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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어느 모텔 수건의 공식 / 김동균

 

나란한 공식으로 하얗게 각 잡힌 날

나란한 공식으로 하얗게 각 잡힌 날

씻어낸 자리마다 낯가림이 따로 없어

한 번만 쓰고 버려도 표정 없는 얼굴이다

 

두꺼운 커튼 사이 햇살을 막아두고

계절을 빨아 놓아 돌고 도는 순백의 시간

아무리 흩어놓아도 반듯하게 접혀있다

 

새겨진 문신처럼 씻어도 그대론데

눈총으로 찍힌 낙인 구석으로 밀려날 때

객실 벽 초침 소리는 꽃무늬에 스며든다

 

 

  <당선소감>

 

   아프고 얼룩진 부분 잘 닦아낼 것

이번 겨울은 첫눈이 유난히 많이 내려 세상을 하얗게 덮고도 남았습니다. 얼룩지고 때 묻은 생각들까지 감쪽같이 사라지는 순백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깨끗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창문 밖 겨울 햇살이 그늘을 파고듭니다.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문학이 제 안에서 쌓였다 녹는 사이 각 잡힌 마음들이 자주 흐트러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옆에 놓인 하얀 수건을 생각합니다. 어느 곳에서든 닦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수건처럼 시조는 때때로 주변을 자세하게 살피게 했습니다. 시조 짓기가 아니었다면 내 삶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자유로움이 좋아 가끔은 내 안을 누비기도 했지만 아주 우연히 시절가조의 정형시에 빠져 지금은 그 결을 따라가며 맑은 사유를 느끼곤 합니다. 사물과 대화하는 시간이 친구처럼 즐겁습니다. 삶의 공식 앞에서 풀어내지 못한 많은 시간들을 시조의 형식에 가지런히 담아 아프고 얼룩진 부분까지 잘 닦아내겠습니다.

문학의 언저리를 서성일 때 시조의 길을 열어주시고 가르쳐 주신 조경선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드리며, 군포에서 활동할 때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주신 군포 문인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정진하면서 아낌없는 배려와 조언을 해주시는 ‘시란’ 동인 문우들과, 묵묵히 지켜봐 주신 부모님과 형제들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부족한 제 시조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긴 시간을 함께하며 내 편이 되어준 아내 박인숙, 무조건 아빠를 믿고 지지해 준 민지. 재훈 고맙고 사랑합니다.

1973년 강원도 영월 출생, 2024년 중앙시조 백일장 11월 장원. 시란 동인.


 

  <심사평>

  

  인간 숙명 기초해 튼튼하고 아름다워

응모작들을 ‘신춘’과 ‘시조’에 방점을 두어 읽었다. 문학이 가진 보편성에 ‘신춘’을 더한다는 것은 시각은 현실에 두되 미래를 꿈꾸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성미보다는 완성으로 가는 치열한 과정을 더 눈여겨보았다. 독립 장르로서의 시조가 가진 특성을 잘 반영하는가에 주목했다. 정형성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함축성과 절제미를 시조라는 형식에 잘 녹여내는가, 형식이 내용을 가두는 틀이 되지는 않는가 등에 집중해서 읽었다.

‘진공바다’, ‘일요일은 추가 버튼’, ‘커터 날의 13월’은 시대의 아픔을 농도 있게 노래했지만 각각 함께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 세밀한 표현, 장의 긴장감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 끝내 내려놓았다. ‘빨간 볼펜 이후’, ‘어느 모텔 수건의 공식’ 두 편을 두고 많은 시간 고민하며 반복해서 읽었다. 두 편 모두 사물을 통해 주제를 이끌어가는 과정이 도전적이고 언어를 부리는 솜씨도 탁월했다. 다만 ‘빨간 볼펜 이후’는 조사나 어미 등으로 장을 연결함으로써 시조가 가진 응축성이 다소 부족했다.

당선작 ‘어느 모텔 수건의 공식’은 발상이 신선하고 세 수를 끌고 가는 응집력이 돋보였다. 어지러운 세상, 이질적인 세상, 혹은 무관심의 세상을 살아갈 소시민의 자세 혹은 공식을 모텔의 수건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수건’의 의미를 확장해서 읽을 수 있는 매력을 지닌 작품으로 시대성과 인간의 숙명을 기초로 하여 튼튼하고 아름답게 짓고 있는 집 한 채를 보는 느낌이었다. 부디 시조의 새봄을 여는 주역으로 치열하게 시조에 천착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정희경 시조시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수: “공식”과 “표정 없는 얼굴” — 익명성과 일회성의 세계

나란한 공식으로 하얗게 각 잡힌 날(반복)
씻어낸 자리마다 낯가림이 따로 없어
한 번만 쓰고 버려도 표정 없는 얼굴이다

  • “나란한 공식”: 수건이 가지런히 접혀 있는 모양이면서, 동시에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정돈된 태도/정답 같은 삶의 규칙을 뜻해요. 같은 문장을 두 번 반복해 ‘공식’의 강박과 기계성을 강화하죠.
  • “낯가림이 따로 없어”: 모텔 수건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제공돼요. 사용자는 바뀌고 관계는 사라져도 수건은 늘 같은 얼굴.
  • “한 번만 쓰고 버려도 표정 없는 얼굴”: ‘표정 없는 얼굴’은 수건의 무표정함이면서, 관계의 익명성(모텔의 본질)과 소모되는 감정을 겹쳐 보여줍니다.
    → 여기서 수건은 ‘나’가 아니라, ‘시스템’처럼 존재하는 사물이 돼요.

정리: 첫 수는 “깔끔함”이 사실은 익명성과 소모 위에 세워진 것임을 드러냅니다.


2수: 커튼·계절·순백의 시간 — 깨끗함을 ‘유지’하는 순환 노동

두꺼운 커튼 사이 햇살을 막아두고
계절을 빨아 놓아 돌고 도는 순백의 시간
아무리 흩어놓아도 반듯하게 접혀있다

  • 커튼: 햇살을 “막아두고”라는 표현이 중요해요. 자연광(현실)을 차단한 채, 모텔은 시간 감각이 희미한 공간이죠. 밤/낮, 계절/바깥의 삶이 커튼 뒤로 밀려납니다.
  • “계절을 빨아 놓아”: 계절은 본래 쌓이고 묻는 건데, 이걸 ‘빨아’서 지워버린다?
    → 삶의 흔적(땀·비·먼지·시간)을 세탁으로 삭제하려는 욕망이에요.
  • “돌고 도는 순백의 시간”: 순백은 ‘새로움’이 아니라 ‘반복’의 산물입니다. 계속 빨고, 접고, 다시 쓰는 순환 시스템.
  • 마지막 행: “아무리 흩어놓아도 반듯하게 접혀있다”
    → 개인의 사적 흔들림(흩어짐)을 허용하지 않고, 결국은 다시 정돈된 형태로 회수되는 삶의 구조를 말해요.

정리: 둘째 수는 ‘깨끗함’이 사실 삭제와 반복 노동의 결과라는 걸 보여줍니다.


3수: 지워지지 않는 문신·낙인·초침 — ‘얼룩’의 귀환과 시간의 압박

새겨진 문신처럼 씻어도 그대론데
눈총으로 찍힌 낙인 구석으로 밀려날 때
객실 벽 초침 소리는 꽃무늬에 스며든다

  • “문신처럼 씻어도 그대론데”: 앞의 세탁/순백의 논리가 여기서 깨져요. 어떤 것은 씻어도 지워지지 않죠.
    → 수건의 얼룩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기억·상처·죄책·낙인입니다.
  • “눈총으로 찍힌 낙인”: 낙인은 공동체가 찍는 표식이에요. 여기서 ‘눈총’은 말 그대로 타인의 시선이고, 그 시선이 사람(혹은 사물)을 구석으로 밀어냅니다.
    → “깨끗함”의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가 퇴출되는 방식이죠.
  • “초침 소리”: 모텔 객실의 시간은 유난히 또렷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얕고, 말이 없고, 현실이 차단되기 때문이에요.
    초침은 곧 유예 없는 현실의 압력이고, 숨기려 해도 스며드는 증거입니다.
  • “꽃무늬에 스며든다”: 꽃무늬는 ‘장식’이고 ‘겉치레’예요. 그런데 초침 소리(시간/불안)가 장식에 스며들면, 화려함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라 불안을 흡수한 포장지가 됩니다.

정리: 셋째 수는 “순백”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결국 남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시간임을 말합니다.


이 시조의 중심 주제: “깨끗함”이라는 공식의 폭력

이 작품이 말하는 ‘공식’은 단지 수건 접는 법이 아니에요.

  • 사회가 요구하는 반듯함/단정함/무표정의 공식
  • 그 공식에서 벗어난 흔적(얼룩)은 낙인이 되어 구석으로 밀림
  • 아무리 빨아도 남는 것(문신 같은 흔적)이 결국 인간의 숙명

그래서 “모텔 수건”은 현대인의 삶을 닮습니다.
겉으로는 늘 새것처럼 보이길 강요받지만, 실은 반복 사용과 삭제로 유지되는 표면일 뿐이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은 끝내 남아요.


제목 〈어느 모텔 수건의 공식〉이 주는 역설

“공식”은 원래 정답/보편/안전의 이미지인데, 여기서는 오히려:

  • 공식 = 익명성의 규칙
  • 공식 = 흔적을 지우는 반복
  • 공식 = 낙인을 구석으로 미는 질서

즉 “공식”이 우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표정을 지우고 흔적을 숨기게 만드는 삶의 규율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