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원탁 / 최은영

<당선작>
원탁 / 최은영
원탁을 들인다
앉을 사람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계란은 삶아 놓는다
깨지는 것을 싫어할지도 몰라
비 오는 날
물을 뚝뚝 흘리며 우산도 없이 언니가
오면 좋을 것 같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닦아주고 원탁으로
끌어당겨
따뜻한 감자스프를 한 그릇 먹게 하고
할 이야기가 없으면
울다가 잠들었던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저녁이면 모여드는
어느 집 식탁처럼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끼어 앉아서
불에 구운 가지에 양념을 붓다가
흘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얼굴들 흩어져 목청을 높이는 붉은 목소리들
오므린 발가락을 펴지 않고 깨진 접시를
쓸어 담지 않고
하얗게 찔린 눈으로 마주보고
서로의 등에 모르는 글자를 새기고
지나간 밤은 잊어버린다
저녁이 원탁에 모이면 좋겠다
<당선소감>
첫눈과 함께 도착한 당선의 소식
우체국 가는 길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가방을 멘 아이들이 눈이다 소리치며 신나게 뛰어가는데
커지는 눈발에 에코백 안에 든 봉투가 젖을까 가슴에 안았습니다.
접수를 마치고 나오니 눈발은 더 커져 검정 외투에
하얗게 쌓였습니다.
첫눈과 함께 보냈으니 내 글들이 첫눈처럼 환영 받길 바라며
소진된 에너지 탓에 집에 오자 곧 잠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폭설이었네요.
카페에서 당선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 편의 시를 사십 번 오십 번 고쳤을 때 마음에 들었다는
메리 올리버의 ‘시 쓰기 안내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벅차고 기뻤습니다. 카페 바깥 통로에 서서 너무 기쁘다고
기쁘다고 수없이 말했습니다.
시가 될까 두근두근 거리는 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셨던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나중도 언제까지나 감사드립니다.
신랄하게 또는 날카롭고 신중하게 합평을 나누던 문우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많이 보고 싶고 감사합니다.
혼자는 올 수 없었던 시의 길이었습니다.
열심히 쓰고 고치며 시를 쓰겠습니다.
항상 응원해준 가족에게 큰 기쁨을 나눕니다.
부족한 저의 시를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 안도현 시인님 박성우
시인님께 고개 숙여 무한 감사드립니다.
전북일보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 최은영 씨는 부산 출생으로 경성대학교를 졸업했으며, 2021년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과 2023년 고산문학대전 신인상을 수상했다.
<심사평>
대상의 핵심을 짚어내는 맑은 눈, 시를 읽는 재미를 주는 작품 만나
숙고의 시간이 길었다. 예심을 거친 16명의 시작품은 몇몇을 제외하고 저마다의 개성과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자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며 논의의 대상을 좁혀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포쇄」와 「박쥐의 문장」, 「기대면 추락 위험」과 「도꼬마리와 꽃뱀과 제비」, 그리고 「원탁」이다.
「포쇄」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시각이 좋았다. 다소 낡아 보이는 지점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밀고가는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오래된 그릇을 꺼내 햇볕에 말리는 그림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선명성도 강렬했다. 그러함에도 ‘고서’, ‘서가’, ‘고문서’가 반복되듯 나오면서 시의 확장성을 놓치고 있었다.
「박쥐의 문장」은 남다른 감각과 발랄한 상상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독특한 문장으로 새로운 시 세계를 열어가려는 열정을 느끼기에도 충분했지만, 군데군데의 시행이 산만하게 다가왔다.
「기대면 추락 위험」은 현실의 모순이나 뒤틀림을 시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높이 봤다. 구체성이 결여되는 지점을 두고두고 고민해 보길 바란다. 「도꼬마리와 꽃뱀과 제비」는 자연의 생명성을 단정한 언어와 서정으로 되살리려 많은 공력을 들이고 있었지만, 아직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원탁」은 소통 불능의 시들이 넘쳐나는 작금에 긍정적이고 따뜻한 어떤 세계를 펼쳐 보이는 점을 높이 샀다. 시가 독자에게 작은 위로와 토닥거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시적 대상을 심각한 눈으로 보지 않고 대상의 핵심을 맑은 눈으로 짚어내는 솜씨도 돋보인다.
곁길로 새지 않고 집약적으로 시를 밀고 가는 힘 또한 만만치 않아, 모처럼 시를 읽는 재미를 만나는 기쁨이 컸다는 것을 밝힌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안도현·박성우 시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한 문장 핵심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미리 상을 차리는 일—그 ‘준비’ 자체가 사랑이고 회복의 기술이다.
2) 장면 전개(서사 흐름)
- 세팅(결핍의 전제)
- “원탁을 들인다 / 앉을 사람이 오지 않을지도”
→ 시작부터 부재(빈 자리)를 깔고 들어가요. 따뜻한 시인데, 출발점은 결핍입니다.
- 조심스러운 배려(상처를 가정함)
- “계란은 삶아 놓는다 / 깨지는 것을 싫어할지도 몰라”
→ 상대의 성향을 ‘모른 채’로 상정하고, 가장 안전한 방식(삶은 계란)으로 다가가요.
- 구체적 바람(언니의 귀환/입장)
-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언니가 오면”
→ ‘언니’는 가족이자, 화자가 부르고 싶은 관계의 대표 인물로 서요.
- 돌봄의 행위(몸의 회복)
-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닦아주고 / 원탁으로 끌어당겨”
→ 여기서 시의 정서가 확 바뀝니다. 말로 설득하지 않고 손으로 닦고, 당깁니다.
- 대화의 대체물(말이 없을 때의 이야기)
- “할 이야기가 없으면 / 울다가 잠들었던 이야기라도”
→ 관계가 망가진 흔적(울다 잠든 밤)을 “대화의 씨앗”으로 삼아요.
- 소란스러운 공동체의 복원(저녁 식탁)
-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끼어 앉아서”
- “가지에 양념을 붓다가 흘리기도 하고”
→ 완벽한 화해가 아니라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생활의 복원이에요.
- 상처의 보류/정지(치우지 않는 것들)
- “오므린 발가락을 펴지 않고 / 깨진 접시를 쓸어 담지 않고”
→ 여기 핵심: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대신, 지금은 치우지 않고 같이 앉는 것이 우선이에요.
- 낯섦의 인정과 새로운 각인(등의 글자)
- “서로의 등에 모르는 글자를 새기고 / 지나간 밤은 잊어버린다”
→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모르는 글자), 관계는 새로 쓰일 수 있다는 선언.
- 종결(바람의 문장)
- “저녁이 원탁에 모이면 좋겠다”
→ ‘좋겠다’로 끝내며, 확정이 아니라 희망의 형태로 남깁니다.
3) 상징과 장치 읽기
원탁
- ‘상석’이 없는 형태라서 평등/동등한 자리의 상징이에요.
- 동시에 “빈자리를 포함하는 형태”: 오지 않는 사람의 자리까지 포함하는 둥근 공간.
삶은 계란 vs 깨진 것
- ‘깨짐’은 접시, 관계, 말, 마음의 파열을 다 품는 은유로 작동합니다.
- 삶은 계란은 깨지기 쉬운 존재를 위한 안전한 선택이에요. (배려의 형태가 ‘요리법’으로 등장)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오는 언니
- 우산은 보호/방어의 상징인데, “없이” 온다는 건 방어를 잃은 상태, 혹은 도움을 청하러 오는 상태를 강하게 암시해요.
감자스프 / 불에 구운 가지 / 흘리는 양념
- 따뜻한 스프: 회복, 진정, 몸을 먼저 살리는 돌봄
- 가지와 양념: 생활의 손맛, 약간의 실수까지 허용하는 공동체
- 흘림은 결함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처럼 쓰입니다.
“하얗게 찔린 눈”
- 따뜻한 분위기 속에 갑자기 들어오는 냉한 이미지예요.
- 관계의 상처가 완전히 지워진 게 아니라, 날카로움이 아직 남아 있음을 한 번 찔러 보여줍니다.
“서로의 등에 모르는 글자”
- “모르는”이 중요해요. 우리는 타인을 끝내 다 알 수 없고, 그럼에도 관계는 ‘새겨지며’ 지속됩니다.
- 등은 스스로 볼 수 없는 곳이니, 타인이 써주는 나의 이야기/흔적이기도 해요.
4) 이 시가 좋은 이유(심사평과 맞닿는 지점)
- 주제를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만 보여줌: 들인다/삶는다/닦아준다/먹인다/끼어 앉는다…
- “따뜻함”이 감상적 포즈가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돌봄의 동작)**으로 구현됨
- 이미지가 곁길로 새지 않고, 식탁-저녁-원탁의 축으로 끝까지 집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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