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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개펄 여자 / 김경덕

 

파도 소리 기울여 미세기를 읽지요
한창때엔 난바다의 깊이까지 가늠했지요
해감내 찌든 가슴에 펄을 펼친 지 오래


망둥이가 뛰어오르고 바지락이 숨 쉬어요
뱀장어 따개비 저어새를 수태해요
꽃게가 하도 깨물어 못쓰게 된 젖꽃판


차라리 메마르지 넘쳐흐르지 않을 거면
배를 밀던 사내들은 죄 어디로 내뺐나
갓바다 물비늘 조으는목, 한참 맑습니다

 

 

  <당선소감>

 

   -

"골방에서, 오늘도, 나는, 쓴다."

밥은 집에서 먹어야 맛있고 술은 밖에서 마셔야 맛있다. 시는 뒤통수 톡톡 두들기며 연필로 써야 잘 써진다. 방바닥에 흐지부지 눌어붙어 쓱쓱 배 문지르며, 쓰다가 지우고 썼다가 고치는 오만가지 재미가 시다. 그래서 뒷맛이 남는 게다. 볼펜은 영판 아니라고 본다. 속도가 너무 빨라 질린다. 흐릿하지만 연필처럼 부루퉁한 여유로움이 나는 좋다. 연필이 없으면 만년필도 그런대로 쓸 만하다. 하얀 종이에 실실 스며드는 잉크맛이 먹을 만하다.

"꿈으로 가득 찬 설레는 내 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라디오에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사랑도 연필맛? 소금처럼, 시처럼, 맵고, 짤까?? 시금치보다, 시보다, 상큼하고, 맛있을까??

무작정 썼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쓴 것 같다. 어떤 '주의'나 '주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 자신, '줏대 없다'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겠다. 간신히 한 편 퇴고해놓고 할 말을 다 하지 못해 불평한 적도 있다. 극도의 자기모순이며 소모적인 행위에 지레 겁먹고 낙담하여 자책이나 자학에 빠지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자학보다 자책이 훨씬 나았다.

한 발짝 다가서면 서너 발짝씩 달아나버리는 시. 한 가닥, 간절히 붙들고 내가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숱했던 질문들처럼 회의와 절망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리라. 종착지가 어디이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무런 해답도 적혀 있지 않을 이정표(?)만을 찾아 헤매지나 않을지…… 그러나 미칠 만큼 좋아졌다. 그러니 계속 써야겠다. 누군가 말했다. 천천히 가는 것보다 멈추는 게 이제 더 두렵다고.

미욱한 작품을 끌어올려주신 심사위원님, 매일신문사, 저를 아는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1963년 경북 예천 출생. 대구 거주.


 

  <심사평>

  

  -

인구 소멸 지역의 한 상징으로 개펄을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이번 심사에 임하면서 먼저 "우리 시대에 시조의 존재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작품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정형의 틀 속에서 시심의 확장을 위한 본원적 의지를 잘 표현한 작품을 찾는 일이 현대시조의 오늘과 내일을 담보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시가 난해하고 산문화되는 이때 형식 미학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응모한 400여 편의 작품은 대체로 그런 기준 위에서 내면 의식을 치열히 투영하고 있었다.

심사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이지영의 '블랙홀'은 저마다 손전화를 보면서 식사하는 한 가족의 풍경을, 박하영의 '아크릴 수세미는 얼룩을 응시하잖아'는 삶의 얼룩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현대인의 세태를 그려낸다. 두 작품은 공이 우리 시대의 우울한 풍경화에 주목하였는데 아쉬운 점은 현실에 치중한 나머지 또 다른 한 축인 서정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에 비해 유귀덕의 '비와 세레나데'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면서 감각적으로 구와 구, 장과 장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비를 동반한 환경 묘사에는 성공하였으나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김경덕의 '개펄 여자'는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정성을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시인은 개펄을 지방 인구 소멸 지역의 한 상징으로 바라본다. "꽃게가 하도 깨물어 못쓰게 된 젖꽃판"은 분주한 생명 활동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뱀장어 따개비 저어새를 수태'하는 개펄은 살아나지만, 정작 이곳을 의지해 삶을 꾸려가는 사람은 점점 사라진다. 이렇듯 대비되는 두 상황에 돋보기를 들이대어 공존을 생각하게 한 능력은 공감의 폭을 넓혀주기에 충분하다.

현대시조 창작에 있어 이런 시각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미덕이다.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의 영예를 안은 시인에겐 축하를 보내고, 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는 가열한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이달균 시조시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한 줄로 잡는 중심 정서

이 시조는 **“살아나는 개펄(생태) vs 사라지는 사람(공동체)”**의 대비를 몸(젖꽃판)과 소리(목), 물때(미세기)로 밀어 넣어, 인구 소멸의 풍경을 ‘여자의 몸’에 새기는 작품입니다.


2) 제목이 미리 정해버린 화자 정체

**‘개펄 여자’**는 직업·계급·지역·젠더가 한꺼번에 붙는 이름입니다. ‘여자’는 개펄의 **돌봄/생계/출산성(수태)**을 감당하는 존재로 호출되고, 동시에 개펄처럼 늘 젖었다 마르는 경계에 놓입니다. 제목은 곧 화자의 운명(경계에 묶인 삶)을 선취합니다.


3) 초장: “읽는” 능력에서 “찌든” 몸으로

파도 소리 기울여 미세기를 읽지요
한창때엔 난바다의 깊이까지 가늠했지요
해감내 찌든 가슴에 펄을 펼친 지 오래

  • **“미세기”**는 방언·구어권에서 **‘밀물과 썰물(물때)’**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 화자는 ‘바다를 본다’가 아니라 **‘파도 소리를 기울여 읽는다’**고 말해요. 개펄의 지식은 눈보다 귀(감각)에서 오고, 책보다 현장(생존)에서 옵니다.
  • “한창때엔 난바다의 깊이까지”는 과거의 확장된 활동 반경/능력/자부를 줍니다. 그런데 다음 행에서 곧바로 “해감내 찌든 가슴”으로 내려앉죠.
    가늠(측량)의 주체였던 몸이, 이제는 냄새에 절여진 객체가 됩니다.
  • “펄을 펼친”은 다의적입니다.
    1. 말 그대로 개펄을 뒤집어 펼치는 노동(조개 캐기, 채취)
    2. ‘펄’이 ‘진흙’이면서도 ‘pearls’를 연상시키는 어감이라, 삶이 ‘진흙-보석’ 사이에서 뒤섞이는 역설을 깔아요.
      → “가늠했지요/오래”의 시간감이, 개펄 노동이 한철이 아니라 생애 단위임을 고정합니다.

4) 중장: 생태의 번성, 몸의 훼손

망둥이가 뛰어오르고 바지락이 숨 쉬어요
뱀장어 따개비 저어새를 수태해요
꽃게가 하도 깨물어 못쓰게 된 젖꽃판

  • 첫 두 행은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개펄의 생명 목록을 펼칩니다. “숨 쉬어요/수태해요”로 현재형의 박동이 큽니다.
    → 중요한 건 ‘개펄은 살아 있다’는 선언을 **사람의 언어(호흡, 임신)**로 번역한다는 점입니다. 개펄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자궁/산실이 됩니다.
  • 그런데 마지막 행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화자의 몸으로 급접사합니다.
    **‘젖꽃판’**은 의학적으로는 유두 주변의 **유륜(areola)**을 가리키는 말로 설명됩니다.
    → 생태의 ‘수태’가 인간의 ‘수유/양육’으로 이어지고, 그 지점이 **‘꽃게가 하도 깨물어’**라는 폭력적 촉각으로 표현됩니다.
  • 여기서 “못쓰게 된”은 잔혹합니다. ‘늙음’만이 아니라, 노동·가난·돌봄이 한 몸을 소모품처럼 만들었다는 냉혹한 진술이니까요.
    → 개펄은 계속 새끼를 낳는데(수태), 그 개펄을 삶의 기반으로 삼은 여자의 몸은 소진됩니다. 이 대비가 작품의 윤곽을 결정합니다.

5) 종장: 남자들의 ‘도주’와, 맑아지는(혹은 맑아 보이는) 바다

차라리 메마르지 넘쳐흐르지 않을 거면
배를 밀던 사내들은 죄 어디로 내뺐나
갓바다 물비늘 조으는목, 한참 맑습니다

  • 첫 행은 개펄의 본질(젖음/마름의 반복)을 부정하는 듯한 역설로 시작해요.
    “메마르지/넘쳐흐르지 않을 거면”은 경계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대한 항변처럼 들립니다. 개펄도, 화자도, 늘 ‘중간’에 묶여 있으니까요.
  • 둘째 행이 이 작품의 사회적 칼날입니다.
    “배를 밀던 사내들”—공동체의 노동을 함께 꾸리던 남자들이—**“죄 어디로 내뺐나”**로 호출됩니다.
    → ‘죄’는 개인의 도덕만이 아니라, 떠남(이탈)로 인해 남겨진 노동과 돌봄의 공백을 가리키는 집단적 죄책감입니다. 개펄은 살아도, 삶의 공동체는 비어간다는 감각이 여기서 확정돼요.
  • 마지막 행은 굉장히 정교한 말장난(이중의미)입니다.
    **‘갓바다’**는 “뭍에서 가까운 바다”를 뜻하는 말로 풀이됩니다.
    그런데 ‘갓’은 가장자리/끝/테두리의 뉘앙스도 있어서, 종장 전체가 **“가까운 바다(생활의 현장) / 가장자리의 바다(주변부)”**라는 이중 공간을 열어요.
  • **“조으는목”**은 전통 성음·시김새 맥락에서 선율이 상행할 때 음을 바싹 조이듯 쓰는 창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설명됩니다.
    동시에 한국어 동사 ‘조이다’의 일상적 의미(목이 조이다)도 겹치죠.
    → 그래서 “물비늘 조으는목”은
    1. 바다가 반짝일 때 나는 가늘게 조여 올라가는 소리의 이미지(바다가 내는 창법)
    2. 화자의 현실이 목을 죄는 질식의 은유
      를 동시에 품습니다.
  • 그런데 결말이 “한참 맑습니다”예요. 이게 참 잔인하게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비고, 죄는 남고, 몸은 닳았는데—바다는 맑다.
    → 자연의 맑음이 위로가 아니라 무심함으로 읽힐 수도 있고, 반대로 ‘떠난 자들’과 무관하게 여기 남은 세계의 투명함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 행은 정답을 주지 않고 맑음의 윤리를 관객(독자)에게 넘깁니다.

6) 이 시조가 “현대시조”로서 잘하는 것

  • 고전적 결구(종장의 결말 수렴)를 살리되, **방언(미세기/갓바다)**과 **몸의 구체(젖꽃판)**를 밀어 넣어 현재의 사회적 비감을 만들었습니다.
  • 생태의 번성과 공동체의 소멸을 ‘설명’하지 않고, 감각(소리/냄새/촉각)과 신체로 체험하게 합니다.
  • 무엇보다 마지막의 “조으는목/맑습니다”는 소리-몸-풍경을 한 번에 봉합하는 결구라, 읽고 나면 목 안쪽이 잠깐 조여오는 느낌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