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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대봉 / 김이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당선소감>


 “겨울비처럼 세상에 붐비는 시를 써갈 것”

 

 빗방울이 차갑게 공중에 붐비고 있습니다. 8층에서 내려다보는 세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까지의 김이솝이 아닌 것에 대하여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접하기 전과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인지!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찾아와 평생 열병을 앓게 하고 시 중독자로 만들어 버리더니 이젠 아예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시 내림의 형벌을 가하고 맙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처와 역사와 시간의 긴 타래 속에서 더 고뇌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라는 명령을 내가 내립니다.

 시가 나를 구원해 준 것처럼 내 시가 아파하는 모든 사람, 사물,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치유하고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소통되는 시를 쓰겠습니다. 지금 내리는 겨울비처럼 세상에 붐비는 시를 쓰겠습니다.

 장석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신미균 시인님, 이진명 시인님, 임동윤 시인님, 문정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사랑 회원님들, 서교동 시의 도반,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미천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경인일보 담당자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좋은 시 쓰겠습니다!


◎ 약력

▶ 1962년 대전출생

▶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 현재 (주)해외인증센터 근무



<심사평>


 역사의 질곡이 준 상처를 보듬기 위하여

 

 예상을 넘어서는 좋은 수준의 작품이, 그것도 예년보다 훨씬 많이 답지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간격이 그만큼 좁혀졌다는 뜻일 터이다. 수원과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많은 예비시인들의 작품이 날아와 쌓였다.

 당선작은 신춘문예 역사상 유례가 없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다 죽어간 두 파르티잔(빨치산)과 죽음을 지켜본 어떤 여성의 생을 다룬 시다. 현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가 중첩되어 있는데 시는 짧다. 한국전쟁 전에, 전쟁 과정에, 그리고 휴전 후에 몇 명이 지리산 일대에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울던, 고인의 어머니와 아내는 이제 연로해 몸도 마음도 성치 못하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의 그 생혈은 눈물일까 홍시일까. 눈도 귀도 어두운 노파는 눈이 잘 안보이는 이유가, 귀가 잘 안 들리는 이유가 노환에만 있지 않다. 그 시절에 젊은 아낙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60년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두 심사위원은 높이 사기로 했다. 생략과 비약이 좀 심한 것이 약점이지만 독특한 은유법과 의미심장한 상징화는 칭찬해줄 만한 장점이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소 발굽에서 꽃피고(박윤우)’가 단연 높았다. 문제는 이 작품을 받쳐주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 한 편만 놓고 본다면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화제가 될 시인데 아쉽고 안타깝다.

 ‘도배사(홍정선)’의 튼튼한 주제의식, ‘늦은 마트(권수옥)’의 따뜻한 시선, ‘절름발이(이경동)’의 세심한 관찰력, ‘스타킹페티시(이인영)’의 신세대적 감각도 놓치기 아까웠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더욱 열심히 습작하기 바란다. 한두 해 늦게 등단해서라도 오래오래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한 일이므로.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낙선자들에게는 격려의 악수를 청한다.


심사위원 : 최동호, 이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