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물왕 저수지 / 성유림

<당선작>
물왕 저수지 / 성유림
저수지 옆 주유소에서 일하는 남자는
주유소에 산다
남자가 자주 꾸는 꿈은
주유소에 불이 나는 꿈
불이 나는 꿈을 꾸고 나면
다음 날은 꼭 비가 내렸다
젖은 수건으로 등을 닦으며 그는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는 순간 잊혀지는 꿈의 장면들에 대해
그는 밤마다 저수지 주변을 걷는다
남자는 주유소에서 머무르는 시간보다
더 오래
빛이 튀는
저수지를 바라본다
반짝이는 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웃는 표정들이 젖어간다
나무 틈에서 튀어나온 고양이가
젖은 도로로 달려 나가고
막을 새도 없이
비가 쏟아진다
남자의 바로 앞에서
주유소가 타오른다
번져가는 불빛 속에서 누군가
예쁘다, 예쁘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반쯤 젖은 담배를 입에 문다
타오르는 것들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서서히
어두운
빛 속에서 눈을 뜬다
<당선소감>
-
저는 가끔 밥을 먹는 일이, 버스를 타는 일이, 공원을 걷는 일이, 잠을 자는 일이 미안하게 느껴집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가 끝까지 무사히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어딘가에 남겨진 몫을 몰래 가져온 것처럼 마음에 걸립니다.
오랜만에 꺼내 본 일기장 속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미안하다'는 사과였습니다. 이 사과가 용서를 바라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시를 쓰는 일은 사과를 가장 느린 속도로, 조심스럽게 반복하는 일입니다. 쉽게 면죄부를 얻지 않기 위해서요.
어렸을 땐, 말을 잘하는 사람만이 시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금의 저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걸음마를 처음 뗀 아기처럼, 어떤 말이 괜찮은지 오래도록 머뭇거립니다.
모두가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 버린 일들도 계속해서 곱씹는 저는, 도무지 빨라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꾹꾹 눌러쓰고 싶습니다. 무엇도 함부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내뱉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부족한 제 시를 읽어주시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선생님들,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를 쓰는 제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들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분신과도 같은 엄마와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1999년 경기도 출생전
<심사평>
-
시간은 무심히 지나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묶인 것처럼 목줄에 당겨져 앞발을 치켜들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목을 조이는 그 순간 속에 시가 있다. 그때는 분명 현재지만 어쩌면 과거와 미래가 한꺼번에 체감되는 몸의 시간일 것이다. 달려온 시간과 달려갈 시간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속도계 같은 것. 그 불가능한 계측의 눈금이 바로 시일 것이다. 예년보다 늘어난 응모작들이 하나같이 일상의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고투를 선보였기에 꺼낸 말이다. 역사나 담론 혹은 차이와 차별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을 내세운 시편들보다 파도처럼 넘어오는 하루하루의 정념들에 바쳐진 시는 그래서 매번 인생의 극점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좋은 작품이 많았고 때문에 논의가 길었다. 김태훈의 '자습'이 세계와 화자의 만남을 곡진하면서도 눈부시게 그려냈다면, 김도열의 '얼음의 문법'은 단단한 정념으로 세계를 포착하는 힘이 느껴졌다. 다만 그 수려함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응전이 짚이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역할놀이' 등을 보낸 나은이는 경쾌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세계의 비의를 놓치지 않는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김다은의 '시력표'는 노련한 시선을 통해 세계의 침범을 구체적 형상으로 그려낼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겨루었지만 자신의 언어에 대한 확신이 더 필요해 보였다.
성유림의 '물왕저수지'는 잔잔한 저수지와 불타는 주유소를 꿈과 현실의 교차 속에 보여준다. 그런 평온과 재난은 내면의 일이지만 또한 세계의 일기도 해서 우리는 물길과 불길 사이에서 기이한 불안을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마침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휘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다다른 뒤에야 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함께 보내온 '쏟아지고 있었다'가 보여준 날카로운 도약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안전한 짜임새에 대한 우려를 상당 부분 상쇄한다는 점도 미래에 대한 믿음을 두텁게 하였다. 심사자들은 예외 없이 성유림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하였으며 다른 이들의 시 역시 곧 지면에서 보게 되리라 예측했다.
심사위원 : 정끝별, 장석남, 조용미, 신용목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제목부터 이미 역설: “물왕(물의 왕)”인데 불을 막지 못한다
‘물왕 저수지’는 **물의 권력(저수지)**을 떠올리게 해요. 물은 원래 불을 끄는 요소죠. 그런데 이 시에서 물은 불을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물은 젖음으로 존재하고, 불은 빛으로 번집니다.
- 물: 저수지(정지된 큰 물), 비(쏟아짐), 젖은 수건/도로/담배(잔여)
- 불: 주유소 화재(재난), 번져가는 불빛(미학화된 재난), “어두운 빛”(모순어)
즉 이 시의 물은 “소멸”이 아니라 “스며듦(젖음)”으로, 불은 “파괴”이면서 동시에 “빛(보이게 하는 것)”으로 움직여요. 그래서 둘이 싸우지 않고 겹쳐서 지속됩니다.
2) 첫 연: 주유소에 사는 남자 = ‘불’ 가까이 사는 삶
“주유소 옆 주유소에서 일하는 남자 / 주유소에 산다”는 설정이 강력해요. 직장과 집이 겹치면서 남자의 삶은 항상 가연성(위험) 옆에 고정됩니다.
그래서 꿈도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직업적 예지몽처럼 반복돼요.
- “자주 꾸는 꿈” = 주유소 화재
- 꿈을 꾸고 나면 “꼭 비”가 옴
여기서 비는 위로 같지만 동시에 섬뜩해요.
꿈의 불 → 다음 날 비.
마치 세계가 “응답”하는 것 같거든요. 남자는 비를 보며 더 확신하게 됩니다. 내 꿈은 그냥 꿈이 아니라고.
3) “샤워를 마치는 순간 잊혀지는 꿈” — 지워지는 장면과 남는 감각
남자는 젖은 수건으로 등을 닦으며 생각하죠. 꿈은 샤워처럼 씻겨 내려가지만, 이상하게 불안만 남습니다.
이 대목이 시의 정서적 엔진이에요.
- 꿈의 장면은 지워진다(기억의 삭제)
- 그런데 꿈의 공포는 지워지지 않는다(감각의 잔존)
그래서 남자는 밤마다 걷습니다. “주유소에서 머무르는 시간보다 / 더 오래” 저수지를 봅니다.
즉 그는 불(주유소)에서 벗어나 물(저수지) 쪽으로 가지만, 그건 휴식이라기보다 **불안을 다루기 위한 의식(ritual)**에 가까워요.
4) 저수지 장면: “빛이 튀는 물”과 “플래시” — 아름다움이 젖어가는 방식
저수지는 반짝이고, 사람들은 사진을 찍습니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웃는 표정들이 젖어간다.”
여기가 정말 독특해요. 보통은 비가 와서 젖는 건데, 여기서는 **플래시(빛)**가 터질 때 표정이 젖어요.
이건 두 겹으로 읽힙니다.
- 사진의 폭력성
사진은 순간을 붙잡는 행위지만, 동시에 사람을 ‘장면화’합니다. 웃음은 살아 있는 감정이라기보다 기록을 위한 표정이 되고, 그 표정이 “젖는다”는 건 감정이 흐물해지고 진짜가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 물과 빛의 동일화
물이 반짝이는 것도 빛이고, 플래시도 빛입니다.
이 시에서는 물과 불이 결국 “빛”에서 만나요. 저수지의 반짝임(물빛)과 플래시의 번쩍임(인공 빛)이 겹치면서, 곧이어 올 **불빛(화재)**의 예고편처럼 보입니다.
5) 고양이의 돌출: 막을 수 없는 사건의 스위치
“나무 틈에서 튀어나온 고양이”는 영화의 점프컷처럼 튀어나오고, “막을 새도 없이 / 비가 쏟아진다”.
고양이는 흔히 불길/길흉의 징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무엇보다 **‘예측 불가능한 현실의 돌발성’**을 대표해요.
그 돌발성이 비를 불러오고, 비는 곧바로 다음 장면의 재난을 여닫습니다.
6) 가장 섬뜩한 전환: “비가 쏟아진다 / 남자의 바로 앞에서 / 주유소가 타오른다”
보통 비는 불을 끄죠. 그런데 이 시에서 비는 불과 같은 시간에 옵니다.
- 비가 내리는 장면이 “재난을 막는 장치”가 아니라
- 재난을 “개시하는 신호”로 바뀝니다.
이때 시의 리듬도 칼처럼 끊겨요.
“남자의 바로 앞에서”라는 한 줄이, 독자에게도 ‘정면 목격’의 위치를 강제합니다. 남자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라 현장 한복판의 증인이 됩니다.
7) “예쁘다”의 공포: 재난을 미학화하는 목소리
“번져가는 불빛 속에서 누군가 / 예쁘다, 예쁘다”
이 한 줄이 이 시를 단순 악몽 시가 아니라 동시대의 시로 만듭니다.
불은 파괴인데, 동시에 빛의 장관이기도 하니까요. 누군가의 “예쁘다”는 말은 두 가지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 재난을 보는 타인의 무감각/관음
- 재난조차 이미지로 소비되는 세계
아까 저수지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웃는 표정들이 젖어가던” 장면과 정확히 연결돼요.
사진-플래시-미학화의 흐름이, 이제는 화재-불빛-예쁘다로 이어집니다.
8) 결말의 핵심: “깨어나지 못한 채” 그리고 “어두운 빛”
남자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 반쯤 젖은 담배”를 뭅니다.
- 불(담배)도 있고
- 물(젖음)도 있습니다.
이 작은 사물 하나에 시 전체의 구조가 들어가요.
불도 물도 서로를 끝내 지우지 못한 채 반쯤씩 남아 있는 상태.
그리고 마지막:
“타오르는 것들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 어두운 빛 속에서 눈을 뜬다”
보통 “눈을 뜬다”는 해소인데, 여기서는 해소가 아니라 지속입니다.
‘어두운 빛’은 모순어인데, 딱 그만큼 이 시의 현실도 모순적이에요.
불빛은 번쩍이지만, 그것이 밝히는 건 구원이 아니라 불안의 계속입니다.
9) 당선소감과의 접점: “미안함”의 감각이 시의 바닥에 깔려 있다
시 밖의 말이지만, 당선소감의 “살아 있는 일이 미안하다”는 정서가 시 안에서도 보입니다.
- 남자는 “살아남는 일상(주유소에 살기)”을 하고 있고
- 그 일상은 늘 폭발 가능성을 품고 있고
-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예쁘다”라고 말하며
- 남자는 깨어나지 못한 채 그 한복판에 있습니다.
이건 개인의 악몽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무사히 지나가는 하루가 누군가의 재난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죄책감/불안으로 확장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시는 잔잔한데 목을 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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