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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루비 / 김명진

 

  등장인물

  수오 29세, ‘오늘의 과학’ 서브작가

  서연 35세, ‘오늘의 과학’ 메인작가

  마술사 51세, ‘오늘의 과학’ 출연자

  어머니 51세, 젊은 날의 환영으로 나타난 마술사의 어머니

  은지 24세, 수오의 여자친구

  행인들 길을 걷다 TV 앞에 잠시 멈춰 선 엄마와 아이

  루비 어린 마술용 비둘기, <오늘의 과학> 출연자


  시간 현재

  12월 성탄전야, 늦은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공간 무엇인가 문득 사라져버릴 수 있는 공간.


  무대 방송국 사무실과 서연의 방, 마술쇼가 펼쳐지는 교회 무대는 각각 소품을 이용하여 연출할 수 있다.


  1장


  무대 한쪽은 방송국 사무실로 꾸며져 있다. 대형모니터를 중심으로 노트북 테이블, 소품 상자, 라면 박스, 카메라 케이스 따위와 ‘오늘의 과학’ 프로그램 홍보 입간판이 놓여 있다.

  무대의 다른 한 쪽은 서연의 원룸으로 꾸며져 있다.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 서연. (서연이 잠에서 깰 때까지 관객은 서연을 발견하지 못한다.

  늦은 밤. 노트북을 두드리며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는 수오와 그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구경하는 은지.

  은지 : 그럼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다 과학고 나왔어?

  수오 : 당연히 아니지. 과학 프로그램이라고 무슨 과학자들이 만들고 그런 거 아니야. 방송하는 사람들, 과학 그런 거 하나도 몰라. 졸라 무식해.

  은지 : 와, 그럼 오빠가 짱이네. 과학고 출신의 방송작가.

  수오 : (어깨를 으쓱) 글쎄.

  은지 : 오빠는 여기서 무슨 일 하는 거야?

  수오 : 나? 일단 자료조사를 하고, 아이템 정해지면 섭외 들어가고. 녹화 준비하고. 녹화 끝나면 프리뷰 맡기고. 프리뷰 나오면 가편 준비하고. 본편 끝나면 자막 써서 CG 의뢰하지. 그리고 나면 종편 준비.

  은지 : 와, 뭐가 되게 많네. 여기 일 오빠 혼자 다 하는 거 아냐?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렇게 혼자 나와 일하는 사람이 어딨어. 메인 작가는 뭐 하는데?

  수오 : 메인? 지금 아마 집에서 자고 있을걸.

  은지 : 피디는?

  수오 : 편집 대충 끝내놓고 공항으로 직행. 가족들이랑 해외여행 갔어.

  은지 : 뭐야, 다들 너무 하네.

  수오 : 원래 그런 거야. 세상은 원래 서브들이 받쳐줘야 돌아가는 거야.

  은지 : 그 서브라는 말, 자꾸 듣다보니까 좀 멋있는 거 같아.

  수오 : 그래? 너 티비 볼 때 자막 계속 나오지? 그거 다 내가 맨날 이렇게 꼬박 밤새가며 쓰는 거야.

  은지 : 우와.

  수오 : 그 자막이 영어로 뭐게?

  은지 : 자막? 음… 글쎄.

  수오 : 서브타이틀.

  은지 : 아하. 서브가 쓰는 거라서 서브타이틀이구나.

  수오 : 방송에서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자막이거든. 방송의 영혼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도 있어.

  은지 : 영혼까지나?

  수오 : 촬영하는 사람은 이거저거 찍어만 놨지, 편집하는 사람은 되는 대로 잘라서 붙여만 놨지. 자막 없으면, 그건 진짜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냥 쓰레기지.

  산업폐기물. 하지만 내가 쓰는 자막이란 건 말이야…

  어느 새 은지는 수오 곁으로 다가가고, 수오는 그런 은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수오 : 인간의 무의식, 즉 서브컨셔스를 파고드는 궁극의 텍스트라고나 할까.

  은지 : 서브…컨셔스? 또 나오네. 서브.

  수오 : 어. 출연자가 카메라 앞에서 소리 내어 하지 않은 말. 그치만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 그런 걸 뽑아내는 작업이야.

  (키스할 듯이 은지에게 다가가며) 아주아주 섹시한 작업이지.

  은지 : (수오를 가볍게 밀어내며) 그런 걸 어떻게 뽑아내는데?

  수오 : 음…그걸 어떻게 뽑아내냐면 말이야. 한 번 볼래?

  수오는 노트북 키보드의 엔터키를 누른다. 대형 모니터에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재생되는 화면 속에는 마술사 복장의 남자가 지친 표정으로 서 있다.

  수오 : 저 사람 눈을 봐봐.

  은지 : 뭐야?

  수오 : 오늘 녹화 뜬 거.

  화면 속의 마술사는 비둘기가 사라지는 마술을 시연중이다. 네 마리의 비둘기가 차례로 사라지지만, 다섯 번째 비둘기가 자꾸만 남자의 소매 섶에서 푸드덕 날아오르고 마술은 실패한다.

  수오 : 봤어? 저 사람 눈.

  은지 : 어. 엄청 빨개. 피곤한가봐.

  수오 : 바로 그거야. 저 사람은 지금, ‘나 지금 졸라 피곤해’ 그 말을 하고 싶겠지.

  은지 : 응.

  수오 : 그치만 못하지.

  은지 : 왜?

  수오 : 대본에 없으니까.

  은지 : 그 대본은 누가 쓰는데?

  수오 : 메인.

  은지 : 그럼 메인 작가는 대본에 무슨 말을 쓰는데?

  그 때 화면 속에서 가까스로 다섯 번째 비둘기를 사라지게 하는 데 성공한 마술사가 멘트를 시작한다. “신비로운 과학 속의 마술, 그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마술사가 말을 마치자 화면에는 나오지 않는 피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NG! 과학 속의 마술이 아니라 마술 속의 과학이잖아! 와, 돌아버리겠네 진짜! 비둘기 세팅 다시!”

  수오 : 마술 속의 과학…. 저런 구린 멘트는 메인이 쓴 거야. 난 자막 쓸 때 NG컷을 봐. 사람들이 진짜 궁금해 하는 얘기는 거기 있거든.

  은지 : 사람들이 진짜 궁금해 하는 얘기?

  수오 : 어. 저 사람은 비둘기를 어디에 숨겼을까. 저런 비둘기는 한 마리에 얼마나 할까. 저 정도 하려면 연습은 얼마나 할까. 요즘 저런 거 하면 얼마나 버나. 멋있는 척 하는 가식적인 멘트 말고, 속내를 까발리는 진짜 이야기를 찾는 거야. 그런 건 알파고도 못해.

  은지 : 와, 우리 오빠 되게 멋있다!

  두 사람 키스하려는데, 어디선가 부스럭 소리가 난다.

  은지 : 뭐야,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거 같지 않아?

  은지는 더러운 모포로 덮여 있는 구석의 상자 하나를 가리킨다.

  수오 : 아, 저거.

  수오가 생각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상자를 들고 은지에게 다가온다.

  수오 : 여기, 구멍으로 먼저 봐봐.

  수오는 모포를 걷어내고 상자에 뚫린 구멍으로 은지의 눈을 갖다 댄다.

  은지 : 옴마야! 안에서 뭐가 움직였어! 이게 뭐야?

  구멍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 본 은지가 뒷걸음치며 물러난다. 수오가 조심스레 상자를 열고 꺼낸 것은 흰 비둘기다. 비둘기는 수오의 집게손가락 위에 두 발을 얌전히 모으고 있다.

  그때 무대의 다른 편에서 서연이 악몽을 꾼 듯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난다.

  서연 : 아악! 어디로 갔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

  (정신 들면 서늘해지는 표정) 아, 또 그 꿈이네.

  서연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한다. 무대 어두워지며 암전.


  2


  무대 한쪽은 지방의 한 교회로 꾸며져 있다. 멀리서 성가대 합창이 들려온다. 성탄예배 행사를 앞둔 마술사가 의자에 앉아 어딘가로 다급히 전화를 건다.

  무대 다른 한쪽 서연의 방은 아직 어둠에 가려져 있다. 느린 발라드의 통화 연결음이 한참 울린 끝에 서연이 전화를 받으면 서연의 방이 서서히 밝아진다.

  서연 : (잠이 덜 깨어) 여보세요.

  마술사 : 작가님, 한 마리가 빕니다! 계속 말 안 듣던 그 막내 녀석 말이요. 아까 녹화 끝나고 케이지에 넣어놨는데 그게 지금 열어 보니까, 아니 글쎄, 한 마리가 비는 거예요.

  서연 : (침대에서 일어나) 걔가 어디로 간 거죠?

  마술사 : 제 말이요. 녹화 끝나자마자 차에 실어서 휴게소 한 번 안 들리고 곧장 내려왔거든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에요.

  서연 : (눈 비비며 하품한다) 참 희한한 일이네요.

  마술사 : 제가 지금 잠도 한숨도 못 잤어요. 작가님, 제가 지난 주 부턴가, 지난 달부턴가, 암튼 열흘 넘게 잠을 거의 한 숨도 못 잤다고요.

  서연 : 지금 어디 계신 거예요?

  마술사 : 지금요? 아, 여기 지방 큰 교회에 쇼가 있어서 내려왔어요.

  서연 : 와. 완전 연예인이시네.

  마술사 : (멋쩍게 웃으며) 연말 대목이잖아요. (다시 생각난 듯) 아니, 근데 그 비둘기가, 제 생각엔 그게, 분명히 방송국에 놓고 온 것 같아요. 아오, 내가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가지고.

  서연 : (놀라서) 방송국에요?

  마술사 : 네, 틀림없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 놈이 나서부터 길이 잘 든 놈이라 막 아무데나 막 날아다니고 그러진 않을 겁니다. 어디 얌전히 들어앉아 없는 듯이 있을 거예요. 하루 두 세 번씩 거뜬히 행사를 뛰던 놈이거든요. 다섯 놈 중에 제일 예쁘게 생겼고 영리하고. 아주 프로 중에 프로죠.

  서연 : 네. 그런데 오늘은 NG를 너무 많이 냈어요.

  마술사 : 아니, 그, 그건, 우리도 그날그날 컨디션이라는 게 있잖아요. 요즘 얘네들도 스케줄이 너무 몰아치다 보니까. 저도 계속 잠을 못 잤고요. 지난 주 부턴가, 지난 달 부턴가, 하루도 제대로 누워 잔 날이 없다니까요.

  서연 : 연예인 맞으시네. 돈 많이 버시겠어요.

  마술사 : 아, 돈은 좀 되죠. 요즘은 애들을 상대로 하는 게 그나마 돈이 좀 되거든요. 그 뭐냐, 키즈 마케팅.

  서연 : (진지하다) 아, 키즈 마케팅.

  마술사 : 예예. 뭐 그런 거죠. 어린 애들은 아직 마술을 믿잖아요.

  서연 : (무심코) 저도 믿어요, 마술.

  마술사 : (당황) 네?

  서연 : 제가 방금 전까지 꿈을 꾸고 있었는데요. 음, 그게 어쩌면 오늘 보여주신 마술이랑 비슷한 건데요. 사라졌던 비둘기들이 다시 나타나야 되는데 그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다시 나타나질 않는 거예요. 그리고 사실 제가 이런 꿈을 처음 꾼 게 아닌데요. 비둘기만 사라진 게 아니라 글쎄…

  마술사 : (끝까지 못 듣고) 아니, 죄송하다고요. 오늘 NG 많이 낸 거는. 제가 진짜 여러 번 말씀드리는데. 원래 그런 실수를 거의 안하는데. 오늘은 그게…

  서연 : 그게 아니라요. 진짜 사라졌다니까요. 그 마술이 진짜였다는 거죠.

  마술사 : (짜증나기 시작한다) 아니, 제가 지금 뭐 그런 꿈같은 얘기하자는 게 아니라, 사실 제가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저도 꿈 좀 꾸고 싶다고요. 그래서 말인데 제 비둘기 좀 찾아봐주실래요? 이름이 루비에요. 눈동자가 루비처럼 빨갛거든요. 분명히 방송국 구석 어디에 얌전히 있을 겁니다. (손목시계 한 번 보고) 저 이제 무대 올라 가야 돼요. 암튼 우리 루비, 꼭 좀 찾아주세요.

  서연 : (이름 되뇌어 보며) 루비. 신기하네요. 진짜로 사라지다니.

  마술사 : 꼭 좀 부탁드립니다. 저한테는 무척 소중한 놈이에요.

  전화를 끊은 서연은 다시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서서히 암전된다. 마술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술사! 나와 주세요!’ 하는 사회자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온다. 케이지에서 비둘기 네 마리를 꺼내어 마술을 시작한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말을 시작한다.

  마술사 : 여러분은 마술을 믿으십니까?

  마술사의 손끝에서 비둘기 네 마리가 차례로 사라졌다가.

  마술사 : 비둘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정말로 그냥 펑, 사라져버린 걸까요.

  다시 차례로 나타난다.

  마술사 : 아니면 어디 잠깐 숨어있는 걸까요?

  마술사는 다시 비둘기들 네 마리를 케이지에 넣고는 관객을 천천히 둘러본다.

  마술사 : 비둘기 한 마리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익히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거 같나요? 한 달, 두 달? 역시 여러분은 마술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마술사가 다시 비둘기들이 들어있는 케이지에 검은 천을 씌웠다가 주문과 함께 들어 올리면

  펑, 케이지 속의 비둘기들은 사라지고 없다.

  마술사 : 지금부터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눈앞에 떠오르게 해 보세요.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애인, 당신의 아이. 누구라도 좋습니다. 오직 그 사람의 얼굴이 당신 눈앞에 떠오르게 해 보세요. 컴퓨터 속에 저장한 파일처럼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그 이미지를 그대로 불러올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요. 떠오르는 대상이 바뀌어서도 안 되고 표정이 바뀌어서도 안 됩니다. 일체의 잡념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마음먹는 즉시 한결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술사란 환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니까요. 저도 해 보겠습니다. 저기, 제 어머니가 보이네요. 삼십여 년 전, 제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무대 뒤에서 ARS 음성 목소리가 건조하게 들려온다. ‘수험번호 1134 여진수님.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대학에 합격하셨습니다.’ 마술사 옆으로 어둠 속에 조명 켜지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마술사 환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듯이) 천천히 다가간다.

  마술사 : 당신이 만약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환각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턴 세상 모든 걸 환각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과정을 수련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 것 같습니까? 십 년. 자그마치 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근데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마술사 스스로가 환각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마술이 완성되지 않아요. 그 환각을 관중들도 똑같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관중들이 내가 의도한 환각을 갖게 하려면 우선 내가 그 환각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관중에게 전달해야 하는 건 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실존에 대한 절대적 믿음, 그 자체입니다.

  마술사는 조명 켜진 자리로 다가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포옹하는 몸짓의 판토마임을 시작한다.

  마술사 :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지요. 나지막한 숨결과 주름진 피부의 살결까지 느낄 수 있도록 아주 세세하게요. 다시 말하지만 마술사가 믿어야 관객도 믿습니다. 그리고 마술사가 보는 걸 관객도 똑같이 보기 시작하겠죠. 이걸 환각의 전이과정(이병주, ‘마술사’(한길사, 2006) ‘환각의 전이’라는 용어와 그 용어에 대한 서술을 참고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조명 꺼졌다 다시 켜지면 마술사와 포옹하고 있는 어머니가 실재한다(관객의 눈에 보인다).

  마술사 : 제가 이 과정을 수련하는데 또다시 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비둘기 한 마리를 사라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술 하나를 제대로 익히는 것만 해도 수십 년은 걸리는 일이다, 이 말입니다. 환각의 전이과정. 말이 멋있죠? 왜요? 좀 사이비 같다고요?

  (한바탕 웃고는 정색하며) 제가 이래봬도 한 때는 과학도였습니다.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때려치우고 마술사가 되겠다고 산에 들어간 거죠. 사람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했지만 전 믿음이 있었어요. 그 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엄청나게 유행할 때였어요. 연구에도 유행이 있거든요. 눈에 뻔히 보이는 세계를 증명하는 건 좀 진부하달까. 그런 분위기가 있었죠. 언제부턴가 절대적이란 말보다는 상대적이란 말이 있어 보인달까.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을 얘기할 땐 최소한 4차원 이상은 언급해야 뭘 좀 아는 사람 축에 들었죠. 측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세계보다는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개념이 과학자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게 과학이나 마술이나 한 끝 차이인 거거든요. 그래서 전 머리로만 증명하기보다는 온 몸으로 체험하는 쪽을 택한 겁니다. 내가 먼저 체험하고 그 생생한 체험을 사람들 앞에서 직접 증명해보이자는 생각이었죠.

  마술사는 관객 중의 한 사람을 지목한다.

  마술사 : 당신이 그걸 믿든 믿지 않든.

  그걸 과학이라고 부르든 마술이라고 부르든.

  마술사는 다소 흥분한 듯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마술사 : 여러분은 학교에서 배운 물리법칙을 몇 개나 기억하고 있죠? 뉴턴이요? 운동 제 일, 제 이, 제 삼 법칙이요? 관성, 가속도, 작용, 반작용.

  (박수를 치며) 와우, 훌륭하군요. 하지만 여러분이 지금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 분이 배운 건, 지금까지도 달달 외우고 있는 그 물리 공식들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마술사는 빈 의자를 앞으로 가지고 나와 마술을 거는 것처럼 기합을 넣는 손 제스처를 취한다.

  마술사 : 수리수리 마하수리! 얍!

  의자는 그대로 있다.

  마술사 : F=ma!

  힘 없이는

  가만히 있던 대상을 움직이게 할 수도 없고

  움직이고 있던 물체를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이번에는 마술사가 의자를 발로 걷어찬다.

  마술사 : 수리수리 마하수리! 얍!

  의자는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가고, 마술사는 아픈 듯 찡그리며 걷어 찬 발을 감싸 쥔다.

  마술사 : F=-F!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항상 존재하니

  그 힘을 견뎌내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다.

  이 의자 하나를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F, F, F, Force! 이 세계는 힘으로 지배되는 세계다.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게 세상의 자연이치니

  힘없는 자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왜? 이건 과학이니까. 교과서에 나오는 건 잔말 말고 그냥 외워라 이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배우는 건 과학지식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인 겁니다. 닥치고 순응하거나 억울하면 힘을 기르던가.

  마술사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회상에 젖어 나지막이 말한다.

  마술사 : 난 결국 내 청춘을 다 바치고서야 이 의자 하나를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내공, 힘이란 걸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술사는 빈 의자에 마술을 거는 것처럼 기합을 넣는 손 제스처를 취한다.

  마술사 : 수리수리 마하수리! 얍!

  의자가 정말로 사라진다.

  마술사 : 그 사이 어머니는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어요.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에 이르겠다는 그 거창한 목표에, 나보다 어머니가 먼저 너무 쉽게 도달해버린 거죠. 마지막 순간에 달려가 만난 제 어머니는… (목이 멘다) 계속 음식을 거부해서 몸이 더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쪼그라들어버렸더군요. 그 환하던 빛은, 그 강렬하던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조명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마술사 : 하지만 난 별로 슬프지 않았죠. 이미 난 원하기만 하면 영상통화하듯 건강한 시절의 어머니를 눈앞으로 불러내어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난 진짜 마술사가 되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마술 같은 거엔 관심도 없더군요.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마술 좀 한다고 설치고 다니는 사람은 아주 많더라고요. 나는 곧 깨달았죠. 그들이 하는 건 진짜 마술이 아니라 간단한 트릭 같은 거에 불과하다는 걸. 비둘기 마술의 트릭을 알려드릴까요?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해요.

  마술사는 입고 있던 상의 단추를 풀러 가슴, 소매의 비밀주머니를 꺼내 흔들어 보인다.

  마술사 : 바로 여기에 숨기는 겁니다. 녀석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일단 주머니에 들어가면 숨도 쉬지 않고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있어요. 이 마술은 그것뿐입니다. 그 담부턴 소매치기나 다름없어요.

  마술사가 현란한 손놀림을 시작한다.

  마술사 : 이 손을 사람들 눈보다 빠르게 놀리는 연습만 하면 되는 거죠. 아, 한 가지가 더 있어요. 그건 바로 속임수에 대한 죄의식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좀 뻔뻔해져야 한다는 거죠. 이제 조금만 손이 빠르고 조금만 뻔뻔해질 수 있다면 누구나 마술사가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은 생각보다 단순해요. 사람들은 비둘기가 다른 차원으로 사라지든 옷깃에 달아놓은 비밀주머니 속으로 사라지든 상관 안 해요. 눈에 안 보이게만 하면 받을 수 있는 박수 값은 똑같다는 얘기죠.

  조명 밝아지며 음악은 점점 빨라지고 화려해진다. 덩달아 마술사도 말이 빨라진다.

  마술사 : 그걸 깨닫고 나니까 모든 게 아주 쉬워졌어요. 세상은 바다와 같아요. 몸에 힘만 좀 빼면 파도를 타고 놀 수 있다 이겁니다. 어쨌든 나는 이 나이되도록 쭉 마술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방송도 하고 행사도 뛰죠. 아. 내년부터는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쳐요. 매직엔터테인먼트 전공 교수로 임용됐거든요. 잘 풀린 케이스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전공을 바꾼 건 신의 한 수였다고요. 돈도 안 되는 순수과학 계속 붙잡고 있었으면 지금쯤 입에 풀칠이나 했겠느냐면서요. 저요. 대통령 앞에서 창조경제인 상도 받았습니다.

  (감회에 젖어)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요…

  요즘은 어떤 마술을 하냐고요? 진짜, 가짜? 아직도 그런 걸 물으시다니 놀랍네요. 보시다시피 이 특수의상 한 벌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 할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괜히 힘만 빠져요.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그걸 가짜니 사기니 비난하지도 않아요. 요즘은 뭐가 됐든 진짜를 바라는 자체가 좀 올드한 거거든요.

  사람은 말이죠. 세상의 흐름을 잘 읽어야 되요. 그래야 살아남아요.

  휘몰아치듯 클라이맥스를 향해가던 음악이 돌연 뚝 끊어진다.

  마술사 :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루비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그리고 난 왜 이렇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걸까요.

  자꾸 눈이 감기네요. 큰일이네요. 빨리 다음 스케줄로 넘어가야 되는데.

  마술사 : 잠깐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진다.

  그때 서연이 다시 악몽을 꾼 듯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난다.

  서연 : 아악! 안 돼. 말도 안 돼. 내 손, 내 발, 내 얼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잠에서 깬 서연은 손으로 자기 몸을 더듬어 본다. 서연은 침대에서 나와 테이블 노트북 앞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비트가 빠른 힙합풍의 통화 연결음이 길게 울린다.


  3장


  방송국의 수오가 뒤늦게 달려 나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를 받는다.

  수오 : 여보세요?

  서연 : 수오씨. 나야. 아직 방송국이야?

  수오 : 예. 작가님.

  서연 : 연휸데 늦게까지 고생했네. 자막은 다 됐고?

  수오 : 네. 다 뽑아서 메일로 보내드렸어요.

  서연 : 그래? 어디 한 번 볼까.

  서연이 노트북 모니터를 보며 자막텍스트를 읽는 동안 방송국의 모니터 화면에서 마술사의 마술 영상이 재생된다. (관객은 모니터 화면을 보며 서연의 자막을 듣는다)

  서연 : ‘다크서클 턱 밑까지 내려온 만성피로 마술사’

  ‘써준 대본 영혼 없이 읽는 유체이탈 화법’

  ‘집나간 비둘기도 돌아오게 한다는 마력의 손짓발짓’

  서연이 읽기를 멈추고 길게 한숨을 쉰다. 모니터 화면도 정지된다.

  서연 : 수오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수오 : 네? 뭐가…잘못 됐나요?

  서연 : 우리 프로그램 타이틀이 뭐야?

  수오 : 오늘의 과학이요.

  서연 : 그래. 오늘의 과학. 과학이라고 과학. 예능이 아니라. 과학을 타이틀로 내건 교양 프로그램이면 그에 맞는 격이 있어야지. 좀 더 지적이고 고급스럽게. 자막이 이게 뭐야. 지금 장난해?

  수오 : 네. 근데 오늘의 과학이잖아요. 오늘이요 오늘. 어제의 과학이 아니라.

  서연 : (이해 못하고) 뭐?

  수오 : 요즘 교양이란 말 안 써요. 쇼양이라고 한다고요. 이건 그냥 다 쇼에요.

  교양 같은 거 요즘 아무도 관심 없어요. 재미없으면 안 본다고요.

  서연 : (기가 막힌다) 뭐야?

  수오 : 취향에 안 맞으신다면 죄송합니다만 요즘 트렌드가 그래요.

  서연 : 수오 씨는 프로그램에 대한 진정성이 그거 밖에 안 돼?

  수오 : 진정성이요? (실소를 터뜨린다) 지금 진정성이라고 하셨나요. 솔직히, 사람 하나 데려다 세워놓고 어설픈 마술 시키면서 무슨 과학을 다룬다는 건지. 도대체 기획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건 뭐 내용도 없고 깊이도 없고. 재미라도 살려야죠.

  서연 : (듣는 동안 표정이 어둡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내일 만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겠다. 참 그리고, 아까 출연자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저기 있잖아… 오늘 녹화한 비둘기 한 마리, 혹시 못 봤어?

  수오는 모포가 덮인 박스를 힐끔 쳐다본다.

  수오 : (모르는 척) 비둘기요?

  서연 : 아니. 마술사가 비둘기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전화가 왔는데. 글쎄, 그걸 방송국에 두고 온 것 같다는 거야. 눈 빨간 애. 이름이 루비래.

  수오 : …

  서연 : 뭐, 혹시 모르니까 스튜디오 한 번 체크해줘.

  근데 있잖아. 내 생각엔 말이야. 루비가 정말 사라진 것 같아.

  수오 : …

  서연 : 생각해 봐. 이게 처음부터 비둘기가 사라지는 마술이었잖아. 그러니까 비둘기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거지.

  수오 : (어이없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서연 : 우리가 애초에 과학 프로그램에 마술사를 섭외한 이유가 뭐였지?

  수오 : 그야, 요새 정통 과학 아이템 가지고는 시청률이 안 나오니까, 아이템을 연성화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여보자는 취지였잖아요.

  서연 : 그건 그냥 보고용 기획의도인거고. 내 진짜 기획의도는 말이야. 난 사실 마술사를 섭외한 게 아니라 비둘기들을 섭외한 거였거든.

  수오 : …

  서연 : 걔네들은 태어나서부터 쭉 그렇게 길들여진 거잖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숨었다 나왔다 숨었다 나왔다 숨었다 나왔다… 내가 요즘 계속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는데 말이야.

  서연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서연 :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어. 나는 혼자 무대 위에 서 있고 내 앞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 사람들은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어. 눈도 깜빡 안 하고 다들 나만 보고 있는 거야. 왜냐면… 그 사람들은 돈을 냈거든. 그래서 나는 뭔가를 보여줘야만 해.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내가 뭘 해야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을까. 노래를 불러볼까. 춤을 출까. 아니면 옷이라도 벗어야 할까. (자신 없이 고개를 가로 젓는다) 도대체가 보여줄 게 없는 거야. 너무 무서웠어. 미동도 안 하는 눈동자들. 저 사람들은 만족할 만한 걸 볼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까. 매일 밤, 나는 똑같은 무대 위에 끌어올려져 있었어. 그 위에선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지. 그런데 말이야. 언제부턴가 박수가 터져 나오고 기분 좋은 휘파람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하는 거야. 뭐지? 내가 뭘 했다고. 사람들이 지금 뭘 보고 저렇게 환호하는 거지?

  조명이 어두워지며 무대 위 서연의 손발, 팔다리가 천천히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서연 : 내 손이, 발이 사라지고 있었어. 그 다음에는 팔과 다리, 종아리에서 허벅지까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빛이 사라지고 나는 점점 작아졌어.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빛이 천천히 사그라져 완전히 암전된다. 어둠 속에서 서연의 목소리만 들린다.

  서연 : 더 작아질 수 없을 때까지.

  마침내 나는 모든 빛을 잃어버렸지.

  조명 다시 켜지면 서연은 그 자리에 없고 먼지만 부유한다. 빈 무대 위로 목소리뿐인 서연이 계속 말한다.

  서연 : 그리고 먼지처럼 가벼워졌지.

  그러자 무대 뒤에서 사람들의 환호소리, 박수소리 들려온다.

  서연 :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었어. 사라진 나였어.

  수오 : 그래서, 작가님의 그 이상한 꿈 때문에 비둘기를 섭외했다고요?

  조명 한 번 더 꺼졌다 켜지면 다시 서연이 서 있다.

  서연 : 생각해봐. 길거리에 발에 채이도록 널려있는 비둘기 따위에게 누가 과자를 던져 줄 것 같아? 존재 자체가 이미 민폐인 걸. 적어도 사라지는 마술을 마스터한 비둘기라면 이 시대에 그 존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 거야.

  사랑받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아니,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라져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들인 거지. 우리는, 적어도 우리는 그런 존재들을 존중해야 돼. 그렇게 쉽게, 한 조각도 안 되는 웃음꺼리로 만들어버려선 안된다고.

  수오 : 죄송한데요. 지금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서연 : (한숨) 좋아. 지금부터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할게. 이번 마술사 편을 마지막으로 우리 프로그램 폐지될 거야. 그리고 이제 앞으로 방송판에서 과학 프로그램 같은 거 편성되기 힘들 거고. 수오 씨도 잘 알고 있듯이 과학은 예능도 교양도 뭣도 아니니까.

  수오 : (충격 받는다) 아무리 그래도…

  서연 : 알아. 허무하지.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는 건 금세 잊어. 몇 달만 지나면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못할 거야.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수오 씨는 이 일, 계속할 건지 말건지 진지하게 잘 생각해봐. 자막은 다시 뽑고.

  전화 끊은 오는 모포로 덮인 상자를 열어 비둘기를 꺼내 손 위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본다.

  수오 : (비둘기에게) 루비.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무대 어두워지며 암전.


  4장


  이른 아침의 방송국.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 수오는 테이블 위 노트북을 덮고 주위의 상자 등을 정리한다. 은지가 커피 두 잔을 들고 걸어 들어온다.

 은지 : 메리 크리스마스! 오빠, 밤 샌 거야?

  수오 : 아. 벌써 아침이네.

  은지 : 우리 오빠 힘내라고 모닝커피 사 왔지. 오빠, 지금 밖에 눈 온다!

  수오 : (심드렁) 그래?

  은지 : 응. 고맙게도 내리면서 녹는 눈이야.

  수오 : (신경질적으로) 그게 고마운 거야? 내리면서 녹는 게?

  은지 : (무안해서) 왜 그래. 오빠 집에 가는 길 미끄러울까봐 그러지.

  수오 : 미안. 잠을 못자서 신경이 날카로워.

  은지 : 아직도 할 일 많아?

  수오 : 아니. 이제 없어.

  은지 : 와, 벌써 다 했어? 역시 실력자야.

  수오 : (짜증난다) 그러고 서 있지만 말고 여기 짐 정리 하는 것 좀 도와줄래?

  은지 : 짐 정리?

  수오 : 응. 나 이제 여기 방 빼야 돼.

  은지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수오 : 밤에 메인한테 전화 왔어. 우리 프로그램 폐지된대.

  은지 : (놀라서) 아니 왜? 나 오빠네 프로그램 엄청 재밌던데.

  수오 : (심드렁) 그래? (상자 건네며) 저기에 있는 것들 좀 이 상자로 다 옮겨줘.

  은지 : (얼떨결에 받는다) 어? 어어…

  은지는 서류 파일이며 커피 컵 따위 잡동사니를 정리하다가, 받은 상자를 열어보고는 놀란다.

  은지 : 옴마야, 이게 다 뭐야? 여기 무슨 곤충 같은 게 있어. 죽은 거야, 산거야?

  수오 : 죽었을 걸. 귀뚜라미. 그거 미래의 식량 편에 출연했던 출연자야.

  은지 : 귀뚜라미가?

  수오 : 응. 무슨 미래식량연구가라는 사람이 자기가 집에서 식용으로 기르는 귀뚜라미라면서 데리고 나왔었지. 필수아미노산이 소고기의 몇 십 배라던가. 방송 끝나고 우리 먹으라고 놓고 갔어.

  은지 : 헐. 이걸 먹으라고?

  수오 : 응. 그게 그래 봬도 육식으로 망해가는 지구를 구할 미래의 식량이니까.

  은지 : 그럼 이 뼈는 다 뭐야?

  수오 : 공룡 뼈.

  은지 : (웃는다) 말도 안 돼. 닭 뼈 같은데.

  수오 : (진지하다) 그거 갖고 나온 공룡학자가 그러는데 조류의 조상이 공룡이래.

  우리가 맨날 먹는 치킨이 사실은 공룡고기인 셈이지.

  은지 : 엥? 공룡은 멸종했잖아?

  수오 : 멸종했다고 인정하기 싫은가 보지.

  은지 : (평범해 보이는 암석 조각 들어올리며) 그럼 이 돌멩이들은?

  수오 : 그건 운석.

  은지 : 운석?

  수오 : 눈이 내리다 녹아버리는 것처럼 뜨거운 별똥별이 떨어지다가 식어서 굳어지면 그렇게 되는 거야.

  은지 : 진짜? (돌멩이 다시 본다) 이게 우주에서 날라 온 별똥별이라고?

  수오 : 응. 생명이 다한 별. 언젠가 이 지구도 다른 행성이랑 충돌하면 다 산산조각 나서 저렇게 돌가루가 되고 말걸.

  은지 : 뭐야, 무시무시하네. 오빠, 여기 이상한 거 진짜 많다. 근데 있잖아… 지구가 정말 멸망할까?

  수오 : (당연하다는 듯) 몰랐어? 지금도 계속 사라지는 중인데.

  은지 : 그래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괜찮지 않을까?

  수오 :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럼 괜찮은 거야?

  은지 : 응? (무안한 듯 대답 못하고 있다가 화제를 돌리려 상자 속 비둘기를 꺼낸다) 근데 이 비둘기도 마술사가 놓고 간 거야?

  수오 : 아니. 루비가 스스로 여기 남기로 결정한 것 같아.

  은지 : 루비?

  수오 : 얘 이름. (비둘기 눈 가리키며) 눈이 루비처럼 빨갛잖아.

  은지 : 와, 예쁘다. 근데 루비가 스스로 결정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수오 : 녹화 끝나고 사무실 돌아와 앉아 있는데 느낌이 이상하더라고. 보니까 잠바 안주머니에 이 녀석이 들어있었어.

  은지 : 어머, 그게 왜 글루 들어갔대? 주인을 착각했나?

  수오 : 글쎄. 지겨웠나보지. 눈부신 조명, 엉터리 주문, 돈 냄새나는 주머니. 전문가란 인간들의 말장난. 얘도 그런 게 다 지긋지긋했나보지.

  은지 : 근데 오빠는 진짜 짤린 거야?

  수오 : 짤린 게 아니라 프로그램이 폐지된 거라니까. 하긴, 그게 그거다.

  은지 : 그럼 앞으로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거야?

  수오 : 글쎄다. 공무원 시험 준비나 해볼까.

  은지 : (실망한다) 뭐? 진심이야? 오빠 여기서 일하는 모습 진짜 멋있었는데.

  난 진짜 이해가 안되는 게, 우리나라가 과학기술 강국이잖아.

  수오 : 그게 뭐.

  은지 : 그리고 오빠는 과학고도 나왔잖아.

  수오 : 그게 뭐.

  은지 : 그리고 오빠는 자기일 진짜 열심히 하잖아. 생각도 창의적이고.

  수오 : 그게 뭐.

  은지 : 근데 왜 오빠는 맨날 짤리는 거야?

  수오 : (말없이 상자를 발로 툭툭 찬다) 이제 가자. 이건 쓰레기통에 다 갖다 버리고.

  은지 : 어머, 버린다고? 박물관 같은 데 기증해야 되는 거 아니야?

  수오 : 박물관은 무슨. 소품실에서도 안 받아줄 걸.

  은지 : (안고 있던 비둘기를 내밀며) 그럼 루비는 어떡할 건대? 얘도 버린다고?

  수오 : 그건… 그냥 여기 두고 가자. 주인이 찾으러 오겠지.

  수오와 은지 상자 들고 퇴장하면, 텅 빈 테이블 위에 빨간 눈의 비둘기가 홀로 남겨져 있다.


  5장


  눈 내리는 성탄절의 거리. 대형모니터 화면 켜지고 아나운서가 뉴스를 진행한다.

  “다음 소식입니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성탄전야제 행사로 마술쇼를 진행하던 마술사가 무대 위에서 쓰러졌습니다. 마술사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사인은 과로사로 밝혀졌습니다.”

  길을 지나던 엄마와 아이가 모니터 앞에 멈춰 선다.

  엄마 : 어머, 성탄절에 교회에서 무슨 일이래.

  아이 : 어? 비둘기다! 저기 아나운서 아저씨 주머니 속에 하얀 비둘기가 있어요!

  엄마 : 웬 비둘기? 잘못 봤겠지.

  아이 : 비둘기 맞다니까요! 머리를 막 이렇게 내밀고 눈도 깜빡였어요. 앵두처럼 빨간 눈이요.

  엄마 : 아유, 춥다. 얼른 가자.

  엄마가 잡아끄는 손에 이끌려가는 아이.

  화면은 뉴스에서 예능, 음악, 쇼 등 수십 개 채널로 돌아가다가 꺼지고 무대는 암전된다.

  - 끝 - 




  <당선소감>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는 마음으로 쓰겠다


  저 비둘기는 왜 저렇게 더러운가. 어느 마술사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비둘기 한 마리가 제게 오래도록 떨쳐지지 않는 질문 하나를 남겼습니다. 본디 흰빛이었을, 그러나 사람 손을 너무 타서 더 이상 희다고 할 수 없는. 본디 새였을, 그러나 더 이상 자유롭게 날지 않으므로 새라고 할 수 없는. 그것은 곧 저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질문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어야 했고, 스스로 ‘문학적 증명’이라고 부르는 글쓰기를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가까스로 백지는 채웠지만 답은 여전히 찾는 중입니다. 

  ‘오늘의 과학’은 ‘오늘의 문학’이기도 합니다. 과학과 마술이 한 끗 차이이듯 문학과 엔터테인먼트가 한 끗 차이가 되어버린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불 꺼진 방송국 스튜디오에 앉아 저만의 무대를 그려본 적이 있습니다. 그건 방송극도 아니고 연극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말과 몸짓과 빛이 각각 연기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장르에 대한 무지가 저로 하여금 거침없이 쓰게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글쓰기가 딸을 불행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엄마,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제 글이 얕으나마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글로써 아름답고 귀한 것을 빚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신 시인 K와 추상을 구체로 디코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힘을 보태준 공학자 H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무엇보다 여러모로 부족한 글을 기꺼이 받아들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결정에의 고민이 헛되이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정진하겠습니다.  


  ● 1982년 서울 출생.

  ● 고려대 영문과 졸업.

  ●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전문사.
  ● 다큐멘터리 작가.


 

  <심사평>


  신선한 필치로 그려낸 ‘존재 불안’… 문학적 공력 탁월 


  당선작과 논의 대상작을 가르는 기준은 하나였다. ‘새롭게 발견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가. 극작술의 미흡함은 대동소이하지만 당선작 외에도 고통받는 현실과 뒹굴고 있는 그들만의 고군분투를 응원하고 싶다.

  ‘살잉모의’는 온라인게임상의 욕망이 어떻게 현실에서 살인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작가가 그 문제를 가볍게 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작품의 의도가 살인 이후에 직접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물, 상황, 선택의 삼박자를 타고 나타났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물맛 여행’은 연극을 해본 사람이 쓴 듯 이야기 라인이 분명했다. 그러나 가족의 봉합을 암시하는 결말은 연극이 따뜻하기만 한 게 좋을까 하는 오래된 비판을 피해 가기 어렵다. 

  ‘쥐’는 재치가 넘친다. 손톱을 먹은 쥐가 그 사람처럼 바뀐다는 설화적 모티브를 미래사회 인간 복제와 맞붙였다. 그러나 발상을 넘어서서 세계의 개연성이 확보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당선작인 ‘루비’는 언제든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요즘의 존재 불안을 신선한 필치로 그려냈다. 자기 세계가 있으면서, 자기 질문을 갖고 그 너머를 보려고 한 장점이 있다. 무대에 올리면 관객이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문학적 공력이 더 돋보이는 이 희곡을 선정한 이유는, 앞으로 나올 극작가들이 현실의 새로운 발견을 더욱 다양한 곳에서 끌어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세계는 양태를 계속 바꾸고 있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인간과 현실의 문제는 여전하다. 이제 극작가들이 답할 차례다.

 

심사위원 : 배삼식, 장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