 아버지 말 들어보니까 그 당시 투입된 군인들도 PTSD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증후군

  장난 아니더라. 아버지가 자기는 군인으로 억지로 끌려가 국가 의무 다하려다가 살인자 낙인찍혔다며 평생 귀에 박히게 말해서 내가 광주 사람들만 만나면 이렇게 빚 갚는다 내가. 아버지도 나이 드니까 좀 조용해졌지 옛날엔 갑자기 핀트 나가면 술에 취해서 나나 엄마한테 살림 막 집어 던지고 미친놈이었어. 솔직히 말해서 5·18 피해자는 나 아니냐? 그런 내가 공무원이나 하고 있다니 세상 알다가도 몰라. 안 그러냐?"

  계장은 고기를 두 세개 입에 넣고 거세게 씹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기를 잘 먹지 못했다. 고기를 자주 먹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고기를 씹을 때마다 이상하게 아버지의 어금니가 떠오른 까닭도 있었다. 그래서 늘 고기를 먹으면 체했다. 나는 살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말로 나와서 함부로 납작해지면 안 되는 것이다. 특히나 이런 술자리에서 가벼운 농담으로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런데 뭐?

  이미 얼굴이 붉어질 대로 달아오른 내가 눈을 어떻게 떴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앞에 앉은 동기가 발로 내 정강이를 툭 쳤다. 동기를 보니 적당히 계장에게 맞춰주라는 식의 눈빛이었다. 분위기가 한껏 매캐해졌다. 무장한 군인과 무고한 시민의 싸움은 애초에 기울었다. 계장과 나처럼. 우리는 피해자가 누구냐는 논쟁에 이미 천문학적으로 다른 데이터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가해자의 뒤틀린 정신이 어떻게 피해자의 남은 인생보다 더 중요 우위일 수 있을까, 하는 반발이 일었지만, 손톱 모서리가 느껴질 정도로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여전히 자기 편한 방식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같이 일해야 하는 계장이다. 나는 몽글몽글 덩어리져 떠 오르는 분노에 간수 붓듯 천천히 찬물을 마셨다. 내내 좌불안석이던 동기들은 서둘러 불판을 갈았다. 계장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니도 광주 출신이라고 기분 나쁘다 이거냐?"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친한 동기가 내 어깨를 흔들며 정신 차리라고 화내는 동시에 애원했고, 나는 그제야 반쯤 일어선 채, 팔에 핏줄이 굵게 올라올 정도로 쥔 주먹을 살짝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칠라믄 쳐봐라. 광주에서 태어난 게 권력이냐? 네가 아는 건 뭔데?"

  나는 그 길로 술자리를 박차고 고깃집에서 나왔다. 골목 가로등에 기대고 토했다. 역시 고기는 씹어 삼키기 어려웠다. 체기가 가시지 않았다. 바닥에 잘게 부서진 고깃덩이가 보였다. 이미 토사물이 된 그것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두부를 담으며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봐라, 두부는 지가 부서질지언정 암것도 해롭게 허진 않은께."

"그래서 싫다고.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왜 우리만 그렇게 살아야 해? 왜?"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그럴 날이 올 것이여. 그냥 그때까지 단단한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여. 아따 이것이 밭에서 나는 쇠고기랑께. 남들은 없어서 못 먹어야."

  그날 아버지가 밀어 넣어주는 두부를 몇 번 더 받아먹었다.

  시간을 두고 속에 있는 것을 조금 더 게워냈다. 승진 시점에 부서가 옮겨진다고 해도 계장과는 계속 마주쳐야 할 걸 모르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공직생활은 지옥일 게 뻔했다. 계장 역시 무슨 짓을 하건 정년이 보장된다는 사실처럼. 이따금 내 삶에 드리우던 비지찌개 속에 섞여 있던 가난이 몸속 어딘가에 남아 이상한 형태로 부글부글 끓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욱하는 성질 좀 고치라고 나를 나무랐다.

"아따, 이라고 션찮아서 워찌야쓰까잉."

  콩은 생각보다 무겁고 두부를 만드는 과정은 다소 복잡했다. 우리 집은 두부를 하루에 서너 번 만들었는데 잔심부름을 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거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밤에 불려 놓은 콩을 기계식 맷돌에 갈아 끓는 물에 살살 부었다. 어머니는 주걱을 들고 큰 솥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주어야 두부에서 탄내가 안 난다면서 시범을 보였다. 어머니의 두 눈에 서린 진지함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매일 새벽 주걱을 천천히 저으며 아침을 맞이할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됐다. 어머니는 거품이 날 때 들기름을 넣으면서 이것이 소포제 역할을 해준다고 말했다. 진짜로 들기름 몇 숟갈에 거품이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걸 보니 신통한 기분이 들었다. 찬물을 옆에 두고 확 넘치지 않도록 여러 번에 나눠서 부었다. 돕는다고는 했으나 난 여전히 시원찮은 아들이었고, 두부는 절대로 망하면 안 되는 신성하고 고귀한 과업이었다. 가게 안은 금세 푸근한 열기로 가득 찼다. 잘 끓인 콩을 베 보자기에 넣고서야 내가 할 일이 생겼다. 어머니는 나무 주걱으로 베 보자기를 눌러서 콩물을 최대한 짜줘야 두부가 한 모라도 더 나온다고 말하면서 주걱을 뺏어 들려고 했다. 잘해 보고 싶은 마음에 힘껏 주걱질했더니 뒤통수로 어머니의 손이 날아왔다.

"정신을 어따 팔아먹었냐. 요로코롬 허라고. 요로코롬."

  어머니는 잔소리하면서 손은 은근하게 베 보자기를 다뤘다. 어머니가 주걱으로 리듬을 타며 베 보자기를 누르자 뿌연 콩물이 좌르륵 빠져 나왔다. 계속해서 어머니는 부드럽게 베 보자기를 주물렀고 그때마다 가느다란 김이 위로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한 모를 덜 얻더라도 베 보자기가 터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을 정정했다.

"아까는 최대한 짜야 한 모라도 더 나온다면서."

  내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껄껄 웃으면서 보자기가 터지면 방법이 없다고,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며 마저 웃었다. 어머니가 웃을 때 눈가 주름이 곡선으로 깊이 파였다. 베 보자기에서 꺼낸 콩물은 다시 솥으로 입수됐다. 어머니는 대야에 고무장갑을 잠시 벗어 놓고 간수를 챙겨왔다. 생수병 주둥이를 잡은 어머니의 손이 불린 콩처럼 통통하고 연했다. 그리고 그 위로 어머니의 야윈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청정해역 간수여. 갈 때 가져가서 서울서 두부 맹글어 먹어야."

"아니야, 사 먹으면 돼. 무겁게."

"시방 사 먹는 거랑 맹근 것이랑 어디 맛이 같다냐?"

  확실히 맛이 달랐다. 처음에 상경해서 두부와 김치맛이 내가 그동안 먹던 맛과 달랐다. 하지만 점점 낯설고 밍밍한 맛에 익숙해졌다.

  간수를 넣어주자 콩물이 작은 덩어리를 형성하며 하얗게 엉기기 시작했다. 빨리 두부가 되는 걸 보고 싶어서 저을 때 속도를 내려고 하니 어머니는 간수 넣을 때가 제일 중요하다며 조심성 있게 천천히 저으라고 윽박질렀다. 한 번에 많이 넣어도 안 됐다. 세상 어려운 말 '적정량'을 넣어야 했다.

"적정량을 안 넣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라믄 떫어서 안 돼야. 이것이 우리 집 비결이여."

  나에게 두부 가게를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더니, 비장한 잔소리에는 집안 대대로 두부 사업을 물려주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간수가 든 컵을 들고 솥에 적정량을 붓는 어머니의 눈빛이 실험하는 연구자의 눈빛처럼 엄중해 보였다. 어머니의 두부를 그려 모으는 손과 두부가 서로 엉기는 과정을 말없이 바라봤다. 적당히 엉기는 것을 확인한 어머니가 솥뚜껑을 닫았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솥뚜껑을 다시 열었다. 어머니는 순두부를 한쪽에 떠놓고 두부 틀을 정리했다. 손잡이가 긴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몽글해진 두부를 퍼서 면보가 깔린 틀에 붓자 김이 모락모락 났다. 솥에 비교해 두부 틀이 작아서 다 안 들어갈 것 같았는데 마술처럼 딱 맞게 들어갔다. 어머니가 잘 담긴 두부를 아이 다루듯 토닥거렸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났다. 두부가 느린 음식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인고의 시간을 들이는 줄은 몰랐다. 고소한 향이 풍기며 허기가 몰려왔다. 막 만든 두부를 민우에게도 맛보여 주고 싶었다. 두부 귀퉁이를 뜯어서 세로로 찢은 신김치 한 가닥을 돌돌 말아주고, 깍둑썰기한 두부를 가득 넣은 된장찌개의 맛을 알려주고, 으깬 두부를 넣어 무친 참나물도 민우의 숟가락 위로 잘 뭉쳐서 얹어 주고 싶었다.

"직접 맹글어 본께 맛있것지야? 공장에서 나온 거시랑 천지 차이여. 방송국에서 우리 가게 찍어 갈라고 난리였씨야."

"촬영하지 그랬어."

"아따 간지러워서 그런 걸 어처케 하것냐. 허허. 안 그려도 맛있응깨 다들 줄 서서 사묵는 디. 허허"

  어머니가 마스크 속으로 베시시 웃었다. 공간을 휘감는 두부의 온기에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얼큰한 시레기 두부 들깨탕과 매콤하고 짭조름한 두부조림이 생각났다.

"야야, 바우가 평소에는 생판 안 웃는디, 내가 맹근 비지가 맛있응께 어쩐주 아냐? 먹자마자 그냥 씨이익 하고 기분 좋게 웃었어야. 워매 진짠디, 서울 삼서 속고만 살았냐?"

  평소에 생판 안 웃는 건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다. 걱정 없이 웃는 어머니의 모습이 낯설어 계속 바라봤다. 어머니가 말한 바우는 콩밭 옆에 우사에서 송아지 때부터 키웠던 소였다. 방학이 되기 전부터 시골에 내려가면 우사 청소를 시킬까 봐 미리 겁먹었었다. 바우의 몸집이 이미 커진 상태라 먹는 양도, 청소할 양도 만만치 않았다. 헌데 1학기 끝나고 방학 때 집에 와보니 우사는 비어있었다. 바우가 없는 우사는 조용하고 허전했다. 눈을 감으면 종종 떠올랐다. 정직하게 자라던 바우의 몸뚱이와 거짓을 꿰뚫어 보는 듯했던 검은 눈동자가.

"그래서 그때 바우를 어떻게 했는데?"

  어머니는 대답 대신 끙―하고 길게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어머니는 가마솥 물청소를 하고 행주로 닦은 뒤 솥 안쪽에 얇게 콩기름을 발랐다. 나는 서둘러 물이 찬 양동이를 가지고 왔다. 양동이로 두부를 누르고 잠시 서서 그것을 내려봤다. 두부 속에 담긴 정신이 나를 통과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전해질 것 같았다. 반 이상 채워진 양동이의 물 표면에 쭈글쭈글한 내 형상이 아른아른 얼비쳤다.

  어머니와 다시 평상에 마주 앉아서 콩을 골랐다. 몸이 뻐근했다. 허리춤을 잡고 일어나는데 얕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두부를 눌러 놓은 양동이의 물이 잠시 찰랑거렸다. 두부는 조용하게 밀도를 높이며 응고의 시간을 버텼다. 가게 입구에서 삼천 오백원짜리 두부를 오백 원 깎아달라는 흔한 실랑이가 들렸다. 유리문 너머로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위생모 아래로 삐져나온 뒷머리가 군데군데 하얗게 셌다. 어머니는 밖의 상황에도 눈도 끔뻑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토시와 초록색 꽃무늬 바지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비지가 굳어 있었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옷 주름 사이에서 떨어져나온 콩 하나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렸더니 어머니가 뭘 찾냐고 물었고 나는 콩이라고 답했다.

"시방 본께 쩌가 있고만."

  어머니가 가리킨 곳은 콩물용 스테인리스 채가 담긴 대야 앞이었다. 여러 개의 대야 앞 바닥에는 매직으로 생콩, 불린 콩, 삶은 콩이라고 순서대로 적혀있었다. 삶이란 글자의 'ㅁ' 받침이 베 보자기 가장자리에 있던 두부처럼 한쪽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되어 있었다. 'ㅁ' 속에서 시치미 떼고 글자 행세를 하는 콩을 집게손가락으로 천천히 집어 올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콩은 삶 속에 있었다.

  <당선소감>

 

   "항상 다른 느낌으로 독자 삶에 스며드는 글 쓸 것"

  광주에 살 때 가끔 엄마와 서울로 백일장을 다녔습니다. 평소에 일반석만 타는 엄마인데 백일장에 간다고 하면 고민도 하지 않고 우등석 두 장을 끊었습니다. 백일장을 핑계로 엄마와 서울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백일장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엄마와 단둘이서만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시제를 받아서 한참 글을 쓰고 있으면 멀찍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집에서 가져온 책에 가만히 밑줄을 긋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만은 역할로서의 엄마가 아니라 진짜 본연의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심야 버스에서 우리는 택시기사의 덤터기에 화가 난 마음도, 백일장에서 빈손으로 돌아가 속상한 마음도, 휴게소 표 어묵 국물을 먹으면서 같이 삼켰습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졌습니다. 글 쓰는 일이 저에겐 그때 그 휴게소 표 어묵 국물 같습니다. 모든 걸 다 괜찮게 만드는 마법. 갑자기 마음에 온기를 확 들이붓는 일. 그래서일까요. 원하는 만큼 글이 나오지 않는다며 푸념하는 마음도 글로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일상 속에서 동그라미만 봐도 콩이 떠오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빈 세상을 넘어'의 초고를 쓸 때가 그랬습니다. 콩이 모여 단단한 두부가 될 수 있듯 글이 모여 소설이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들뜨기도 했고, 동시에 두부가 되어도 언제 어떤 충격을 받아 무너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밤과 새벽의 경계에서 글을 쓰며 다양한 상념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베란다를 창밖으로 새벽의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봤습니다. 운전자가 새벽에 일을 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반대로 돌아오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같은 풍경이 매일 그날의 상태에 따라서 다른 해석을 불러왔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의 소설이 최종에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는 생생한 풍경처럼 그 자리에 있지만 볼 때마다 다른 밀도와 느낌으로 독자의 삶에 살짝 스며들어 동행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막 등산로 앞에 섰습니다. 올해의 당선 소식은 저의 산행에 대한 경쾌한 응원과 지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일 먼저 기회를 주신 무등일보와 심사해주신 정지아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더욱 진실한 글을 쓰겠습니다.

  이미 삶의 큰 일부가 되어버린 사색 식구들 덕분에 절망의 무게를 지고 살던 힘든 시절을 잘 견디며 소설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소설을 쓰는 자세와 마음에 대해서 많이 나눠주신 끼움 선배님들, 특히 임하 작가님과 규일 선배님 덕분에 방향성을 계속 고민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가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길로 나아 갈 유쾌하고 즐거운 소동 문우님들, 여러분의 다정하고 세심한 합평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 시절 문학 얘기로 함께 밤을 새웠던 소설동아리 문우님들 덕분에 잊지 못할 멋진 추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길고 짧은 인연으로 스치며 영감을 주셨던 수많은 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때 소설을 쓰려는 마음만 큰 탓에 내용이 형태로 머물지 못하고 문장 사이로 물처럼 새어나가는 글을 썼습니다. 그땐 소설이 뭔지도 모르면서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허무는 경계의 소설을 써보겠다고 패기 좋게 선언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소설의 기본기를 알려주고 소설 쓰기의 첫 시작을 함께해주신 김종광 선생님, 서툰 습작임에도 스타일과 장점을 발견해서 깊은 지혜를 나눠주신 손홍규 선생님, 두 분의 은혜에 무궁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연한 계기로 만나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상은과 한별, 전공과 다른 길을 가는 저를 묵묵히 응원해주는 친구들, 등단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해 준 회사 분들, 이 모두가 있어 오늘의 제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가끔은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사치일까 생각했습니다. 무겁기만 하고 끝은 보이지 않아서 꿈을 놓으면 모든 게 조금은 더 녹록하고 편해질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손 내밀어 저를 일으켜주던 멋진 언니들 덕분에 지치지 않고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희정 언니와 승아 언니께 수줍은 사랑과 커다란 감사를 보냅니다. 언니들을 알게 된 건 정말 천운입니다. 그리고 통화할 때마다 '언니는 소설 쓰는 사람'이라며 저 자신보다 저의 가능성을 더 믿어준 은영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곁을 지켜준 남편에게 특히 무한한 애정과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수 오빠, 건우,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신 승환 삼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수미 이모 감사합니다. 삼 남매 중 유일한 딸이라고 특별대우해준 아빠, 아빠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셨다는 걸 잘 압니다. 사랑합니다.

  사실 등단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제 삶을 모두 지켜보았을 엄마에게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말,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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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구체적 삶 속에서 길어올린 에피소드와 문장 주목"

  작년과 올해가 뭐가 다를까 싶은데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2022년 신춘 응모 소설의 키워드가 불안이었다면 2023년의 키워드는 따스함이다. 따스함이 절실할 만큼 살기가 더 팍팍해진 것인지, 따스함을 나눌 만큼 살만해진 것인지는 판단하는 각자의 몫이겠다.

  요 몇 년 사이, 수준 낮은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예전에는 첫 문장만 읽어도 거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때는 바야흐로 1950년 3월, 꽃피는 춘삼월이었다, 와 같은. 요즘은 첫 문장이나 첫 장에서 걸러낼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소설 지망생 전체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2000년대 들면서 개인의 수준뿐만 아니라 권리의식도 현저히 높아졌다. 바람직한 일이다.

  2023년 신춘응모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중장년층의 응모가 늘었고, 70-80년대의 엄혹했던 현실을 그린 소설이 많았다.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왜 그 시절을 돌아보아야 하는가, 하는 현재성의 의미이다. 그런 의미를 부여한 소설을 찾기는 어려웠다.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부여할 때, 과거도 의미를 갖는다는 단순한 진실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지난 몇 년간 압도적이었던 여성서사 대신 좀 더 보편적인 가족서사가 늘었다는 점도 이번 신춘의 도드라진 특징이었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역병을 거치면서 바깥보다 안을 돌아보게 된 것도 한몫했을 듯하고, 경제적 위기 앞에서 힘을 얻을 곳은 가족뿐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깨달음도 거들지 않았을까 싶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유재연의 '핫산의 귤', 박연우의 '앙큼한 여자', 백은아의 'K 할머니', 나규리의 '빈 세상을 넘어', 총 4편이었다.

  예멘 출신 망명자들의 삶을 다룬 '핫산의 귤'은 인간으로 마땅히 관심 가져야 할 인간 권리의 문제를 핍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좋았으나, 그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태도가 결말에 이르기까지 너무 방관적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는 갈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앙큼한 여자'는 문장이나 구성이나 나무랄 데 없이 잘 짜여진 작품이다. 속물적 중산층의 자의식을 다루었다는 점이 새롭기도 하였으나 바로 그 지점, 속물적 중산층의 안온한 세계를 극복하지 않고 따스하게 순응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백은아의 'K 할머니'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재치있게 다루고 있다. 보편적 주제를 참신한 소재로 접근했다는 데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소설들이 갖는, 결말이 너무 뻔하다는 한계를 이 작품 역시 뛰어넘지 못했고, 앞부분의 구체적인 묘사가 결말 부분에서 설명으로 대체된 점도 아쉬웠다.

  나규리의 '빈 세상을 넘어'는 힘든 것도 싫고, 안정적인 것도 싫은, 딱 요즘 사람인 두붓집 아들의 이야기이다. 평생 두부를 만들어온 부모는 알고 보니 5·18로 인해 프로복싱의 꿈을 접었거나 운명의 장난으로 죽음을 피해간 사람들이다. 거친 세상에 데인 부모는 '지가 부서질지언정 암것도 해롭게 허진 않'는 두부를 만들면서 세월을 견뎌낸다. 그들의 삶은 콩 속에 있었다. 서울살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부모 등쳐 먹을 궁리나 하는 두붓집 아들은 나이 들어 오랜만에 부모의 삶을 지켜보면서 '삶은 콩' 속에 있다(언어적 유희이기도 하다)는 아름다운 깨달음에 다다른다. 어수선한 구성이 옥의 티였지만, 구체적 삶 속에서 직접 길어올리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에피소드와 문장만으로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감수성이나 감성만이 아니라 온몸을 세상에 내던져 창조한 나규리의 소설은 우리가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고 읽어야 하는지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진실을 알려준다. 지금과 같은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당선되지 않은 모든 응모자들께도 격려를 보낸다. 작가는, 누구나 될 수 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심사위원 : 정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