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도의 감정 / 권라율

<당선작>
파도의 감정 / 권라율
여름도 여름이랑 사이가 좋아야 해요
김정 씨랬죠? 김정 씨, 생각은 파도를 타죠
김정 씨가 굴러요 돌돌
몇 달 아니 몇 년 끙끙 밀린 연차가
달려가는 달력이 달달 시계가 흘낏
소금사막이나 빙하는 진작 품절이고
영어도 못 하고 할랄 음식도 모르면서
그저 구를 만큼 구르고 싶어서
파도와 한 몸으로 조는 붉은가슴도요
생각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서
만국기 휘날리는 유람선 갑판 뒤에 올라탄
먼지 낀 동네 버스처럼
차창 가까이 날아드는 불빛에
이물감으로 흔들려요
홍학의 부리나 들소 뿔의 파편
흰 산봉우리를 기어가는 설표의 꼬리뼈
가끔 캐리어 속 번뜩이는 칼날들
깊숙이 넣어둔 조약돌 몇 개
퇴근길 당신은
뜨거운 낮에 든 서늘한 목덜미에 화들짝
밤낮이 서로 먼 날이네
당신은 턱까지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우며
허리 버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구겨진 잠은 주말로 접어두고
맥주 한 캔에 다시 펼쳐 보자 할 때
돌돌 툴툴 구르며 어느 선창가
후미진 호텔로 들어가는 캐리어 하나
아무 방이나 주세요
당신은 마른 빵 한 조각으로
오줌내 나는 바닥으로 앉아
비로소 캐리어를 열어보려는데
수천수만 킬로미터밖에서도
꾹 다문 입술의 여권과 꾹꾹 따라온
여름 저녁이라는 감정
오로라를 보러 갈 걸 그랬지?
오로라에는 여름 감정이 없다는 듯
딴전을 피우는 김정 씨
극야의 눈동자는 별의 미간만큼이나 멀어서
신은 목덜미에서 허리춤에서 자꾸 흘러내린대요
하늘이 맥없이 툭, 떨어지면
느린 목 근육을 키워야지
벽을 가로지르는 바퀴벌레의 다리 힘처럼
성경이나 코란 불경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김정 씨, 소뇌 대뇌에도
운동장이 있어 지퍼를 열면 빛과 구름 바람이
우르르 쏟아진다더군요?
하늘만 한 운동장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를 줄곧
온 우주가 달려온 거라면요?
먼지 날리듯
홍학 부리가 차창에 부딪히듯
설표가 당신이 돌진해가는 거라면요?
캐리어 속에서요 무한한
김정 씨, 돌아서 어느 여름 중이신가요?
세 시에는 세 시의 눈동자가
다섯 시에는 다섯 시의 눈동자가
성운 사이 흩날리면서
<당선소감>
-
김정 씨,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고백하자면 신문사로부터 당선 전화를 받은 날 밤, 저는 한숨도 못 자고 희망과 절망으로 허우적댔습니다. 당신이 생각났어요. 우리가 만났을 때는 여름이었지요. 겨울이기도 했습니다.
우린 처음 만난 사이답게 적당히 즐거웠고 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대화 주제는 생생한 것이었어요. 늘 그러하듯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해 내어야 하는 일을 자문해야 했어요.
내심 삶이라든가 죽음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뿌듯했습니다. 열심히 설명하고 열심히 들었어요. 우린 끝내 다정했어요. 전 구직자였고 당신은 상담사였으니까요. 혹은 저는 상담사였고 당신은 구직자였습니다.
난데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요. 사람이나 여행이나 난데없이 오니까요. 이번 일만 해도 그래요. 대책 없어서 빛나는 누더기도 있는가 봐요.
광주일보 관계자분들과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양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 선생님들과 문우들 소중한 남편에게 저의 마음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도 자신을 응대하기 위해 타인을 경청하는, 세상의 모든 김정 씨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경북 영양 출생 ●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
국내외로 여전히 불안정한 시국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불안’은 그 ‘끝’을 기다릴 수 있는 일시적 ‘변수’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받아들여야 할 일상의 일단이다. 이번 응모작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특히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적 표현과 상상력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될 수 있는 언어의 ‘전시실’을 얼마나 개성적인 설계로 구축하고 있는가를 보다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 과정에서 남은 작품은 ‘파도의 감정’, ‘유령의 목록’, ‘튤립’이었다. ‘튤립’의 응모자는 그 언술 속에 유희성 짙은 특유의 리듬이 깊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단지 흥을 돋우는 운율의 층위가 아니라, 이미지의 확장으로 탐미적인 시공간을 만들어 낼 만큼의 힘이 있었다. ‘유령의 목록’의 응모자는 현실과 우화 사이 절묘한 위치에 시공간을 구축할 줄 안다. 가령 “7층과 8층 사이” 7.5층에 멈춘 승강기의 공간이다. 응모작 중에서 ‘유령의 목록’에 특히 주목했다. 섬광과 함께 남겨진 “빈 의자” 위에 구르고 있는 “펜 하나”의 이미지는 쓸쓸한 삶과 죽음의 선연한 잔해였다.
당선작으로 ‘파도의 감정’을 선정했다. 시의 외관은 가벼운 돛배 같았지만 묵직한 닻을 질질 끌고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최종심의 다른 응모자들처럼 자신만의 색깔로 시공간을 경쾌하게 구축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한 가지 더 눈길이 가는 점이 있었다. 시라는 형식이 미지의 “오로라”를 향해 여행하는 돛이라면, 돛을 올린 바로 그 자리에 현실의 “여름”을 닻처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 무겁고 차가운 닻은 현실 세계와 미적 세계 사이에 균열을 내며 박혀 있다. 그 균열 속에서의 첨예한 균형감각이 다른 응모자에 비해 조금 더 주목되는 점이었다. 더구나 금도끼 은도끼 같은 그의 닻은 다른 응모작 속에서도 “딥시크”, “산성비”, “비관세 장벽” 등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 든든했다. 그 넓고 깊은 여행을 계속하시길 바란다.
심사위원 : 김중일 시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화자와 “김정 씨”: 한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직업/역할’의 호명
시에서 “김정 씨”는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상담사/콜센터/창구 담당/돌봄 노동자 등)을 가리키는 호칭의 가면처럼 읽혀요. 실제 당선소감에도 “오늘도 자신을 응대하기 위해 타인을 경청하는, 세상의 모든 김정 씨”에게 인사를 하잖아요.
그래서 이 시는 한 개인에게 건네는 말 같으면서도, 동시에 ‘듣는 일을 하는 사람’ 전체에게 던지는 연설처럼 울립니다.
그리고 이 구조가 중요해요. “김정 씨”는 남의 감정을 받쳐 주는 사람인데, 시는 끝내 그에게 묻습니다.
“김정 씨, 돌아서 어느 여름 중이신가요?”
즉, 늘 타인의 여름(피로/감정)을 처리해 주는 당신은, 정작 당신의 여름을 어디에 숨겨 두고 있느냐는 질문이죠.
2) 첫 행의 문장: “여름도 여름이랑 사이가 좋아야 해요”
이 한 줄은 시 전체의 열쇠예요.
- 보통 우리는 “나도 나랑 사이가 좋아야 한다”고 말하죠. 그런데 시는 여름에게도 “여름이랑 사이가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 즉 계절(상황/현실) 자체가 자기 내부에서조차 불화하고 있다는 느낌.
- 여름은 원래 뜨겁고 밝고 생기 있는 계절인데, 이 시의 여름은 뜨거운 낮에 ‘서늘한 목덜미’가 튀어나오고, “여름 저녁이라는 감정”이 따라붙고, “여름 감정이 없는 오로라”를 꿈꾸게 만들죠.
- 한마디로, 계절이 계절답게 굴지 못하는 세계(기후/노동/삶의 리듬이 깨진 세계)를 전제합니다.
3) “생각은 파도를 타죠 / 김정 씨가 굴러요 돌돌”
여기서 ‘파도’는 단순한 바다 풍경이 아니라 생각의 운동 방식이에요.
- “생각은 파도를 타죠”
→ 생각이 직선으로 진행하지 않고, 밀려왔다가 빠졌다가, 갑자기 커졌다가 하는 방식으로 온다는 말. - “김정 씨가 굴러요 돌돌”
→ ‘생각이’ 아니라 ‘김정 씨’가 굴러요. 즉, 생각의 파도에 사람이 굴려진다는 감각입니다.
그리고 곧장 “밀린 연차”, “달려가는 달력”, “시계가 흘낏”이 붙죠.
이건 여행 욕망의 출발점이 사실은 낭만이 아니라 과로·소진·휴식의 빚이라는 뜻이에요.
4) “소금사막이나 빙하는 진작 품절”
이 구절이 시를 확 잡아당깁니다. 웃기면서도 서늘해요.
- 원래 소금사막, 빙하, 오로라 같은 건 ‘자연의 장관’인데
- “품절”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연은 상품/관광 패키지/소비 목록이 됩니다.
- 동시에 “빙하는 진작 품절”에는 기후위기(녹아 사라짐) 같은 현실도 비치죠.
→ 도망가고 싶은 사람에게 ‘도망갈 자연’조차 이미 닳고 소모되었다는 체념.
그 뒤 “영어도 못 하고 할랄 음식도 모르면서”는 자기비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큰 말이에요.
세계는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건(언어/돈/정보/몸 상태)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남는 건 “그저 구를 만큼 구르고 싶어서”—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굴러 빠져나가고 싶은’ 최소 욕망뿐입니다.
5) 여행의 환상은 곧 ‘이물감’이 된다: 유람선이 동네버스로 바뀌는 순간
중반의 장면이 멋지게 전복돼요.
- “만국기 휘날리는 유람선 갑판”
→ 세계를 도는 자유의 상징처럼 시작하지만, - 곧 “먼지 낀 동네 버스처럼 / 차창 가까이 날아드는 불빛에 / 이물감으로 흔들려요”
→ 화려한 유람선이 갑자기 피곤한 일상 교통수단으로 내려앉습니다.
여행이 “해방”이 아니라 낯섦의 멀미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시에서 ‘여행’은 현실을 지워주는 낭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감각(피로/불안)을 다른 배경 위에 그대로 투사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6) “캐리어”의 정체: 이동 수단이 아니라 감정의 저장고(=밀봉 장치)
시의 핵심 오브제가 캐리어예요. 캐리어는 두 겹입니다.
1) 겉의 캐리어: 퇴근 후 도망/출장/혼자 호텔
- “후미진 호텔… 아무 방이나 주세요”
- “마른 빵… 오줌내 나는 바닥”
여기엔 낭만이 없고, 도피의 궁핍함만 있죠.
도망은 화려한 리조트가 아니라 “아무 방”입니다.
2) 속의 캐리어: 감정의 밀봉/흉기/돌멩이/여권
캐리어 안에는 기묘한 것들이 있어요.
- “번뜩이는 칼날들”
- “깊숙이 넣어둔 조약돌 몇 개”
- 그리고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 “꾹 다문 입술의 여권과 꾹꾹 따라온 / 여름 저녁이라는 감정”
여권은 원래 ‘이동의 허가증’인데, 여기서는 “꾹 다문 입술”입니다.
→ 말하지 못한 것, 삼킨 말, 상담사/노동자가 매일 봉인하는 말이 여권처럼 접혀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여름 저녁이라는 감정”은 장소가 아니라 기분의 계절입니다.
도망쳐도 따라오는 건 사건이 아니라 **무드(정서적 잔향)**라는 뜻.
7) “오로라를 보러 갈 걸 그랬지?”: 여름 감정이 없는 곳을 꿈꾸는 회피
오로라는 시에서 일종의 ‘감정 비우기’의 환상이에요.
- 오로라=극야/차가움/여름이 없는 곳
- 그래서 “오로라에는 여름 감정이 없다는 듯 / 딴전을 피우는 김정 씨”가 나와요.
여기서 “딴전”은 단순한 산만함이 아니라 감정을 외면하려는 반사행동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곧
- “극야의 눈동자는 별의 미간만큼이나 멀어서”
결국 그곳은 너무 멉니다.
즉, 감정이 없는 곳은 존재해도, 거기까지 갈 수는 없다는 자각이죠.
8) 갑자기 ‘신’과 ‘뇌’가 등장하는 이유: 감정을 지탱하는 근육(버티기)의 문제
후반의 전환이 강렬합니다.
“신은 목덜미에서 허리춤에서 자꾸 흘러내린대요
하늘이 맥없이 툭, 떨어지면
느린 목 근육을 키워야지”
여기서 신/하늘은 “믿음”이라기보다 **삶을 지탱하는 무게(책임/현실/감정)**로 읽히는 게 자연스러워요.
- 목덜미/허리춤 = 몸이 버티는 자리
- “버클 떨어진 줄도 모르고”라는 앞부분과 이어지죠.
→ 일상에서 이미 버클이 떨어진 채 버티고 있는데, 하늘(무게)이 툭 떨어지면 목 근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근육의 비유가 “바퀴벌레의 다리 힘”인 것도 중요해요.
고상한 영성 대신 가장 생존적인 힘을 들고 오니까요.
이 시가 가볍게 노는 것 같아도, 결국 말하고 싶은 건 “살아남는 법”이에요.
9) “소뇌 대뇌에도 운동장이 있어… 지퍼를 열면 빛과 구름 바람이 우르르”
여기서 시는 상담 장면처럼 변합니다.
- 우리는 보통 감정을 “마음”에 둔다고 생각하지만, 시는 **뇌(소뇌/대뇌)**를 꺼냅니다.
- 그리고 뇌 안에 “운동장”이 있다고 해요.
→ 운동장 = 뛰고, 달리고, 소리 나고, 바람 부는 내부의 광장 - “지퍼를 열면”
→ 앞에서 우리는 지퍼를 올려(닫아) 버텼죠.
→ 이제는 지퍼를 열어 쏟아내는 쪽으로 전환됩니다.
이건 곧 “경청”의 역전이에요.
늘 남의 것을 받아주던 “김정 씨”에게도, 당신 안에는 우주만 한 운동장이 있고, 열면 쏟아질 것들이 있다는 선언.
10) 마지막: 시간마다 다른 눈동자—감정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시각별 파편’으로 흩날린다
종결부가 아주 섬세합니다.
“세 시에는 세 시의 눈동자가
다섯 시에는 다섯 시의 눈동자가
성운 사이 흩날리면서”
감정은 하나의 “나”로 뭉치는 게 아니라,
세 시의 나 / 다섯 시의 나처럼 시간마다 다른 결로 흩어져 떠다닙니다.
이게 왜 “파도의 감정”이냐면, 파도도 똑같이
- 같은 바다에서
- 같은 물이지만
- 매 순간 다른 파형으로 밀려오니까요.
시가 마지막에 묻는 “어느 여름 중이신가요?”는 결국 이런 뜻이 됩니다.
- 당신이 겪는 여름은 ‘한 계절’이 아니라
- 시간마다 다른 눈동자로 쪼개져 오는 감정의 연속이다.
11) 이 시가 주는 정서적 결론
이 작품은 “여행 가자/힘내자” 같은 단순한 위로를 하지 않아요.
대신,
- 우리는 연차도 밀리고,
- 여름은 너무 뜨겁고,
- 도망쳐도 감정은 따라오고,
- 지퍼를 올리며 버티지만,
- 언젠가 열면 우주가 쏟아질 만큼 안에 많은 것을 품고 있다
는 사실을, 유머 섞인 문장과 우주 규모의 이미지로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묘하게 이런 감각이 남아요:
“나는 지금도 굴러가고 있지만, 그 굴러감 자체가 파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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