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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공책 / 김유석

 

공책 한 권 달랑 들고

들판학교 다니는 우리 아빠

빽빽이 썼다가 지우고

이듬해 봄부터 다시 쓰는

그래도 너널거리지 않는

울 아빠 파란 공책에는

찰랑찰랑 벼 포기들이 넘실거려요

맞춤법이 조금씩 틀린 벌레소리 들리고

할아버지 닮은

염소도 한 마리 묶여 있어요.

똑 똑 똑

땀방울 말줄임표를 따라가면

하늘이 내려와 밑줄을 긋는 지평선 위에

따뜻한 내 옷이랑 새 운동화가 놓여 있지요.



흰 눈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내서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너무 꾹꾹 눌러 써서

뒷장에 남은 자국을

겨울이면

기러기들과 함께 나는 읽지요. 

 

 

[동시 당선소감] "이성 사이 뭉클한 감성… 풋풋한 동심의 소리 적었다"

“좋은 시는 동시를 닮았다.”

그렇습니까? 시를 쓰면서, 흙냄새 나는 자연 속에서 사람 사는 일들의 비유와 상징을 긷다 보면 이성의 이랑 사이로 촉을 내미는 뭉클한 감성들이 있습니다. 여리고 풋풋한 것들, 딴엔 반지레한 도깨비바늘 풀씨 같은 것들이 머리가 여럿 달린 사유의 바짓가랑이에 묻어나곤 합니다. 아슴한 유년에서부터 폐교된 들판 운동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이곳을 들러 갔지만 아직 더 많이 남아 자생해가는 것들, 길섶 강아지풀이나 눈밭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을 따르다 보면 이명처럼 들려오는 노는 아이들 소리 그것을 적었습니다.

어쩌면 몇몇 남아 있는 시골 아이들보다 방학 때 한 차례씩 다녀가는 도회지 아이들에게서 더 절실할 자연, 어른들의 생각과 어른들의 느낌으로 쓰여지고 읽히기 쉬운 생물들의 모습을 동시를 닮고 싶은 욕심으로 적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마른 풀잎들이며 발목이 붉은 기러기들, 추운 모습으로 겨울 들판을 지키는 모든 것이 기뻐할 듯싶습니다. 쉬 눈에 밟히지 않는 작고 무르고 외딸은 것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하루 들길을 걸었습니다. 서툴고 어줍은 글을 심사해주신 선생님께 깊은 절 올립니다. 늘 저만치 안동해 주는 사람, 쿨럭 거리는 동인들, 그리고 “내 친구가 시인이야” 하고 어깨에 힘주는(?) 친구들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더 남은 가슴은 지금도 종종 머리 센 아들을 “아가”라 부르는 노모의 잠을 솜이불처럼 덮어 드려야겠습니다.

▲1960년 전북 김제 출생 
▲전북대 문리대
▲1989년 전북일보,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시 당선 

[동시 심사평] 말줄임표를 땀방울에 비유한 동화적 상상력 돋보여

국민의 문학 축제라 부를 만큼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많은 작품을 보내왔다. 작품마다 소박하고 진솔한 동심이 담겨 있어 기뻤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전반적으로 생생한 동심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나 오늘날 아이들의 현실과 애환을 담은 작품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심수철, 최인숙, 황경순, 하미경, 박대성, 김경련, 김유석이 남았다. 심수철의 ‘내 마음도 토란잎처럼’은 비유가 적절했지만 너무 평범했다. 최인숙의 ‘필리핀 벼룩시장’은 결말은 괜찮았으나 시상이 단조로웠다. 황경순의 ‘무당벌레’는 발상은 좋았으나 소품이었다. 하미경의 ‘밥통 속 아줌마’는 참신했지만 내용이 약했다. 박대성의 ‘나무가 말해 주는 걸’은 시적 표현과 언어 구사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성인의식이 두드러진 것이 흠이었다. 김경련의 ‘풍경 소리’는 동시를 오랫동안 쓰고 수련한 공력이 엿보여 미더웠다. 생활 주변의 소재를 동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잔잔한 여운으로 그려내고 있으나 기존 동시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흔한 소재와 표현이어서 뚜렷한 개성이 부족했다. 그에 비하면 김유석의 ‘아빠의 공책’은 동화적 상상력과 참신한 비유의 독창성이 돋보였다. 아빠의 농사를 공책에 비유하여 벼가 자라는 들판에서 말줄임표처럼 말없이 땀방울을 흘려 아이의 옷과 운동화를 마련해 준다는 이야기를 신선한 시적 표현과 상상력으로 담아낸 역량이 미더웠다. 흔한 소재를 자신만의 이미지로 새롭게 표현해 낸 독창적인 발상과 상상력이 앞으로 개성이 뚜렷한 동시를 쓰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