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흰지팡이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 공광복

<당선작>
흰지팡이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 공광복
'흰지팡이가 저어새처럼 걸어간다
비 오는 점자블록 길을
지팡이는 저어새 부리 흉내 내는지
나는 문득 흰지팡이 심정이 궁금해져서
우산을 접고 눈 감고 우산 끝으로 길 만져본다
점과 직선으로 돋은 점자들
감각이 무딘 우산은 점자 떠듬떠듬 읽어서
눈 대신할 만한 것들을 호출한다
손, 발, 귀는 길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손과 발과 귀 끝이 고양이 수염처럼 뾰족해지는데
눈 감으면 길은 벼랑에 놓인 외나무다리, 비는 내리고
다리 밑에서 급류가 헛발을 노리는 것 같아서
핑계로, 나는 그만 눈을 뜬다
물음표 같은 것들 빗물에 흘려보내고
고민 없는 길을 걷는다 노랗고 KS마크 박혀 있는
종종걸음도 아닌데 걸을수록 흐트러지는 발걸음
길이 나를 자꾸 넘어뜨리려 한다 나는 휘청거리고,
버스 정거장이 도로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는데
발목이 노인처럼 지쳐간다
이 길이 그의 길이라니
흰지팡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신호등이 수 거꾸로 세며 불안한 눈 끔벅거리는데
점자 없는 길바닥 읽느라 난감한 지팡이와
움츠러든 엄지에 붙어서 길 더듬거리는 발가락들,
안개비 까닭 없이 추적거리는 사거리에
온몸 끝이 더듬이가 된 사람
길눈 어두운 지팡이 따라 밤길 가듯 걷는다'
<당선소감>
“시인의 역할을 생각하며, 보이지 않은 것을 찾는 데 열중하겠다”
‘제4회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공모에 당선된 공광복 시인은 24일 당선 소감을 통해 “길을 가다가 점자블록 길이 보이면 의식을 치르듯 걸었습니다. 나의 간절함을 신에게 보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기도보다 과분한 응답을 받은 지금, 나는 신이 아닌 가까운 사람과 나 자신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들떠 있다”며 “앞으로도 길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당선까지 데려다준 점자블록 길과 흰 지팡이에 큰절을 하고 싶습니다. 당장 절을 해야겠습니다. 점자블록 길이 생각 속에서 더 커지고 흰 지팡이가 더 하얘집니다. 시 세상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 느낌입니다. 길이 출발선에 선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입니다. 길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궁리할 문제입니다. 점자블록 길도 더 자주 걷게 될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나의 시를 세상에 내밀기에 주저했습니다. 쭈뼛거렸던 것이 미안해집니다. 이제는 당당히 내보일 수 있겠다”며 “시 세상으로 들어오는 문을 열어준 중부광역신문사와 청주시문학협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신춘문예를 주관한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추진위와 시인의 이름표를 달아 주신 본심 심사위원인 이승하 교수님과 성낙수 시인님, 예심 심사위원인 한상우 시인과 김나비 시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표했다.
‘제4회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공모에 당선된 공광복 시인은 전남 화순 출생으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학과 졸업하고 수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교육 석사과정을 거쳐 2016년 한국시학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우수상(2024)과 처음 시문학상(대상, 2022)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우리, 홀로 설 수 없는(2018)’이 있다.
그는 수원칠보고등학교·천천중학교 교감과 화홍고등학교·숙지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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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공모’...대한민국 ‘시(詩)’ 문예의 미래를 밝히고, 역량 있는 시인 배출 의의
성낙수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공모’ 추진위원장은 심사평을 통해 “당선작을 출품한 공광복 시인은 신상 약력 및 시 모방 등 확인 과정에서 몇 년 전에 중부광역신춘문예를 응모해 우수상을 받은 분이었다”며 “그동안 열심히 습작의 과정을 거쳐 이번에 당선의 영광을 차지해 우리 신춘문예추진위도 반갑고 기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공광복 시인의 ‘흰지팡이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작품은 비 오는 날 점자블록 길을 걷고 있는 시각장애인을 보고 흰 지팡이가 살아서 저어새처럼 걸어간다고 생각한 것이 시의 첫 모티브”라며 “우리는 지체장애인을 길에서 보더라도 무심히 봐 넘기는데, 공 시인은 끝까지 눈길을 떼지 않는다. 올해의 당선작으로는 손색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심사위원 : 성낙수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한 문장 주제
보행 약자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 실제로는 얼마나 불완전하고 폭력적인지, 그리고 그 현실을 보지 못한 채 ‘고민 없는 길’을 걷는 우리의 무감각을 흔든다.
2) 구조: 관찰 → 모의 체험 → 도덕적 각성
① 관찰(흰지팡이=저어새)
- “흰지팡이가 저어새처럼 걸어간다”는 첫 비유로, 지팡이를 단순 도구가 아닌 생명/주체로 세워요.
- “비 오는 점자블록 길”은 촉각/미끄러움/소리까지 포함하는 위험한 공간으로 열립니다.
② 모의 체험(화자의 ‘눈 감기’)
- 화자가 우산 끝으로 점자블록을 더듬는 장면이 이 시의 큰 전환점.
- 하지만 “감각이 무딘 우산” 때문에 점자를 “떠듬떠듬 읽어서” 실패하죠.
→ 여기서 말하는 건 *“내가 해봤더니 힘들더라”*가 아니라
대체 장치(우산/내 몸)가 ‘눈’이 되기엔 근본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③ 각성(다시 눈 뜨고 ‘KS마크’ 길을 걷는 나)
- 화자는 두려움 앞에서 “핑계로, 나는 그만 눈을 뜬다”라고 고백합니다.
- 그리고 “고민 없는 길”을 걷는데, 그 길엔 “노랗고 KS마크”가 박혀 있어요.
→ 안전 규격(표준)의 표식이 실제 안전이 아니라 안전 ‘인증’의 환상일 수 있음을 비틀죠.
3) 핵심 장치 3개
① 저어새 비유: ‘더듬기’의 생태학
저어새 부리로 물속을 쓸어 먹이를 찾듯, 흰지팡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색합니다.
→ 시는 ‘장애’를 개인 문제로 보지 않고, 탐색 방식의 차이로 옮겨 놓아요.
② 몸의 끝이 더듬이가 되는 이미지
- “손과 발과 귀 끝이 고양이 수염처럼 뾰족해지는데”
- “온몸 끝이 더듬이가 된 사람”
이 반복은 “보는 것”이 단지 눈의 기능이 아니라 몸 전체의 정보 처리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긴장과 피로를 유발하는지도요.
③ 숫자 카운트다운(‘신호등이 수 거꾸로 세며’)
횡단보도는 시간 제한이 있는 공간. 카운트다운은 압박과 공포를 증폭합니다.
시각장애인에게 ‘길’은 ‘경치’가 아니라 제한 시간 안에 통과해야 하는 미션이 돼요.
4) 시가 비판하는 것: “길”과 “나”
이 작품에서 진짜 날카로운 부분은, 시각장애인을 “그”로 두고 끝내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 “이 길이 그의 길이라니”
→ 동일한 도시 공간인데, 누구에겐 벼랑의 외나무다리가 된다는 인식. - 화자는 결국 “물음표 같은 것들 빗물에 흘려보내고” 눈을 떠요.
→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는 나를 드러내며, 시는 독자에게도 그 회피를 떠넘깁니다.
5) 좋은 구절의 기능
- “점자 없는 길바닥 읽느라 난감한 지팡이”
→ ‘점자블록이 없는 구간’은 곧 언어(정보)가 끊기는 구간.
길을 ‘읽는다’는 표현이 강력해요. 길은 문장이고, 도시는 텍스트인데, 누군가에겐 글자가 지워져 있는 셈. - “움츠러든 엄지에 붙어서 길 더듬거리는 발가락들”
→ 신체 세부를 클로즈업해 불안이 몸 전체로 전이되는 걸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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