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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프랙털 / 이수빈

 

빈 종이에 선을 그어 달력을 만들었다

허술한 약속을 칸에 넣기 위해서

직선은 고집이 세서 눈 맞춤이 어렵다



사는 건 계속해서 선을 긋는 일이야

글씨든 사람이든 전선이든 심전도든

타래가 끊기지 않도록 미로를 걷는 일



연속이 미분을 보장하진 않는다

끊어진 도함수로 숨 쉬어도 삶이라면

숫자를 훌쩍훌쩍 세자 하나둘셋 다섯여덟



사람들은 나에게 눈을 보라 다그친다

종이에는 달마다 이름이 적히고

끝없이 자신을 반복하는 눈송이가 쌓인다

 

 

  <당선소감>

 

   "아직 써야 할 문장이 있다" 그 외침이 여기로 이끌어

작년 이맘때, 인왕산에서 “나는 아직 써야 할 문장이 있어”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발밑으로 훤히 보이는 서울 풍경에 잔뜩 겁을 먹고 외친 말이었지만, 항상 그런 마음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여태 저는 써야 할 문장이 무엇인지 몰라 단어를 추리고 있습니다.

살아감에 있어 몇 없을 커다란 감동을 너무 이르게 맞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저의 서툶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어나갈 선이 긴 만큼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은 경험을 하겠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맛있는 게 생기면 누나부터 찾는 동생과 저의 자랑인 부모님, 사랑합니다. 타지에서 저를 보살펴주신 김옥성 할머니, 한결같은 응원 보내주신 김옥희 할머니와 고모 사랑합니다. 가장 먼저 제 글을 믿어주신 김상규 선생님, 당선 소감에 성함 적어달라고 하신 말씀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승이 선생님, 양상욱 선생님과 이곳에 다 적지 못한 저를 만들어주신 모든 선생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깊은 고민을 함께해준 윤나, 채윤이, 민송이, 주연이, 예은이, 예진이, 윤아, 서연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친애하는 문예 동아리 ‘달을 쏘다’가 앞으로도 문학을 잃지 않는 이름이 되길 바랍니다.

이 설익은 마음이 누군가에게 다정한 눈 맞춤으로 전해진다면 기쁘겠습니다.

동탄국제고등학교 졸업


 

  <심사평>

  

  간명한 언어들로 밀도 높은 정형 구축… 발랄한 개성 돋보여

형식은 내용으로 새로워진다. 틀에 묶인 말들은 낡기 마련. 시조가 현대의 정형시임을 간과하지 않아야 답습을 타넘는다. 오래된 정형과의 밀당 속에서도 지금-여기의 인식과 감각을 지속적으로 찾아야 새로운 시조를 만난다.

늘어난 응모작에서 형식 미달부터 내리니 심사 대상이 좁혀졌다. 최종 남은 ‘반납예정일’, ‘토스터 연습’, ‘벽의 탁본’, ‘빠가사리’, ‘프랙털’ 등을 거듭 읽으며 숙고에 들어갔다. ‘반납예정일’은 책에 감정을 엮어 기한과 반납이라는 나날의 성찰을 찬찬히 짚어냈고, ‘토스터 연습’은 토스터에 출근 전후의 표정을 이입하는 일상의 형상화가 산뜻했다. 벽에서 땜질과 묵은 때로 생의 단면을 톺아본 ‘벽의 탁본’과, 노가다 판에서 뻣센 뼈의 시간과 노역을 건져낸 ‘빠가사리’도 피상적 언술을 넘어서는 구체성이 돋보였다. 이들을 훌쩍 제친 등장은 ‘프랙털’(이수빈)이라는 발랄한 개성이었다.

이수빈 씨는 장식적 수사를 배제한 간명한 언어들로 밀도 높은 정형을 구축한다. 삶의 이면을 꿰는 사유의 감각적인 압축과 형식의 단단한 구조화는 모든 작품(8편)에서 고르게 나타난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구(句)와 율(律)의 자연스러운 조율도 참신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간혹 어색한 구가 있지만, 각 수의 완결 속에서 시상을 한 편의 시조로 완성하는 정형 속의 고행을 잘 다져온 듯하다. ‘사는 건 계속해서 선을 긋는 일’이라는 자신의 통찰을 밀고 나가 ‘선에 갇히지 않는’ 시조로 새뜻을 세우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정수자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제목 ‘프랙털’이 예고하는 것

프랙털은 “부분이 전체를 닮고, 패턴이 끝없이 반복되는 구조”죠. 이 시조에서 그 프랙털은 이렇게 번역돼요.

  • : 달력 칸의 선, 글씨의 획, 사람 사이 경계선, 전선, 심전도 그래프, 미로의 길
  • 끊김: 약속의 허술함, 관계의 삐끗함, 삶의 불연속
  • 반복: 달마다 적히는 이름, 매일 같은 요구(“눈을 보라”), 쌓이는 눈송이(자기유사)

즉, 삶은 선을 긋는 행위의 연속인데, 그 선은 매끈한 직선이 아니라 **계속 꺾이고 거칠어지며 반복되는 ‘프랙털 같은 선’**이 됩니다.


2) 수별(연별) 상세 해석

1수

빈 종이에 선을 그어 달력을 만들었다
허술한 약속을 칸에 넣기 위해서
직선은 고집이 세서 눈 맞춤이 어렵다

  • “달력”은 시간을 관리하는 도구이지만, 여기선 허술한 약속을 ‘칸’에 우겨 넣기 위한 장치예요.
    → 약속이 단단해서 달력을 채우는 게 아니라, 허술하니까 달력 칸으로 보강하려는 거죠.
  • “직선은 고집이 세서”는 물리적 묘사 같지만 사실은 사람/관계의 성격으로 번역됩니다.
    → 직선=고집, 융통성 없음, 방향 전환 불가.
  • “눈 맞춤이 어렵다”에서 바로 첫 번째 말장난이 시작돼요.
    • 눈 맞춤 = 시선의 교환(관계)
    • 동시에 이 시는 끝에서 “눈(雪)”로 넘어갈 준비를 합니다.
  • 정리하면: 시간을 정리하려고 선을 긋지만, 선(직선)은 사람과 만나는 법(눈 맞춤)을 모른다.

2수

사는 건 계속해서 선을 긋는 일이야
글씨든 사람이든 전선이든 심전도든
타래가 끊기지 않도록 미로를 걷는 일

  • “글씨/사람/전선/심전도”는 모두 “선”으로 그려지거나, 선으로 연결되거나, 선으로 기록되는 것들이죠.
    → 삶 전체가 선의 메타포로 한꺼번에 수렴됩니다.
  • “타래”는 실뭉치(서로 얽힌 관계/시간/의무)의 이미지예요.
    → 끊기면 끝. 그래서 “미로를 걷는 일”이 됩니다.
  • 중요한 포인트: 미로는 직선의 세계가 아니라, 꺾임과 선택과 되돌아감의 세계예요.
    → 1수의 “직선”이 2수에서 **삶의 실제 형상(미로)**로 수정됩니다.

3수 (작품의 사유가 가장 날카로운 대목)

연속이 미분을 보장하진 않는다
끊어진 도함수로 숨 쉬어도 삶이라면
숫자를 훌쩍훌쩍 세자 하나둘셋 다섯여덟

  • “연속이 미분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수학 정리(연속 ≠ 미분가능)를 그대로 가져왔는데, 이걸 삶에 대입하면 이렇게 읽혀요.
    • 관계/시간이 이어진다고(연속) 해서
    • **매끈하게 이해되거나 설명되는 것(미분, 변화율)**은 아니라는 말.
  • “끊어진 도함수로 숨 쉬어도 삶이라면”
    → 매끈한 설명이 불가능해도, 중간중간 끊기고 튀어도 사는 건 산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숨’이 들어가며 생물학적으로도 “삶”을 찍어요.)
  • “훌쩍훌쩍”은 울음이기도 하고, 호흡의 끊김이기도 해요.
    → 매끈한 1,2,3,4…가 아니라 하나둘셋 다섯여덟(4와 6,7이 비어 있음)으로 세죠.
  • 이 숫자열은 **피보나치(1,2,3,5,8…)**를 연상시켜요.
    → 프랙털(자연의 성장 패턴)과 연결되는 강력한 암시입니다.
    즉, 끊기고 불규칙해 보이는 삶의 카운트도 사실은 어떤 성장의 법칙을 닮아 있다는 쪽으로 열립니다.

4수 (제목을 회수하는 결말)

사람들은 나에게 눈을 보라 다그친다
종이에는 달마다 이름이 적히고
끝없이 자신을 반복하는 눈송이가 쌓인다

  • “눈을 보라”는 사회적 요구(정서적 정상성의 규범)처럼 들려요.
    → 눈 맞춤을 강요받는 화자.
  • 그런데 “종이에는 달마다 이름”이 적히죠.
    → 달력 칸에 적힌 ‘이름’은 약속일 수도, 사람일 수도, 해야 할 일일 수도 있어요.
    → 결국 **선(달력) = 반복(달마다) = 기록(이름)**의 구조가 완성됩니다.
  • 마지막 줄에서 “눈송이”가 등장하면서 **눈(eye) → 눈(snow)**로 전환이 일어나요.
    • 눈송이는 대표적인 프랙털 이미지(자기유사, 무한 변주)
    • 그리고 “쌓인다”는 말은 시간의 누적, 감정의 누적, 압박의 누적이기도 합니다.
  • 결말의 정서: 눈을 보라는 압박 속에서, 화자는 **끝없이 반복되는 구조(프랙털)**에 둘러싸인 채 살아갑니다.
    다만 그 반복은 무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비추는 구조”로 남아요.

3) 이 시조의 핵심 장치 5가지

  1. ‘선’의 과잉 연결: 달력–글씨–사람–전선–심전도까지 한 단어로 묶어 세계를 압축
  2. 직선 vs 미로: 단단한 규칙(직선)으로 살고 싶지만 실제는 미로(관계/삶)
  3. 수학 문장의 전치: 연속/미분/도함수 → “삶의 매끄러움”에 대한 환상을 깨기
  4. 숫자열(피보나치 암시): 울면서 세는 숫자조차 자연의 성장 패턴을 닮음
  5. ‘눈’의 중의(eye/snow): 관계의 요구(눈 맞춤)와 자연의 반복(눈송이)을 한 단어로 겹침

4) “현대 시조”로서의 맛

전통 시조의 단단한 리듬을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짧은 문장·명제·비유를 ‘정형의 밀도’로 압착해요.
특히 3수의 수학 명제는 장식이 아니라, 시의 논리를 밀어붙이는 골격입니다. (심사평이 말한 “장식적 수사 배제”가 여기서 체감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