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우물이 있던 자리

이승혁

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밤

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

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

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

어린 나의 입 속으로 곶감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

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

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 했지

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

두레박을 혼자 끌어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

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

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

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

줄이 끊어진 두레박은 우물 속 깊이 가라앉았고

전설들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다른 힘을 얻던 유년의 꿈들도

더는 담겨지지 않아요

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 마른 비늘의 궤짝들 틈이란다

횟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

아아.. 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

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

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

저물녘

늦가을의 핸들을 구부리며 깃드는 *신문리 451번지의 안마당 고요가

방금 전 그 파도에게라도 들켰는지

아주 오랜 옛날의 漁信처럼 기억의 지느러미 하나로 획 사라지고

있었다

* 강화읍의 마을주소

<당선소감>


3친구들에게 제일 먼저 감사이젠 진짜 내 이야기 시작할 때

 

지난 가을 내 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제가 우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저녁 습작의 분량으로 쓰여지게 된 시, 그게 당선작이라니.

우물, 아직은 내 기쁨의 표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되비춰지지 않는다. 미정인 채로 남아있는 대학 진로와 거리의 크리스마스 캐럴, 그 겨울을 비집고 내가 어머니의 분노에 다급해질 때마다 숨어들던 어린 시절의 식탁 밑이 떠오른 건 또 왜일까. 지금은 어떠한 수사도 어떠한 문장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 파도소리 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제부터는 내 본래의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먼 소년기때 조립하다가 중단된 서랍속의 장난감들과 저녁이면 하늘의 별 대신 아버지의 퇴근길 호프집 풍경에 고정시켰던 내 망원경, 형을 데리고 나서던 초등학교 뒷길, 문구사 아저씨의 색소폰 연주, 모두 내 시의 전리품이었음을 이제서야 실토한다.

내 기쁨의 이면들을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옮겨본다. 입시에 눈이 빨개진 강화고등학교 3학년 1반 친구들,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어느 길이든 걸었던 방황의 맨 마지막 코스였던 반지하에서 노래로 허기를 때우던 일행들, 입시의 기로에서 낭패에 빠질 때마다 투신 제의를 해오던 도시의 친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너희들이 있어 지난 한 해의 비극도 희극으로 뒤바뀔 수 있었다. 이튿날이면 교과서 대신 또다른 종류의 천재를 부여해주시던 김영언 선생님, 묵묵히 걸음마 떼기를 기다려 준 가족들, 반항의 시간들을 지켜봐 주신 담임 선생님, 10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멘토가 되어주신 김종연 선생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무엇보다 저를 뽑아주신 민용태 교수님, 김영철 교수님, 먼 길 가는 수사의 여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심사평>

 

유년기 시적 감수성 한 데 묶어현실·꿈 오가는 상상력 돋보여

 

본선에 올라온 35편의 작품들은 시적 완성도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으로 관념의 덩어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파편적 이미지 다발의 연쇄로 서술의 골격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추상성과 관념성이 구체적 시적 진술로 체화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돼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통과 통섭이 이 시대의 가치론적 코드인 만큼 수용미학적 차원에서 시적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세 편의 작품에 주목했다. 먼저 최영랑의 '고동의 길'은 고동의 길에서 인생의 굴곡을 반추하여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실현한 작품이다. 관념적 주제를 구체적 형상과 비유를 통하여 설득력있게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형상화의 초점이 다소 산만하게 흐트러져 시적 텐션이 조밀하게 형성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허영술의 '치즈의 눈물'은 원룸촌의 고달픈 삶과 슬픔의 내부를 의식의 소도구들을 동원하여 정치하게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충돌로 진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혁의 '우물이 있던 자리'는 시적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한 작품이다. 유년기의 잡다한 체험과 소재, 의식들을 하나의 감수성으로 통합하여 내적 질서를 창조해 내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시적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유년기와 성년기의 상상체계에 '잔별, 초승달, 두레박, 바다' 등의 은유기제를 덧입힘으로써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하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인상의 연쇄로 묶어내어 튼튼한 회상구조의 내적 통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적 통로는 시적 화자의 내밀한 언술로 착색되어 설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다양한 의식과 체험들을 개성적 감성으로 흡인하여, 현상과 환몽의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환유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울러 이미지 다발의 유기적 짜임으로 의미생성을 이루는 생산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성취를 고려하여 '우물이 있던 자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 민용태·김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