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연초록, 순정 - ‘죽녹’의 휘파람에 답함 / 단정(민병훈)

<당선작>
연초록, 순정 - ‘죽녹’의 휘파람에 답함 / 단정(민병훈)
들어보았나요
하늘대는 댓가지들 서로 부딪쳐 휘파람을 불던 곳
그대 처음 닿을 듯 말 듯 손끝에 느낀 바람의 촉감
사늘한 기운이 볼을 스칠 적마다 저절로 발개진 볼
댓잎 사이를 통과한 햇빛에 손바닥을 담그려다가
서로만 곁눈질하며 들키고 웃던 짤막했던 순간들
그해 담양의 봄, 뭉근하게 퍼지던 온기를요
또는
들어보았나요
연초록 잎새들로 아기자기하던 그 야트막한 비탈
흰나비 몇 서성대다 그늘을 찾아 숨죽여 앉던 곳
속살대던 바람이 어느 순간 제 숨을 고르고 나면
시리게 맑은 눈가에도 물빛은 점점 더 투명해져
죽녹의 피리음을 엮어 그 숲에 내던지던 순간을
그해 담양의 봄, 멍울처럼 핀 가슴속 죽순을
다시
들어보았나요
숨 가쁜 출근길 전철 안에서 유튜브 클립을 열다
무심코 마주치게 되는 대숲 속 푸른 창공을 열면
비로소 그대 귓가에 와닿는 그해 숲 속의 밀어들
죽녹의 휘파람으로 사각대는 바람의 수줍음을
그대 귀에만 들리게 만든 머뭇거리는 고백을요
그해 담양의 봄, 둥그렇게 흐르던 구름처럼요
(그대가 제 인생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것처럼)
<당선소감>
시단 발전에 작지만 보탬 역할 ‘발현’
어설픈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며 갓 익은 김치 한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그녀 앞에서 무얼 먼저 말해야 할까를 한참 고민하다가 비로소 꺼낸다는 게 “나 등단했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제가 맞을 겁니다.(‘들꽃 같은 아내’를 향한 일종의 헌사입니다)
느닷없는 당선소감 몇 줄을 쓰려다 기어코 잠든 강아지를 깨워 새카만 두 눈을 한참 쳐다보곤 이내 웃었습니다. 그만큼 착하디 착한 아이가 제 곁에 있어주었다는 게 축복인지도 모르니까요.(‘지극히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한 또 다른 헌사이기도 합니다)
영하 십여 도를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내내 생각했던 말투들은 다정하면서도 끈적거리지 않을 담담함과 묵묵함이 더 앞선다고 늘 믿어온 편이기도 하고요. 인연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늘 고마운 분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여전히 부족한 건 재능이요. 그걸 무마하려는 노력으로 임해온 건 아닐까 하는 착각, 회의, 갈등, 피로가 역력하였음에도 늘 곁에서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은 이들한테 가장 먼저 큰 고마움을 표하고자 합니다.
되지도 않을 1980년대의 유행처럼 “동인지”를 발간하겠다며 사람들을 모았었고 뜻과 결이 맞는 분들을 소중히 모셔놓은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동인지를 창간하진 못했지만 그만한 열기와 노력이 지속될 수 있었다면 그걸로도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시와 지성’ 동인들과 함께 이 영광을 나누고자 합니다. ‘문학회’에서 시장이라는 타이틀로 누누이 “부끄럽지 말자”며 후배들을 다독거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또 ‘백사’라는 이름을 갖고도 많은 인연들이 아직까지 이어져온 건 순전히 제 게으름과 무능을 너그러이 이해해 준 사람들 덕택이었나 봅니다.(생각해 보니 ‘생활도서관’ 시절도 있었습니다)
제 가족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그 인연들, 동기들과 선후배 그리고 동인 내지는 동지들에게도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너는 늘 나였고 벽은 늘 문이었습니다. 노력이 곧 성공이라는 말을 끝까지 믿어준 게 보탬이 됐고 그 말을 증명했다는 게 가장 기쁩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매일 시를 읽고 매일 시를 썼습니다. 일상은 정직했고 그래서 결과는 당연하며 담담할 뿐이니까요.
시를 쓰다가 죽는 사람이 비로소 진짜 시인이라고 늘 외워왔습니다. 그 말을 실천하도록 하겠고요. 온라인에서도 기쁨을 함께 할 인연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 소중한 이름들 앞에도 수줍은 인사 몇 마디를 남겨놓을게요. 사랑은 늘 아끼고 보듬고 또 보호하는 일이라는 말을 해왔습니다. 그 말 역시 다시금 꺼내놓습니다. 시대를 직시하며 분노를 감추지 말자는 말도 자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말 역시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늘 부족함을 알고 늘 배우면서 늘 겸허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적어두려고 합니다. 항상 스승이었으며 심지어 더러는 반면교사 역할까지도 해온 대한민국의 모든 시인들께도 약소한 보답을 드릴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합니다. 시단의 발전에 미소하게나마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는 데 제 생을 걸겠다는 말씀입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신문사 관계자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심사평>
솔직함은 세련됨 넘어서는 미학 된다
시의 시대라고 불린 시절이 있었다
1080년대. 우리의 삶이 가장 핍박받은 시절이면서 정신의 역동성이 펄럭이던 시절이었다. 농부도 버스안내양도 교사도 수녀도 철근공도 시를 썼다. 시가 그 시절의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의 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들을 노래했다, 시 정신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시를 쓰는가? 강의실이나 철학서가 아닌 시대가 우리에게 난해한 이 명제를 가르쳐 준 셈이니 그 시절 밤을 새워 시를 쓴 이들은 행복했다. 억압 곁에 시가 있었고 밥상 위에 미싱 곁에 출근하는 버스안내양의 오라잇 소리 곁에 시가 있었으니 시에게도, 그것을 노래한 인간에게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최근 우리 시단의 시가 좋아졌다. 문예지에 발표된 시들의 수준이 높아졌고 보기 아까운 시집들도 부쩍 늘었다. 80년대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시의 시대가 온 느낌을 받는다. 좋은 일이다. 시 정신의 핵심이 기존질서, 미학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지금 우리의 삶이 결코 녹녹하지 않은 시간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우리 시가 인간의 꿈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자의 손에 ‘연초록, 순정’ 외 4편, ‘크리스마스 편지’ 외 4편, ‘사람들은 더이상 비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외 4편, ‘처마 끝에는 놓아주는 손이 있어’ 외 4편의 시가 남았습니다. ‘처마 끝에는…’ 의 경우 고드름에 대한 은유가 좋았지요. 평범한 사물들에서 삶의 꿈을 기다리는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전체적인 시의 수준이 아쉬웠지요. ‘사람들은 더 이상 비유를…’ 의 경우 아주 쉬운 언어로 삶의 순간순간을 붙드는 지혜가 느껴졌습니다. 이 쉬운 언어로 더 깊고 신비한 꿈을 노래할 수 있다면 이 분의 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물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편지’와 ‘연초록, 순정’, 최종 결정을 하는데 난해함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편지’는 연필로 새긴 따뜻한 인간의 약속이 설렘을 주었지요. 내가 그 약속의 주인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시가 인간에게 꿈과 약속을 선물할 수 있다면 최고의 가치일 것입니다. ‘연초록, 순정’은 평이하고 풋풋한 언어로 고향 마을의 추억을 새깁니다.
출근길 전철 안에서 불러들인 대숲 속 푸른 창공은 힘든 시절을 이겨내는 따뜻한 용기입니다. 그대가 제 인생의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아마추어적인 진술이 최종 당선작을 결정짓는 추가 되었습니다. 솔직함은 종종 세련됨을 넘어서는 미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숲 속에서 바라보는 푸른 창공 같은 신비하고 아름다운 시의 주인이 되시길!
심사위원 : 곽재구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한눈에 보는 핵심: 이 시는 무엇을 말하나
이 시는 담양의 대숲(죽녹)에서 시작된 한 사람(“그대”)과의 기억을,
지금의 “숨 가쁜 출근길 전철”에서 유튜브 영상을 통해 다시 불러오며,
끝내 고백으로 닿게 하는 시입니다.
- 과거의 봄(담양) = “연초록”의 감각(바람, 햇빛, 볼의 붉어짐, 웃음)
- 현재의 일상(전철) = 피로하고 무심한 시간
- 연결 장치 = 소리(휘파람/피리음/바람의 사각거림) + 반복 질문 “들어보았나요”
- 결론 = “그대가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순정한 선언
2) 제목과 부제의 키워드
● “연초록, 순정”
- 연초록: 막 돋아나는 잎의 색. 시작, 첫 마음, 풋풋함, 아직 상처가 덜한 시절의 색감.
- 순정: 꾸미지 않은 마음. “세련된 비유”보다 솔직한 고백에 가까운 사랑의 태도.
→ 즉 제목 자체가 이미 말합니다.
“풋풋한 계절의 첫 마음(순정)을 다시 꺼내 보겠다.”
● “- ‘죽녹’의 휘파람에 답함”
- “죽녹(竹綠)”은 문자 그대로 대나무의 푸른빛이기도 하고, 시 속에서는 대숲 자체의 존재감으로 읽힙니다.
- “휘파람에 답함”은 구조적으로 “부름(죽녹의 휘파람)” → “응답(시인의 말)”이에요.
즉, 이 시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대숲이 먼저 불러낸 감각과 기억에 대해, 화자가 ‘응답’하는 형식입니다.
3) 반복 구조가 만드는 ‘기억의 파동’
시의 큰 뼈대는 세 번의 호출입니다.
- 들어보았나요 (첫 기억)
- 또는 / 들어보았나요 (두 번째 기억, 변주)
- 다시 / 들어보았나요 (현재에서 과거가 재생됨)
이 반복은 “강조”라기보다 기억이 돌아오는 방식을 닮았습니다.
어떤 기억은 한 번에 선명하지 않고,
비슷한 장면들이 여러 각도에서 겹쳐지며 점점 확실해지거든요.
또한 “또는” “다시”는,
- 하나의 장면만이 아니라
- 그해 봄의 여러 순간들(촉감/빛/눈가/마음의 멍울)을
차례로 불러오는 편집(몽타주) 역할을 합니다.
4) 1연(첫 번째 ‘들어보았나요’) 자세히 읽기
하늘대는 댓가지들 서로 부딪쳐 휘파람을 불던 곳
그대 처음 닿을 듯 말 듯 손끝에 느낀 바람의 촉감
① “하늘대는”의 이중 의미
- 실제 의미: 대나무 가지가 하늘 쪽으로 흔들리는 모습
- 말맛: “하늘대다(새침하게 굴다/슬쩍 피하다)”의 뉘앙스
→ 대숲의 움직임이 사랑의 머뭇거림으로 겹칩니다.
대나무가 “휘파람”을 부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분위기가 휘파람처럼 들리는 거죠.
② “닿을 듯 말 듯”의 설렘
손끝에 닿는 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그대”와의 거리감이 만들어내는 첫 설렘의 임계점입니다.
사늘한 기운이 볼을 스칠 적마다 저절로 발개진 볼
추워서 빨개진 걸 수도 있지만, 시는 일부러 겹치게 둡니다.
추위의 붉어짐 + 수줍음의 홍조가 동시에 작동합니다.
댓잎 사이를 통과한 햇빛에 손바닥을 담그려다가
서로만 곁눈질하며 들키고 웃던 짤막했던 순간들
여기서 장면은 아주 “작고 사소한”데, 그래서 더 강합니다.
큰 사건이 아니라,
‘들키고 웃는’ 짧은 순간이 사랑의 핵심처럼 남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리고 이 1연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해 담양의 봄, 뭉근하게 퍼지던 온기를요
- “뭉근하게”는 급하지 않습니다.
- 사랑도 기억도 서서히 퍼져서 몸에 남는 온기입니다.
즉 1연의 키워드:
촉감(바람) + 빛(햇빛) + 신체 반응(홍조) + 작은 웃음 → 온기
5) 2연(“또는”)은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연초록 잎새들로 아기자기하던 그 야트막한 비탈
흰나비 몇 서성대다 그늘을 찾아 숨죽여 앉던 곳
여기서 풍경은 더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 “아기자기” “야트막한” “흰나비”
→ 연초록의 세계가 부드럽고 순한 정서로 확장됩니다.
속살대던 바람이 어느 순간 제 숨을 고르고 나면
시리게 맑은 눈가에도 물빛은 점점 더 투명해져
여기가 중요한 전환입니다.
- “속살대던 바람” = 바람이 속삭임처럼 들림
- “숨을 고르고” = 감정의 파도가 잠깐 멈추는 순간
- “시리게 맑은 눈가” = 눈가에 물기(눈물일 수도, 바람에 맺힌 물기일 수도)
그리고 그 물빛이 “더 투명해진다”는 건,
감정이 혼탁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화되는 방향이라는 뜻이에요.
죽녹의 피리음을 엮어 그 숲에 내던지던 순간을
그해 담양의 봄, 멍울처럼 핀 가슴속 죽순을
여기서 “죽순”이 등장합니다.
대숲의 봄은 죽순이 올라오는 계절이죠.
- “멍울처럼 핀” 죽순 = 가슴속에 돋아나는 말/감정/고백
- 아직 완전히 펼치지 못한 마음이 속에서 솟아오르는 상태입니다.
즉 2연의 키워드:
풍경의 세밀함(연초록/흰나비) + 눈가의 투명함(정화) + 가슴속 죽순(말이 되기 전의 감정)
6) 3연(“다시”)에서 과거가 ‘현재’로 들어온다
숨 가쁜 출근길 전철 안에서 유튜브 클립을 열다
무심코 마주치게 되는 대숲 속 푸른 창공을 열면
가장 현대적인 장면이죠.
이 시가 “옛 추억”에만 머무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전철: 피로, 현실, 생계의 리듬
- 유튜브: 기억을 불러오는 새 방식(디지털 매개)
- 푸른 창공: 대숲이 열어주는 ‘숨구멍’ 같은 공간(해방감)
비로소 그대 귓가에 와닿는 그해 숲 속의 밀어들
죽녹의 휘파람으로 사각대는 바람의 수줍음을
그대 귀에만 들리게 만든 머뭇거리는 고백을요
여기서 시는 결심합니다.
그때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말하겠다고.
특히 “그대 귀에만 들리게”라는 표현이 핵심이에요.
- 공개적인 선언이 아니라
- 아주 사적인 고백
-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죽녹의 휘파람(바람의 소리)”이라는 자연의 은폐막입니다.
즉, 자연의 소리가 고백의 보호막이 되는 구조예요.
“휘파람/사각거림”이 둘만의 암호처럼 작동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결:
그해 담양의 봄, 둥그렇게 흐르던 구름처럼요
(그대가 제 인생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것처럼)
- “구름”은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하늘에 있고, 흐르고, 남습니다.
→ 기억과 사랑의 성질과 닮았죠. - 괄호 속 문장은 심사평에서 말한 “아마추어적인 진술”이기도 한데,
그 “촌스러울 수도 있는 직접 고백”이 오히려 이 시의 순정을 완성합니다.
기억의 미학이 마지막에 ‘사랑의 문장’으로 착지하는 방식입니다.
7) 이 시의 미학 포인트 5가지
- 감각의 회상: 시각보다 소리·촉감이 먼저 기억을 데려옴(휘파람/바람/햇빛 촉감).
- 수줍음의 언어: “닿을 듯 말 듯 / 곁눈질 / 들키고 웃던 / 머뭇거리는” — 고백을 직접 외치지 않고 주변을 맴돌게 함.
- 자연=내면의 은유: 죽순(가슴속에서 자라는 말), 구름(흐르는 계절), 연초록(풋마음).
- 현재성: 전철·유튜브가 들어오면서, 추억은 박제가 아니라 “오늘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됨.
- 솔직한 마지막 한 줄: 세련된 비유를 넘어, 결국 “그대가 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말해버리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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