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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이웃사촌 / 김재순

 

지난주, 아파트 게시판에서 엄마 참새가 쓴 안내문을 보았다.

 
<내일은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이 방문합니다.

어린 새끼들이 있어서 좀 시끄러울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조용히 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연재이고, 남동생 연우는 일곱 살이다. 우리는 남매다. 아침이면 나는 엄마가 깨우기도 전에 저절로 일어난다. 연우가 확 쏟아놓는 장난감 소리 때문이 아니다. 베란다 바깥 사철나무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조잘조잘 아주 시끄럽다. 우리 집 화단에 언제부터 새가 살았는지 잘 모른다. 경비 아저씨가 새의 이름이 참새라고 알려주셨다. 아저씨는 우리 집을 ‘새 기르는 집’이라고 부른다.

“아유, 참새야 조용히 좀 해라.”

나는 두 팔을 높이 올리고 몸을 쭈욱 늘리며 일어난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양쪽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약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간다. 엄마는 스스로 일어났다고 칭찬하지만, 사실은 참새에게 꿀밤을 주고 싶다. 조금 더 자도 되는데 시끄러워서 깼다. 하지만 조금 일찍 일어난 덕분에 밥도 천천히 먹고 학교에 뛰어가지 않아서 좋기도 하다.

푸드덕,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한 것은 참새가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리곤 다시 날아와 나뭇가지 끝에 앉아 아주 수다스럽다. 참새들이 ‘꼬리잡기’를 하면서 놀고 있다. 작은 새가 앞에서 날아가고 형과 누나가 뒤쫓아간다. 덩치를 보니까 술래는 작은형 같다. 어린 동생이 너무 느리게 날아다니니까 금방 꼬리를 잡을 것 같다. 형과 누나가 동생의 꼬리를 잡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엉뚱하게 날아다닌다.

나는 엄마 참새가 게시판에 붙인 안내문이 생각났다. 안내문을 읽으면서 미리 얘기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아니까 이해할 것 같았다. 우리 집에도 이모랑 사촌 동생이 놀러 왔었다. 내가 여섯 살 때 일이다. 그때는 어려서 다른 사람이 시끄러워할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엄마의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사촌 동생은 나보다 한 살 어리다. 이모 말로는 이모부가 자동차회사에 다녀서 그런지 특히 자동차를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도 최근에 가지고 놀던 자동차가 레미콘이면 아무리 커도 안고 놀러 온다. 이모 배낭 속에는 내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미니카가 여러 개 들어있다. 그날도 우리는 거실에서 자동차를 쌩쌩 밀고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커다란 소방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그리고 무선 자동차는 거실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다음날 엄마가 아래층에 다녀왔다고 했다. 어제 너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아직 어리니까 한창 뛰고 놀 때죠.”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걸을 때도 뒤꿈치를 들고 살살 다니라고 했다. 근데 막상 걸어갈 때는 잊어버리고 후다닥 달릴 때가 더 많았다. 엄마는 우리가 한참 뛰고 놀 때 이해하고 기다려준 할아버지를 지금도 고마워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을 ‘새 기르는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동화 속에 나오는 신비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파리는 짙은 녹색으로 은행잎이나 단풍잎처럼 얇지 않고 두툼하다. 잎의 뒷면과 가장자리가 노르스름하게 변하며 맨질맨질 광택이 난다. 아침이면 햇살이 거실 바닥에 한 그루 나무를 그린다. 붓에 초록색 물감을 듬뿍 묻히기도 하고, 황금색 물감을 물에 살짝 풀기도 한다. 작고 동그란 점을 찍기도 한다. 햇살은 부드러운 붓으로 천천히 색을 칠한다. 하지만 모두 검은색으로 변한다. 키가 3미터나 되는 사철나무는 우리 집 거실 창의 반을 다 덮어버린다. 사철나무는 사철 잎이 푸르게 살아있는 나무라서 사철나무라고 불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남천나무의 빨간 열매가 보인다. 빨간 열매는 바깥 풍경의 또 다른 그림이 된다.

아기 참새들이 머리 맞대고 종알대는 모습도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엄마 참새에게 혼나는 중이다. 동생이랑 싸웠나?

학교 가는 길에는 꼭 화단쪽으로 지나간다. 사철나무 아래서 고양이가 웃으며 나뭇가지 사이를 요리조리 살핀다. 참새와 고양이가 노는 것을 보면 학교 가는 길이 더 즐겁다. 으음, 참새가 공주님이고 매일 나무를 올려다보는 저 고양이는 왕자님일 거야. 둘은 마법에 걸렸고, 공주님이 보고 싶어서 왕자님이 매일 오는 게 틀림없다.

문제는 오늘 같은 일요일이다. 학교도 학원도 안 가니까 늦잠 자고 싶은데 “참새, 너 때문이야.”하면서 일어난다. 우리 화단의 나무에는 얼마 전부터 작은 새들이 많아졌다. 오늘따라 크고 작은 새들이 유난히 많이 모였다. 누구 생일인가? 20여 마리가 알콩달콩 몰려다니며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갔다가 아주 시끄럽다. 새는 몸이 가벼워서 이리저리 빠르게 날아다닐 수 있나 보다. 뼛속은 물론 깃털 속도 비어 있다고 한다.

“참새가 엄청나게 모였네. 저 안의 작은 새들이 이번에 새로 태어난 아기새네.”

밖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엄마, 오늘은 누구 생일잔치 하나 봐요.”

“네, 맞아요. 오늘은 막내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축하하는 날이지요.”

엄마 참새가 말했다.

“참새야, 축하해. 건강하게 자라렴.”

우리 엄마는 엄마 참새에게 축하한다고 했다.

“아주머니, 고마워요. 많이 시끄러울 텐데도 우리 아기새들이 잘 자라도록 사철나무를 보호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덕분에 우리도 좋아요. 참새 소리 들으며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한답니다.”

엄마는 들쑥날쑥 자란 나뭇가지를 관리실에 잘라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빨리 자라는 나뭇가지도 있고, 조금 느리게 자라는 나뭇가지도 있다. 빨리 자라서 삐죽삐죽하다고 싹둑 자르는 일은 나무가 생각하기에 얼마나 슬플까. 나무를 자르지 않으니 새 둥지도 아기 새도 안전했다. 엄마 참새는 우리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나 보다.

엄마 참새와 우리 엄마의 서로 고맙다는 말을 들으며 나도 얼른 말했다.

“늦잠 안 자도 좋아요.”

어린 참새들도 엄마새 어깨 너머에서 재재댔다.

“좋아요.”

“좋아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이웃이다.

나는 참새들을 관찰하기로 했다. 근데 아무리 살펴봐도 둥지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새는 알을 보호해야 하므로 나무속,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둥지를 만드니까 그렇겠지. 새들이 놀랄까 봐 잎 사이사이를 들춰볼 수도 없다. 참새는 어디에서 자는 걸까? 아파트 뒷문에 있는 키가 큰 나무에는 커다란 까치집이 있다. 한 여름에는 나뭇잎이 우거져서 보이지 않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잎이 떨어지고 까치집이 잘 보인다. 하지만 사철나무는 이파리도 작고 빽빽하다. 엄마 참새가 꾸며놓은 침대가 궁금했다. 화단 밖에서는 멀어서 잘 안 보인다. 나는 살금살금 나무 아래에 가서 올려다보았다. 역시 찾지 못했다.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으니 나는 여전히 궁금하기만 하다.

엄마도 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우리는 인터넷과 책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참새는 텃새이고 몸의 길이는 13cm 내외다. 두 발로 뛰면서 땅 위에 내려와 먹이를 찾기도 한다. 애벌레, 과일, 곡식 등 가리지 않고 먹기 때문에 마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나무 사이에 작은 둥지를 만들어서 새끼를 낳는다. 저 나무 안에 둥지도 있고 내가 예뻐하는 아기 새들도 있다.

연우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서 놀다 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새들이 어디 갔지? 쟤네들도 종일 놀고 나면 배고플 텐데 아기 새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엄마 새와 아빠 새의 표정이 슬퍼 보인다.

“엄마, 아기 참새들이 안 보여요. 벌써 자는 걸까?”

“그러게, 조금 전 들여다봤는데 아무도 없더라. 엄마가 낮에 잠깐 외출했었는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하지만 내일 아침에 만나면 어디 놀러 갔었는지 물어봐야겠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베란다 문을 확 열었다. 참새들이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아침이면 참새 목소리는 싸우는 줄 알 정도로 요란했는데. 이상하다. 새 소리가 안 들린다. 오늘따라 바람도 불지 않아서 나뭇잎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참새도 이모네 놀러 갔나?

학교에 다녀오는데 ‘윙’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놀이터 옆에 있는 목련나무가 싹둑 잘렸다. 나무 아래에 부서진 새집이 있다. 아저씨들이 화단에서 나무 손질을 하고 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집으로 막 뛰어갔다. ‘위이잉’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우리 집 앞, 사철나무도 전기톱에 잘려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췄다. 우리 참새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참새는 나무 손질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내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저씨들이 사다리에서 내려와 톱을 챙기고 있다.

어디로 갔지? 아저씨들은 삐쭉삐쭉 머리카락을 다 잘라버린 미용실 언니 같았다. 사철나무를 동그랗고 예쁘게 만들었다. 사철나무 가까이 가는 내 마음은 계속 두근거렸다. 화단에 들어가서 사철나무를 올려다봤다. 아무도 없다. 정말 가끔 시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참새 가족이 가버리길 바란 적은 없다. 참새가 없는 아침이라니 재미없다. 아니, 슬펐다.

참새 가족이 멀리 이사를 가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집이 있으니까 올지도 몰라. 맞아, 틀림없이 올 거야 흥부 놀부 전래동화를 보면 흥부네 집에서 살던 제비가 다시 돌아왔거든. 책에서 보면 제비는 여러 해 동안 같은 장소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엄마는 나무가 다시 울창해지면 올 거니까 기다리자고 했다. 틀림없이 올 거야. 우리는 시끄럽다고 화를 낸 적이 없다. 아기 새들이 놀랄까 봐 잘 날아다닐 때까지 베란다 창문도 열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매일 엘리베이터 옆에 게시판을 본다.

“우리가 미리 알고 참새에게 알려줬으면 새들이 덜 놀랐을 텐데.”라던 엄마 말이 생각나서다. 엄마 말로는 지난번에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다는 편지가 게시판에 있었을 거라고 했다. 내가 좀 더 관심을 두고 게시판을 보고 다닐 걸 후회가 됐다. 미리 알려줬으면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봄은 연두색 이파리를 잔뜩 매달아 놓고 가버렸다. 연두색 이파리 색깔이 조금씩 진한 녹색으로 변하고 있다. 새로 자란 여린 이파리는 내 동생 숟가락만 하더니 이제는 엄마 숟가락만큼 커졌다.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는 베란다에 있던 화분을 밖에 화분걸이에 내놓았다. 여름이 오고 있다.

“꺄악.”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게시판에 엄마 참새가 보낸 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엄마 참새입니다. 105호 아파트 화단에 있는 나무의 정리정돈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었지요. 어제 와 보니 사철나무가 다시 울창해졌네요. 내일 이사 오려고 합니다.>

 
나는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초인종을 막 눌렀다. 딩동딩동딩동!

 

 

  <당선소감>

 

   따뜻한 마음 이야기 쓰겠다

몇 날 며칠을 기다리던 전화였지요. “당선을 축하합니다.” 그 순간 전화기를 잡은 손이 굳어버렸어요. 마음의 소리는 쿵쾅쿵쾅 목소리는 떨리고, 눈물이 한 방울 맺혔어요. 그 한 방울에 많은 순간이 녹았습니다. 그리고 단단해졌어요. 동화를 써야지 라고요.

내게 동화의 시작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쓰는 거예요. 예전에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따뜻한 옛날이야기 처럼요. 무서운 여우 이야기, 착한 도깨비 이야기, 손으로 만든 그림자놀이도 있지요. 그 안에 이솝우화처럼 감동을 담고 싶었고요. 앤서니 브라운 작가의 <우리 엄마>를 보며 울컥했던 따뜻한 마음, 그런 이야기를 쓰려고요.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 옆에 앉아서 예쁜 이야기 세계로 빠져드는 상상을 매일 한답니다.

동화를 쓸 때 초고보다 분량이 조금만 늘어도 칭찬해 주고, 작은 글을 큰 글로 만들어준 ‘동글동글’ 문우들 고맙습니다. 덕분에 작은 것을 살피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랐어요. 늦게 퇴근해서 힘들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합평해준 남편, 두 딸의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어요. 그리고 글 마당으로 이끌어주신 유한근 교수님, 항상 잘 쓴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명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마음을 사랑하는 동화 작가로 한 걸음 내딛게 용기를 주신, 불교신문과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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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아이들의 시선으로 돌아가 얻는 평화

여러 작품들 가운데 ‘낱말의 창고’, ‘고양이는 밤에 춤춘다’, ‘이웃사촌’ 세 편 동화를 먼저 건져 올렸다. 무엇보다,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아니, 익혀야 한다. 어휘 선택, 동화에서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용언들의 처리, 그리고 문장들로 이루어지는 문체, 거기서도 리듬, 그러니까 문장의 길이에 대해서도, 무엇이 리듬을 낳을 수 있는지, 산문이라도 리듬이 있으니까, 행은 얼마나 어떻게 바꿀지, 선천적으로 알면 좋지만, 대부분은 익혀야 한다.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또, 어떤 주제를 선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낡으면 안 되지만, 빨리 간다고 다 능사도 아니다. 여간 신기하지 않으면 낯설고 어수선해 눈이 머물지 못한다. 너무 낡아도 안 된다. 아이들은 늘 새롭고, 새로운 세상을 사는 아이들인데 너무 낡은 주제의 이야기, 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을까? 여기서 불교 동화란 무엇일까? 불교적 진리는 온 세상에 고루 삼투되어 있다. 작가 윤흥길이 말한 것이 있다 기독교 신자인 작가가 쓴 소설은 모두 불교 소설이라고.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보자.

‘낱말의 창고’. 아주 재밌게 읽었다. 발상이 재밌고 새롭다. 낱말들이 말을 한다는 게 아주 묘미가 있다. 아이들이 쓰는 말에 대한 ‘성찰’이 전혀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자어에 관한 대목도 재밌었다. 자기 말만 할 수 있다는 낱말들이 다른 말들을 한다. 약간의 모순이다. 학교에서 보낸 통지문도 다소 부담스러운 데까지 나간 듯하다. 큰 약점은 아니다.

‘고양이는 밤에 춤춘다’. 매력 적은 소설이다. 밤의 ‘로망스’ 속으로의 진입이 빠르면서도 ‘로망스’ 속의 세계가 어수선하지 않아 좋다. 거기 한 고양이가 혼자 춤을 추고 있고, 그 사연은 ‘장애’라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쪽 다리를 잃은 고양이와 함께 추는 춤이 어떤 비유인 줄 모르고 깨닫게 된다. 문장과 어휘 선택이 간명하고 주의 깊어서 좋다.

‘이웃사촌’은 우리가 동화라고 부를 때 상상하는 그런 이야기에 가장 가깝다. 초등학생 주인공 ‘나’의 세계와 참새들 세계 사이에 경계가 없다. 첫 시작부터 참새가 사람들한테 안내문을 써 붙였다는 설정의 매력은 끝까지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한다. 소소한 사건들인데도 지루하지 않다.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뚜렷한데도 끝까지 가게 된다. 참새가 잠시 떠난 상실감, 다시 찾아왔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이 눈에 잡힐 듯 선연하다.

새벽까지 두 작품을 놓고 고민하는 생각의 여유를 확보하고, 심사평을 쓰면서 겨우 결정한다. ‘이웃사촌’이다. 아이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고양이는 밤에 춤춘다’의 작가에게 못내 아쉬움을 남긴다. ‘이웃사촌’의 작가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 방민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한 줄 핵심

이 동화는 ‘소음’이 아니라 ‘이웃’의 문제를 다룹니다. “시끄럽다”는 불편을 미리 알리고 서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어느 날의 ‘정리정돈’(가지치기)이 만든 상실을 다시 돌아옴으로 봉합하는 이야기죠. 아이의 시선으로 “관계가 유지되는 방법”을 배웁니다.


2) 서사 구조: 안내문 → 관찰의 즐거움 → 상실(톱) → 죄책/성찰 → 기다림 → 귀환(편지)

① 도입: “엄마 참새 안내문”이라는 세계관 선언

  • 첫 문장부터 이미 경계가 무너진 세계입니다. 새가 사람 게시판에 글을 붙인다는 설정이 곧 작품의 규칙이에요.
  • 여기서 중요한 건 ‘판타지’가 목적이 아니라, 배려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 장치라는 점입니다. “미리 말하기”가 윤리로 세워지거든요.

② 전개: 아파트 일상 속 자연(사철나무) 관찰

  • ‘나(연재)’가 참새들을 관찰하면서도 피해자/가해자 구도를 만들지 않아요.
  • “시끄럽다”는 불평이 잠깐 나오지만, 곧 “조금 일찍 일어난 덕분에…”처럼 불편을 생활의 리듬으로 흡수합니다.
  • 동생/사촌/아래층 할아버지 에피소드가 들어가며 “이웃의 이해”가 사람-사람 사이에서도 이미 작동했음을 깔아줍니다.

③ 전환: ‘오늘 같은 일요일’—불편이 진짜로 다가오는 순간

  • 학교가 없는 날, 늦잠을 자고 싶은 욕망과 새소리가 부딪히면서 “갈등”이 생겨요.
  • 그런데 여기서 엄마 참새와 ‘우리 엄마’의 대화로 갈등을 싸움이 아니라 조율로 바꿉니다.
    → 동화의 윤리가 대화 가능한 세계로 구현됩니다.

④ 위기: 전기톱(정리정돈)과 침묵

  • “윙/위이잉” 소리, “싹둑” 잘린 목련나무와 사철나무…
    이 대목에서 서정이 확 깨지며 현실의 폭력이 들어와요.
  • 아이가 느끼는 상실이 강한 이유는 “내가 참새가 가길 바란 적은 없다”는 문장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느꼈던 내가, 그 존재를 없애길 원한 건 아니었다는 감정의 층이 생기죠.

⑤ 성찰: 게시판을 ‘보지 않았던’ 나의 후회

  • 엄마 말: “편지가 게시판에 있었을 거야.”
  • 아이는 이걸 ‘죄책’으로만 끝내지 않고, **행동 습관(매일 게시판 보기)**으로 바꿉니다.
    → 동화답게 “반성 = 자기혐오”가 아니라 “반성 = 더 잘 살기 위한 관찰”입니다.

⑥ 결말: 엄마 참새의 편지와 귀환

  • 기다림의 시간(봄→여름)이 지나고, 다시 편지가 붙는 순간
    세계는 원래의 평화로 돌아오되, 아이는 이전보다 더 “알게 된 상태”로 돌아옵니다.

3) 중심 장치 5개: 왜 이 동화가 ‘끝까지’ 읽히는가

1) 게시판

아파트 게시판은 보통 공지·민원·관리의 공간인데, 여기서는 공동체 윤리의 무대가 됩니다.

  • 참새의 안내문: “시끄러울지 몰라요. 조용히 놀게요.”
  • 참새의 복귀 편지: “거처를 옮겼어요. 내일 이사 와요.”
    → ‘소음’이 ‘소통’으로 전환되는 핵심 장치.

2) 사철나무

사철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즉, 이 동화에서 나무는 단순 배경이 아니라
지속성(살아 있음)과 돌봄(보호)의 상징이에요.

  • 엄마가 가지를 싹둑 자르지 않는 선택 = 생명을 살리는 선택
  • 그러나 관리(정리정돈)가 들어오면 공동체의 생명이 쉽게 꺾임 → 현실의 씁쓸함

3) ‘시끄러움’의 재해석

처음엔 불편 → 곧 “기분 좋은 아침” → 상실 후엔 “조용해서 이상함/재미없음/슬픔”
→ 소음이 사실은 살아 있음의 징후였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4) 아이의 상상(고양이=왕자, 참새=공주)

이 상상은 장식이 아니라, 작품의 미학이에요.
아이의 상상 덕분에 인간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타자와 나’가 같은 크기로 존재하는 세계가 됩니다.

5) 시간의 흐름(봄→여름)

계절의 변화는 “기다림의 윤리”를 실감 나게 합니다.
상실 이후 곧바로 해결되지 않고, 잎이 다시 자라는 시간을 통과한 뒤 돌아옵니다.
→ 아이가 배운 건 “원망”이 아니라 “기다리는 법”.


4) 상실 장면이 좋은 이유: ‘악인’ 대신 ‘구조’를 보여줌

이 동화가 더 성숙한 지점은, 누가 일부러 참새를 쫓아낸 악인을 세우지 않는다는 거예요.
관리의 “정리정돈”은 누군가에게는 미관/안전/민원 해결일 수 있죠.
그 과정에서 작은 생명과 아이의 세계가 부서진다는 사실을 “아이의 눈”으로 보여줍니다.
→ 동화가 훈계가 아니라, 관찰을 통한 윤리가 되는 이유입니다.


5) 불교적 결(심사평의 말처럼 ‘삼투된’ 방식)

이 작품이 불교를 직접 말하지 않는데도 불교 동화처럼 읽히는 지점이 있어요.

  • 연기(서로 의지해 존재함): 사철나무가 있어 참새가 살고, 참새가 있어 아이의 아침이 된다.
  • 자비/배려: “미리 말하기”, “이해하기”, “기다리기”
  • 무상(변함): 어느 날의 전기톱으로 평화가 깨지고, 시간이 지나 다시 회복된다.
  • 경계 없음: 인간-새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짐.

결국 “이웃”이란 사람만이 아니라, 같은 공간을 쓰는 모든 생명이 됩니다.


6) 문장 리듬과 감각: 왜 ‘아이의 생명력’이 살아 있나

  • 짧은 문장과 감탄사, 의성어(푸드덕, 조잘조잘, 윙, 위이잉)가 아이의 호흡을 만듭니다.
  • 관찰 묘사가 구체적이에요(사철나무 잎의 광택, 남천 열매, 햇살이 그리는 그림).
    이 덕분에 메시지가 앞서지 않고, 독자는 “보는 재미”로 따라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