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1인칭의 저녁 / 이복렬

<당선작>
1인칭의 저녁 / 이복렬
땅거미가 내려오면 등줄기가 더 시리다
등 기댈 곳 하나 없는 앞뒤가 허방이라
가로등 불을 밝히는
저문 거리로 나선다
차디찬 바닥 짚고 맨몸으로 버틴 나날
퇴근족 틈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득한 허공을 뚫고
별 하나가 떠 온다
눈꽃 핀 나뭇가지 뼈가 시린 엄동에도
먼 봄을 채근하는 깃 고운 새는 있어
쇼윈도 마네킹들의
옷차림이 가볍다
꽉 막힌 네거리를 활짝 여는 초록 신호
자동차 불빛 따라 발걸음이 빨라질 때
언 강이 용틀임하듯
닫힌 문이 열린다
<당선소감>
포기 안 한 집념의 시간에 대한 하늘의 감응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지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이제, 그만!’이라는 마음이 들 때마다 ‘갈 데까지 가 보자’라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워야 했습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란 소리를 믿고 싶었습니다. 늘 빙판 위에 선 듯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아귀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형의 말맛에 빠져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가야 할 길은 먼데 해는 벌써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버틴 날들이었습니다.
더딘 걸음을 다그치고, 부족함을 담금질하며 언어와 시간을 엮고 또 엮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변하고도 남았을 열병의 시간이 마침내 평온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목마르게 갈고닦은 제 애착의 텃밭에도 환한 꽃이 피었습니다. 오늘의 영광은 그 포기하지 않은 집념의 시간에 대한 하늘의 감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뜻이 언 손을 잡아 주신 서울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두 손 모아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우리 고유의 숨결이 담긴 정형시의 바른길로 이끌어 주신 민족시사관학교 윤금초 교수님과 ‘지금_여기’의 시 정신을 일깨워 주신 임채성 시인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랫동안 얼굴을 맞댄 다정다감한 글벗이자 멘토이신 선배 문우님들께서 느긋이 기다려 주신 덕분이기도 합니다.
삶의 윤활유처럼 위로와 공감이 되는 가슴 따뜻한 시조를 쓰고 싶습니다. 고집스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먼 길을 휘돌아올 때 후줄근히 지친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가족이 있어 이제껏 버틸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고맙고 느꺼울 따름입니다. 기쁨보다는 시인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긴 호흡 속에 서사 구성하는 능력 보여줘
202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는 예년보다 훨씬 많은 응모작이 투고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한 편씩 천천히 읽어 가면서 이들 시편이 저마다 개성적인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구체적 생활 경험과 상상력에 심의를 쏟은 시편들을 호의적으로 읽었고, 결국 시상의 구체성과 작품의 완결성 그리고 앞으로 시인으로 사는 삶을 이끌어갈 지속가능성 등을 두루 참작하여 이복렬의 ‘1인칭의 저녁’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1인칭의 저녁’은 땅거미 내려오는 저문 거리에 하루의 지친 삶을 내려놓는 이들의 구체적 내면을 형상화한 명편이다. 퇴근하는 이들 사이로 떠오르는 별 하나가 삶의 피로와 역방향에서 아름다운 대안 심상으로 찾아온다. 먼 봄을 채근하는 깃 고운 새의 심상도 마찬가지로 희망의 역동성을 파생시키면서 이들을 규율해 온 시간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언 강의 용틀임 속에서 닫힌 문이 열리는 이미지야말로 그것이 남겼을 희망의 잔상을 상상하게끔 해준다. 당선작은 비교적 긴 호흡 속에 이러한 서사를 구성하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준 사례로서,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것을 예감하게 해 주었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다. 감각적 수사의 한 정점을 보여 준 ‘봄을 수식하다’, 기억의 한 자락을 산뜻한 감각으로 쓴 ‘시간 밖을 걷다’, 노동의 가치와 삶의 소중함을 노래한 ‘아비’ 등이 최종적으로 논의되었음을 부기한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구체성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 이근배, 유성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시조 「1인칭의 저녁」은 **도시의 퇴근길(바깥)**에서 **집/문(안쪽)**으로 이동하는 짧은 서사를 통해, “하루를 버틴 1인칭”의 고단함과 아주 작은 희망의 징후(별, 새, 초록 신호, 열리는 문)를 차례로 세우는 작품이에요. 차가움이 끝까지 남아 있는데도, 끝내 “열린다”로 닿는 방식이 시조답게 단정합니다.
1) 제목이 먼저 말해주는 것: ‘1인칭’ + ‘저녁’
- 저녁은 하루의 끝이자, 체력과 마음이 가장 약해지는 시간대입니다. 동시에 “다음 날로 넘어가기 직전의 경계”이기도 하죠.
- 1인칭은 “나”를 강하게 내세우는 듯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건 ‘나’가 거의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등줄기/맨몸/발걸음 같은 신체 감각으로 ‘나’가 드러나고, 퇴근족 틈 속에서 ‘나’는 더 희미해집니다.
→ 그래서 제목의 ‘1인칭’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버틴 몸의 단독성을 뜻합니다. *“나는 나 혼자 서 있다”*의 1인칭.
2) 전체 흐름: “추위(폐쇄)”에서 “열림(통과)”으로
4수는 거의 단계적으로 진행돼요.
1수: 허방(기댈 곳 없음) → 가로등 불 켜진 거리로 “나선다”
2수: 차디찬 바닥/맨몸 → 퇴근족 사이 “별 하나” 떠오름
3수: 엄동/뼈 시림 → “먼 봄” 채근하는 새 + 가벼운 마네킹 옷차림(계절의 불일치)
4수: 꽉 막힌 네거리 → 초록 신호, 속도, “닫힌 문이 열린다”
즉, 감정의 해결이라기보다 통과의 연쇄예요. 버티고—보고—예감하고—넘어간다.
3) 수별(연별) 정밀 분석
1수: ‘등줄기’와 ‘허방’ — 존재의 추위
땅거미가 내려오면 등줄기가 더 시리다
등 기댈 곳 하나 없는 앞뒤가 허방이라
가로등 불을 밝히는
저문 거리로 나선다
- 등줄기: 단순한 추위가 아니라, “내 뒤를 받쳐줄 것이 없음”을 신체로 번역한 표현입니다.
- 앞뒤가 허방: 공간 묘사 같지만 사실은 삶의 상태(불안정, 지지 기반의 부재)예요.
- 그럼에도 “나선다”로 끝나요. 우울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는 동작이 첫 수의 결말입니다.
→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절망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절망을 입고도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2수: ‘맨몸’의 시간과 ‘별 하나’의 역방향 위로
차디찬 바닥 짚고 맨몸으로 버틴 나날
퇴근족 틈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득한 허공을 뚫고
별 하나가 떠 온다
- “맨몸으로 버틴 나날”은 노동/생존의 시간이에요. 방어구가 없는 삶.
- 그런데 이 수의 전환은 위쪽에서 옵니다. 아득한 허공을 뚫고 “별 하나”가 떠 온다.
→ ‘나’가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희망은 **도달해 오는 것(떠 오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 “별 하나”는 크지 않아요. 하지만 1인칭에게는 충분한 크기의 대안 심상입니다. (심사평이 말한 “역방향의 대안 심상”이 딱 이 지점)
3수: 겨울 속 봄의 징후, 그리고 쇼윈도의 아이러니
눈꽃 핀 나뭇가지 뼈가 시린 엄동에도
먼 봄을 채근하는 깃 고운 새는 있어
쇼윈도 마네킹들의
옷차림이 가볍다
- 여기서 시는 희망을 두 겹으로 놓습니다.
- 자연의 희망: 깃 고운 새(먼 봄을 재촉하는 생명)
- 도시의 희망/허상: 마네킹의 가벼운 옷차림(봄을 ‘전시’하는 상품 세계)
- 이 대비가 중요해요.
새의 봄은 살아 있는 예감이고, 마네킹의 봄은 진열된 계절입니다.
→ 1인칭은 ‘진짜 봄’과 ‘팔리는 봄’ 사이를 동시에 지나갑니다. - 그래서 이 수는 따뜻하기만 하지 않고, 도시의 서늘함(쇼윈도)을 남겨요. 희망조차 현실에선 상품화될 수 있다는 감각.
4수: ‘초록 신호’와 ‘언 강의 용틀임’ — 폐쇄가 열림으로 바뀌는 순간
꽉 막힌 네거리를 활짝 여는 초록 신호
자동차 불빛 따라 발걸음이 빨라질 때
언 강이 용틀임하듯
닫힌 문이 열린다
- “초록 신호”는 단순한 교통 신호가 아니라, 막힘을 여는 허가/전환이에요. (꽉 막힘 ↔ 활짝 열림)
- “발걸음이 빨라질 때”는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생활의 리듬입니다. 퇴근길의 자동 반응.
- 마지막 비유가 압권입니다: “언 강이 용틀임하듯”
- 얼어붙은 강은 정지의 상징인데, 그 강이 “용틀임”한다면 내부에서 이미 움직임이 시작된 거죠.
- “닫힌 문”이 열리는 순간은 단지 집 현관문일 수도 있지만, 더 넓게는 삶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하는 최소한의 틈입니다.
- 결말을 “희망이 온다”가 아니라 **“문이 열린다”**로 끝낸 게 좋아요. 희망을 감상으로 처리하지 않고 동작/사건으로 마무리합니다.
4) 장치와 문체의 특징
① ‘추위’의 반복을 통한 정서 고정
- 시리다 / 차디찬 / 맨몸 / 엄동 / 뼈가 시린 / 언 강
→ 추위는 배경이 아니라 화자의 존재 조건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생존의 온도.
② “하나”의 미학
- 별 하나
기댈 곳 하나 없고, 별 하나 떠오르는 구조가 맞물려요.
→ 결핍의 ‘하나’가 희망의 ‘하나’로 바뀌는, 최소 단위의 전환.
③ 위/아래, 바깥/안쪽의 공간 이동
- 바닥 짚고(아래) → 하늘 올려다봄(위)
- 저문 거리(바깥) → 닫힌 문(경계) → 열림(안쪽으로 통과)
→ 이 시는 “마음”을 설명하기보다 공간을 건너는 방식으로 마음을 보여줍니다.
5) 이 시조의 ‘희망’은 밝지 않다
이 작품의 희망은 환호가 아니라 작고 차가운 지속성이에요.
- 별은 멀고
- 새는 “먼 봄”을 채근할 뿐 지금 봄은 아니고
- 초록 신호는 잠깐이며
- 문은 열리지만, 그 뒤의 따뜻함은 말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결말이 확실한 이유는, 1인칭이 “따뜻해졌다”가 아니라 **“열렸다”**를 얻기 때문입니다.
→ 삶을 바꾸는 건 거대한 구원이 아니라, 막힘이 풀리는 단 한 번의 통과라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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