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해 겨울 / 신시유

<당선작>
그해 겨울 / 신시유
런던. 추위보다 나를 더 괴롭혔던 건 사방에 얇은 막처럼 깔린 안개였다. 그것은 묵직한 바람에 실려 내딛는 발걸음마다 내 살갗을 짓눌렀다. 밤 11시. 폐기 직전인 50펜스짜리 빵을 사 들고 가는 나를 향해 부랑자 한 명이 동전통을 흔들었다. 나는 마지막 사서마저 떠나버린 도서관 로비에 앉아 차가운 빵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태어난 곳으로부터 8,871km 떨어진 섬나라. 검은 나선형 계단이 있는 책들의 무덤에서 나는 매일 타국의 언어를 읽었다. 학문. 한때 저 너머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그것은 표지가 바랜 고서처럼 내 안에서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글자를 읽고 있으면 시야가 자꾸 흐릿해졌다. 길을 걸을 때면 하늘에 뚜껑이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이 드는 주말에는 벽돌집들이 늘어선 회색 골목을 달렸다. 이번 생에 할당된 반짝임을 모두 소진해 버린 기분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책상이 절반인 방에 누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루를 뒤로한 채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면 가끔은 노을이 지고 있었고 가끔은 새벽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트라팔가 광장으로 나가 죽은 사람들을 위한 침묵시위에 합류했다. 붉은 피켓을 들고 상기된 표정의 관광객들 앞에 서 있으면 몸의 일부가 바람이 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이마가 뜨겁던 어느 비 오는 날, 집에 오는 길에 피카델리역에서 한 교민으로부터 중고로 산 오리털 이불을 건네받았다. 기숙사에 들어와 바람이 숭숭 새는 창문 틈을 박스테이프로 막은 후 두꺼운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창밖에는 진전없는 공사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생일날, 슈퍼에서 산 일 파운드짜리 케이크를 책상에 올려놓고 어떤 소원을 빌지 생각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침에 눈을 뜨면 방에서 작은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져 있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다 보면 수업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대마초 냄새가 풍기는 기숙사 복도를 지나 금융가의 인파를 헤치고 리버풀가 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무수히 많은 갈래로 나눠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머리카락 뭉치들이 나뒹구는 역사를 지나 동굴처럼 입을 벌린 터널로 들어갔다. 좁은 플랫폼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한 대. 두 대. 세 대. 새빨간 튜브가 2분에 한 번씩 굉음과 함께 들이닥쳤다. 줄의 앞부분에 이르면 열차가 발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상상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내 차례가 되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 틈에서 신호가 터지지 않는 휴대전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적지는 홀본역. 오르다 도로 내려오기를 반복한 도서관의 검은 나선형 계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나는 그곳으로 갔다. 무수히 많은 글자와 허무와 안개가 있는 곳으로.
<당선소감>
또렷이 보려 애쓰고 거듭 시도한 오랜 시간
시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이런저런 바람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꿈들이 전부 현실이 된다면 무언가 맞지 않는 게 아닐까. 나 역시 그것들이 이뤄지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쓴 시를 세상에 내놓고 싶은 마음과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듭니다.
시를 배우고 나서부터는 모순처럼 보이는 상태를 조금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낯선 문법의 언어를 서툴게 더듬다 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희미한 감각을 따라가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주변의 공기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더 또렷하게 보기 위해 애쓰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면서 긴 시간을 통과해 나갔습니다.
일 년 내내 여름인 나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겨울은 제가 태어난 계절이지만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기 사일 전, 폭설이 내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닥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집어 뭉쳐보려다가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엎어져 있는 저에게 누군가 다가와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삶의 여러 면에서 서툰 저를 부단히 인내해 준 가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멀리서 응원해 준 오랜 친구 Khim Geok, 저를 지켜봐 준 J가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눈물짓게 하는 시몬에게 마음을 보냅니다.
제 시를 깊이 읽어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시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김안 선생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인연이 닿았던 문우들에게, 함께 부서지고 나아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를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해주신 서대경 선생님, 선생님과의 모든 시간이 제게는 배움이었습니다. 계속 용기 내보겠습니다.
● 필명 신시유(辛施諭). 본명 신미주. ● 1991년 서울 출생, 서울 거주
<심사평>
외로움·불안의 정서, 독특한 미학으로 표현
국민에 의한 빛의 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 선지 6개월. 그 이후, 맞이하는 첫 신춘문예, 그 무대 위로 2026년의 해가 밝았다.
빛은 어떤 방향으로 퍼져가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비추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응모작을 읽어 나갔다. 시적 경향은 일상 속 색다른 발견, 계층 간의 갈등, 여성적 감각이 돋보이는 시편들, 내면의 풍경, 죽음 등등이었다. 응모작과 응모 인원은 2316편, 601명이다. 심사위원들 각자는 수많은 응모작 가운데 십여 편의 시편을 간추렸다.
네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씽크홀’은 구멍이 의미하는 그 모든 불행에서 희망까지 팔색조의 변주로 시를 탁월하게 이끌었다. ‘체리 한 알 굴리는 시간’은 시종일관 세련된 어법으로 체리와 아버지를 견주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오르골 아래의 저녁’은 오르골 소리를 통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목받았다.
그리고 신시유의 ‘그해 겨울’이었다. 각자 성격이 달랐으나 시가 요구하는 온갖 요소를 갖췄다. 하지만 미량의 차이로 우열이 갈렸다. 밀쳐놓았던 작품까지 소급하여 다시 점검했다. 시적 파격과 시의 모범을 두고 한 작품을 선정하는 동안, 창밖으론 추위에 떨던 새 몇 마리 추락하였다. 결국 파격으로 추가 기울어 신시유의 ‘그해 겨울’이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시적 공간은 타국이다. 단기적으로 해외에 머무는 여행자가 아니라 해외 거주자로서의 시적 공간을 의미한다. 외로움과 불안, 소외감을 그만의 미학적 감각으로 표현한 점이 전례 없이 독창적이었다. 다른 세 분께도 기립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박정애, 김참, 정익진 시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제목 ‘그해 겨울’이 가리키는 것: 계절이 아니라 “한 해 전체의 상태”
‘그해’는 연대기라기보다 그 해가 통째로 하나의 겨울이었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겨울은 단순히 춥고 어두운 계절이 아니라,
- 반짝임(가능성) 소진
- 학문(꿈)의 퇴색
- 몸의 침강(바닥으로 꺼지는 느낌)
- 시간감각의 붕괴(자다 깨면 노을/새벽)
- 죽음의 그림자(침묵시위, 플랫폼 상상)
같은 것들을 한 단어로 묶는 **총체적 기분(총량)**이 돼요.
2)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핵심 장치: “안개는 풍경이 아니라 압력”
“추위보다 나를 더 괴롭혔던 건 … 얇은 막처럼 깔린 안개였다.”
여기서 안개는 시각적 배경이 아니라 촉각적 폭력입니다.
- “얇은 막” → 숨 쉬기 어렵게 덮이는 것(차단/분리)
- “묵직한 바람에 실려” → 피해갈 수 없이 몸에 실려 오는 것
- “발걸음마다 살갗을 짓눌렀다” → 걷는 행위(살아가는 행위) 자체를 무겁게 만드는 압력
즉, 런던의 안개는 곧 우울/불안/소외가 몸에 남기는 중량감으로 번역됩니다. “보이지 않는다”가 아니라 “눌린다”는 감각이 중요해요.
3) ‘폐기 직전 50펜스 빵’과 ‘마지막 사서가 떠난 도서관’: 삶의 최소치와 의미의 폐기
밤 11시, 부랑자, 동전통, 폐기 직전 빵. 이 장면은 생활의 궁핍을 보여주지만, 더 깊게는 **“나도 폐기 직전”**이라는 자기감각을 깔아둡니다.
그리고 곧바로 장소가 도서관 로비로 이어지죠.
“마지막 사서마저 떠나버린 도서관 로비”
“검은 나선형 계단이 있는 책들의 무덤”
- 도서관 = 원래는 지식/상승/가능성의 공간
-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빠져나간 공동묘지로 바뀝니다.
- “책들의 무덤”이라는 명명은, 학문이 ‘살아 있는 미래’가 아니라 묻혀 있는 과거가 되었음을 말해요.
즉, 시는 “나는 공부하러 왔다”를 말하지 않고, 학문의 의미가 사라져가는 감각을 공간의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4) 숫자 “8,871km”의 역할: 감정이 아니라 “거리의 물리학”으로 고립을 증명
“태어난 곳으로부터 8,871km 떨어진 섬나라.”
정확한 수치는 감정을 더 차갑게 만들어요. “멀다”가 아니라 측정된 고립입니다.
감정이 흐릿해질수록(“시야가 흐릿해졌다”) 오히려 이런 물리적 수치가 현실의 못처럼 박히죠.
- 나는 여기(섬)에 고립되어 있고
- 돌아갈 길은 감정이 아니라 거리로 막혀 있다
5) 몸의 언어: ‘졸음’, ‘침강’, ‘뚜껑’, ‘달리기’가 말하는 것
이 시의 우울은 생각이 아니라 몸의 현상으로 옵니다.
- “하늘에 뚜껑” → 세계가 닫혀버린 느낌(출구 없음)
- “온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느낌” → 생의 중력 증가(아무것도 못 들고 일어나는 상태)
- “시도 때도 없이 졸음” → 의식이 현실을 버티지 못해 끊김
- “회색 골목을 달렸다” → 가라앉는 몸을 억지로 끌어올리려는 저항(그러나 지속되지 않음)
여기서 달리기는 ‘운동’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임시 처치예요.
6) ‘침묵시위’와 ‘관광객’의 대비: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나는 더 투명해진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침묵시위”
“상기된 표정의 관광객들 앞에 서 있으면 몸의 일부가 바람이 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침묵시위는 공동체적 애도인데, 화자는 거기서 오히려 **자기 해체(날아감)**를 느낍니다.
- 애도는 원래 사람을 묶어주지만,
- 여기서는 “나는 거기 있어도, 없어도 될 것 같다”는 투명함을 강화해요.
관광객의 ‘상기된 표정’은 잔인한 대비죠. 누군가의 죽음이 어떤 이에게는 ‘풍경/이벤트’가 되고, 화자 역시 그 풍경 속 무게 없는 점이 됩니다.
7) 오리털 이불과 박스테이프: “막아두기”의 서사
“피카델리역에서 … 중고로 산 오리털 이불”
“창문 틈을 박스테이프로 막은 후 …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여기서 이불은 단순한 방한이 아니라 은신처입니다.
- 바깥(안개/공사/도시/언어) → 침투하는 것
- 안(이불) → 몸을 접어 숨는 곳
박스테이프는 궁핍의 디테일이면서, 동시에 “침투를 차단하려는 의지”예요.
하지만 곧 이어지는 문장이 이걸 무력화합니다.
“창밖에는 진전없는 공사가 몇 달째…”
바깥은 멈춰 있고, 안은 숨어 있고, 둘 다 정지입니다.
움직이는 건 오히려 화자의 소진뿐.
8) 생일 장면의 공허: “소원”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 세계가 하나씩 사라진다
“어떤 소원을 빌지 생각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이후 … 작은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져 있었다.”
이 대목이 핵심 전환점처럼 읽혀요.
- 소원 = 내일을 상상하는 능력
- 그런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단순 무기력이 아니라 **미래 상상력의 정전(停電)**입니다.
그 직후 “물건이 사라진다”는 사건은 현실적(도난/분실)일 수도 있지만, 시 안에서는 상징성이 훨씬 큽니다.
- 물건 = 나의 일상, 나의 정리, 나의 자기통제
- 사라짐 = 내가 나를 유지하는 장치들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느낌
- 찾다가 수업 시간이 됨 = “삶이 자꾸 늦는다 / 빼앗긴다 / 따라잡지 못한다”
9) 리버풀가–홀본–나선계단–터널: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가 곧 내면의 하강
후반은 이동 묘사가 길어지면서, 시가 하나의 하강 서사를 완성합니다.
- 금융가 인파 → “무수한 갈래로 나뉘는 사람들”
- 역사의 머리카락 뭉치 → 버려진 신체/잔여물(불쾌한 현실성)
- 동굴처럼 입 벌린 터널 → 지하/무의식/죽음의 이미지
- 좁은 플랫폼의 빽빽한 줄 → 압박/몰림
- “열차가 발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상상” → 위험한 충동이 ‘상상’의 형태로 반복됨 (실행이 아니라, 그 그림자가 자꾸 떠오르는 상태)
그리고 목적지가 “홀본역”, 다시 “검은 나선형 계단”입니다.
- 계단을 “오르다 도로 내려오기를 반복”한다는 문장 하나로,
학문도 생활도 상승이 아니라 제자리 반복이 됩니다.
10) 마지막 문장의 결박: “글자–허무–안개”는 같은 물질이다
“무수히 많은 글자와 허무와 안개가 있는 곳으로.”
이 시는 결국 “학문(글자)”이 “허무”와 “안개”와 한 덩어리가 된 세계로 끝나요.
- 글자는 의미를 주는 게 아니라 흐릿함을 더하는 것
- 허무는 감정이 아니라 환경이 되고
- 안개는 풍경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가 되어,
모든 것을 같은 질감으로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결말은 결론이 아니라 귀환이에요.
매일 그곳으로 간다 = 매일 그 상태로 돌아간다.
이 시의 문체가 주는 효과 3가지
- 산문처럼 길게 이어지는 호흡
→ 끊어 읽을 틈이 없어서, 독자도 화자처럼 “숨이 막힌 채” 따라가게 됨. - 디테일의 축적(빵값, 역명, 계단 색, 2분 간격, 박스테이프)
→ 감정 설명 대신 “현실의 구체성”으로 고립을 증명. - 색채의 통제(회색, 검은, 새빨간)
- 회색/검은: 무기력·침잠
- 새빨간 튜브: 지나치게 선명한 ‘삶의 기계’(열차는 정확히 오고, 나는 정확히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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