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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디아스포라 / 이형초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 좁은 열차에 갇혀 초원을 가로질렀던 순간처럼 긴 철로를 지나 부모를 만나러 가고 싶다 척박한 평야에서 씨앗을 뿌리고 토굴을 짓고 새를 잡아먹으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먼 사람들의 이야기
흠뻑 젖은 곡괭이와 밤의 나뭇가지들

따뜻한 진열창에 넣어두자 우연한 행인처럼 그곳을 지나치며 우리의 역사래,
러시아어로 중얼거릴 것이다 유리창 사이로 언어와 계절이 바뀌고

러시아인도 카자흐인도 한국인도 아닌

무국적자의 밤이 쌓이는 곳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자신들만의 농장을 만들었답니다, 말하던 큐레이터는 사실 그들의 가족이고, 새벽마다 불을 밝히는 경비원은 자기 이름 대신 그들의 이름을 외우던

가득 찬 박물관 모두 연결된 사람들
텅 비어 있어도 가득 찼다고 믿으면
어디든 둘러볼 곳은 있지
결국 우리는 같은 출구로 나갈 테니까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사람은 늘 몰려든다 어디에서 불어온 눈바람이 머리가 되고 어디에서 쌓인 눈송이가 몸이 되는지

몰라도 좋은 박물관, 다 사라져도 기억해 주는 이야기,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당선소감>

 

   잘 쓸 자신은 없어도 포기 안 할 자신 있어… 멈추지 않겠다

작년 겨울, 이사를 했습니다. 화분을 들이고 새 커튼을 달며 집 안에 온기를 채웠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세상을 마주하는 일은 외롭지만, 동시에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를 더 새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빈 세상 앞에 서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시를 썼습니다. 가득 찼다고 믿으면, 어디든 다시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 소식을 듣고 저보다 더 많이 울어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나의 기쁨을 온전히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꿈은 결코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길을 닦아주었기에 저는 전력을 다해 달릴 수 있었습니다. 저와 이별했던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번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저를 믿어주신 천수호 선생님과 안도현 선생님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몇 번의 실패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2023년 12월, 서로의 편지를 나눠 읽으며 펑펑 울었던 수진, 은지, 민이 그리고 스터디 멤버들. 앞으로도 저와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았던 날, 어머니의 꿈에 할아버지가 나오셨다고 합니다. 두꺼운 봉투 속에 편지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고요. 아마도 지혜롭게 살아온 어머니의 삶이 적혀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제일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언어 속에서 저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잘 쓸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쓰겠습니다.

2001년 목포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숙련된 솜씨로 역사적 상상력에 시적 사유 버무려

이번 본심에는 특이사항이 2개 있었다. 첫째, 이례적으로 응모작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으나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이 예년에 비해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심사위원 두 명이 최종 고려 대상으로 들고 온 2명의 작품이 처음부터 일치했다.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작품은 충분히 수일했다. 최종적으로 검토된 것은 ‘눈사람’ 외 4편과 ‘디아스포라’ 외 4편이었다. 둘 중 어느 작품이 당선작이 되더라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심사위원들은 재독과 숙고를 거듭했다.

‘눈사람’은 깊은 사유와 단정한 문장이 인상적이었고 “사람을 안으면 자꾸만 녹았습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시 전체를 잘 마무리하며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선에 근접했다. ‘디아스포라’는 활달한 상상력과 더불어 사유를 시적 플롯을 통해 알맞게 조직하는 데 있어 숙련된 솜씨를 선보였다. 매끄럽지 않은 대목이 없었고 시 전체가 환기시키는 디아스포라적 상상력 역시 생경한 관념이나 강변 없이 적실하고 진중하게 전달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두 작품 모두 당선에 값한다는 판단을 공유했지만 역사적 상상력에 가닿는 시적 상상력의 규모와 넓이, 그리고 예컨대, 시의 제목과도 맥락이 닿는,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라는 표현에 담긴 재기 역시 손색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디아스포라’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내밀기로 결정했다. 만족스러운 마음 그리고 큰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심사위원 : 조강석, 정호승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제목이 먼저 만든 렌즈: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멀리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 이동이 강제되었거나,
  • 어딘가에 정착했지만 ‘완전한 소속’을 얻지 못하고,
  • 기억과 언어가 계속 바뀌는 자리를 말하죠.

이 시는 그 상태를 설명하지 않고, 박물관을 짓는 상상으로 보여줍니다. 즉 “정의” 대신 “공간”으로 독자를 설득해요.


2) 시의 큰 구조: 박물관 동선(입구 → 진열창 → 큐레이터/경비원 → 출구)

이 작품은 내용이 곧 관람 동선이에요.

(1)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 가정법의 힘

“생긴다면”이라는 조건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합니다.

  • 아직 없다는 결핍(역사가 제대로 ‘집’이 되지 못함)
  • 그러나 지을 수 있다는 의지(기억을 세우는 능동성)

그리고 “우리”는 특정 민족을 넘어 ‘연결된 사람들’ 전체로 확장됩니다(뒤에서 “모두 연결된 사람들”로 명시).


3) 핵심 이미지 1: 입구를 “화물차처럼” 만들자

“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

이 한 줄이 시의 윤리적 중심이에요. 박물관 입구가 보통 상징하는 건 “환영/개방/권위”인데, 여기서는 정반대로:

  • 화물차: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운송
  • 좁은 열차: 갇힘, 통제, 불안
  • 긴 철로: 돌아갈 수 없는 거리, 시간의 길이

즉, 이 박물관은 “자랑의 전당”이 아니라 상처의 통로로 시작합니다.
관람은 처음부터 **체험(통과)**이 되고, 독자는 ‘입장’과 동시에 “그때”로 끌려 들어가요.


4) 핵심 이미지 2: “척박한 평야… 씨앗… 토굴… 새를 잡아먹으며”

여기서는 역사적 디테일을 늘어놓지 않는데도, 생활감이 강합니다.

  • 씨앗: 정착의 의지(‘여기서 살아야 한다’)
  • 토굴: 생존의 최소 조건
  • 새를 잡아먹음: 궁핍의 구체성
  • 봄 기다림: 시간이 구원이 되는 방식

즉 디아스포라는 “떠돌이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노동으로 제시돼요.


5) ‘전시’의 윤리: “따뜻한 진열창에 넣어두자”

여기서 갑자기 박물관다운 문장이 나옵니다.

“따뜻한 진열창에 넣어두자”

‘따뜻함’은 보통 위로인데, 진열창의 따뜻함은 미묘하게 불편해요.

  • 진열은 안전하게 보관하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것을 박제합니다.
  • 따뜻함은 배려이지만, 동시에 거리감 있는 관리이기도 하죠.

그래서 다음 행이 결정적입니다.

“우연한 행인처럼 그곳을 지나치며 우리의 역사래, / 러시아어로 중얼거릴 것이다”

“우리의 역사래”는 감탄이 아니라 남의 구경처럼 들려요.
게다가 러시아어. 즉 역사에 붙은 언어가 ‘우리말’이 아닐 수 있음을 정확히 찌릅니다.


6) 정체성의 공백을 한 줄로: “러시아인도 카자흐인도 한국인도 아닌”

이 대목은 선언문처럼 단단해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상태 = 디아스포라의 핵심을 삼단 부정으로 처리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무국적자의 밤이 쌓이는 곳”

여기서 “밤”은 단순 시간대가 아니라

  • 국적/신분이 취약해지는 시간
  • 말이 줄고, 생존이 남는 시간
  • 기록이 지워지기 쉬운 시간
    입니다. “쌓인다”는 동사는 그 시간이 개인에게만 남지 않고 **집단의 층위(역사)**로 축적됨을 보여줘요.

7) 이 시가 정말 영리한 장치: 큐레이터와 경비원

“말하던 큐레이터는 사실 그들의 가족이고,”
“새벽마다 불을 밝히는 경비원은 자기 이름 대신 그들의 이름을 외우던”

이 부분이 이 시를 ‘진중하게’ 만드는 핵심이에요.

  • 큐레이터(해설자)는 보통 객관성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당사자(가족)**입니다.
    → 역사는 ‘남이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피가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 경비원(지키는 사람)은 익명의 노동자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자기 이름 대신 그들의 이름을 외우는 사람입니다.
    → 기억은 혈연만의 몫이 아니라, **비혈연의 윤리(타인의 이름을 외우는 일)**로 확장돼요.

즉 박물관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기억을 유지하는 노동” 전체입니다.


8) 역설의 미학: “텅 비어 있어도 가득 찼다고 믿으면”

“텅 비어 있어도 가득 찼다고 믿으면 / 어디든 둘러볼 곳은 있지”

이건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생존술이에요.

  • 실제로는 비어 있음(잃어버림, 부재, 기록의 공백)
  • 그러나 믿음으로 채움(상상, 구전, 이름, 연결)

“믿으면”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사실 확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합의하는 진실(기억의 방식)**이죠.


9) 출구의 의미: “결국 우리는 같은 출구로 나갈 테니까”

이 문장은 의외로 따뜻하면서도 서늘합니다.

  • 따뜻함: 결국 ‘우리’는 함께 나간다(연결)
  • 서늘함: 출구는 하나(선택지가 적다, 역사가 정한 동선)

그리고 이 말은 앞의 “러시아인도 카자흐인도 한국인도 아닌”을 뒤집어
**국적과 무관한 ‘같은 출구(인간의 조건)’**로 통합하는 효과도 있어요.


10) 마지막의 눈바람/눈송이: 사람의 형성은 어디서 오는가

“어디에서 불어온 눈바람이 머리가 되고 / 어디에서 쌓인 눈송이가 몸이 되는지”

여기서 “사람”은 완성된 개인이 아니라,

  • 여러 장소에서 불어온 것(바람)
  • 여러 시간에 쌓인 것(눈송이)
    의 합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곧바로:

“몰라도 좋은 박물관”

이 박물관은 “정확한 연대기”보다 사라져도 기억해주는 이야기를 목표로 합니다.
디아스포라에게 가장 잔인한 건 “잊힘”이니까요.


11) 이 시의 정서: 비극의 과장이 아니라 ‘진정한 평정’

심사평처럼, 이 시는 “강변”을 하지 않아요.

  • 억울함을 직접 외치지 않고
  • 눈물의 톤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 **공간의 설계(박물관)**로 역사적 폭력과 생존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습니다. 읽고 나면 “설명”보다 “동선”이 기억나거든요.


12) 당선소감과의 연결: “가득 찼다고 믿으면”

당선소감에서 시인이 말한 건,

  • 낯선 곳으로 이사(작은 디아스포라)
  • 외롭지만 감사(새로워짐)
  • “가득 찼다고 믿으면 다시 둘러볼 수 있다”
    라는 동일한 문장 구조예요.

즉 이 시는 거대한 역사(러시아·카자흐 초원)와 개인의 경험(이사)을
“빈 것과 찬 것”의 감각으로 연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