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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릴케의 전집 / 김건홍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지만 말 한마디 못했고 소리 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사방으로 흐르는 하이얀 잉크에
투명한 창을 내고 시를 쓴다
바람을 묶어 단단히 메어두고
그 시로 난 길에 청보리밭
청명한 내음이 입속에 오도독 씹힐 때
영원으로 가는 내밀한 계단이
나직이 나를 부를 때
그 손 잡아 여여히 흐르는 강으로 회양목을 돌아
고이 들어앉은 앉은뱅이 숲
오래된 서커스처럼 안개 같은 향이 피어 오른다
영혼을 견인하는 차 야곱의 사다리
스톡홀름 증후군
콰지모도 콤플렉스의 아가씨들
영원을 향한 길목에서 자유를 찾은 소녀들의 밤
인생의 복락 삶의 뒤안길
수를 셀 수 없는 생의 명과 암
시간을 잊은 고독의 방
파두의 라틴어 원류가
깨어 있는 영혼으로 침묵을 두드리며 춤을 춘다

아서라,
영겁의 향기 부처님 자비가
고독을 빛으로 가득 채운다


  <당선소감>

   "부처님 넉넉함처럼…시는 나의 오랜 친구시인은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평가 두렵지만, 휘둘리지 않을 것"



  아침 산책을 마치고 오니 당선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처님의 자비가 눈처럼 내려앉은 날이다. 따스한 햇살이 편백나무에 부딪혀 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날부터 신춘문예 준비를 했다. 행복하기도 하고 고독한 시간들이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여서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했다. 때로는 의구심이 들 때에도 있었지만 신의 자비하심으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진실한 시간으로 저와 시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다.

  시를 쓰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에 진실해야함을 의미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나의 진실을 붙잡고 마주한다. 그리고 진실한 나와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바로 글과 시로써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들과 씨름해야만 했다. 삶의 의미와 가치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신과 종교에 대한 갈망은 해가 거듭될수록 계속 되었다. 누구나 신을 찾고 갈증을 느끼는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고민들인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많이 고민해 왔다. 수많은 학자들이 신에 대해 연구하고 정의내리고 있지만 신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 분이다. 우리는 매일 신의 기적을 체험하는 행운아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멈추고 자신안의 자비와 평화 고요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순간을 글로 쓴다는 점은 참 행복한 일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부처님의 넉넉함처럼 시 또한 나의 가장 오랜 친구다.

  요즈음 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간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럴수록 문학과 시가 많이 필요한 세대다. 우리를 진실로 살게 하는 것은 영혼을 고양시키는 아름다움이다. 성인들은 물론 시와 문학을 우리 아이들이 더 많이 접하고 더 많이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아름다운 사상은 문학과 시로 노래하기에 무궁무진하다. 시인에게는 그 지혜가 아름다운 바다와 같게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독 속에 분투하고 있을 많은 미래의 예술가들과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작은 등불이 되어주고 싶다.“이제 막 시를 시작하며 처음 응모한 신춘문예였는데 이렇게 빨리 등단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도마에 오른 생선처럼 낯선 독자들의 평가가 두렵지만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휘둘리지 않고 책임감 있게 시를 쓰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 ‘릴케의 전집’으로 당선된 김건홍 씨(28)는 “당선 통보를 받았을 때 마음을 떠올리면 두려움 80%, 설렘 20%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미학과 미술사, 예술사 등을 이론적으로 다루는 예술학부를 졸업한 예술학도였다. 프랑스 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그린비) 등 갖가지 미학 관련 책은 탐독했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시는 한 편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학창 시절 내내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영화였다. 김씨는 “창작을 하고 싶어 스물한 살 때부터 단편 영화를 찍기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돈과 사람이 많이 필요해 내 성향과 맞지 않았다”며 “졸업 직전까지 취업과 대학원 진학을 두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2017년 교환학생으로 떠난 독일에서 만난 한 친구가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동국대 문예창작학과에 다니며 시를 썼던 그 친구는 독일 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게 여러 시집을 빌려줬다. 그때 처음 읽은 시집이 황병승 시인의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이었다. “충격에 휩싸였어요.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보던 시와 너무나 달랐어요. 이런 시 세계가 있다는 게 재밌기도 했죠. 독일 생활 틈틈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이수명 시인의 시집 《물류창고》(문학과지성사)를 읽고 시인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겠다고 결심했다. 시를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난해 초 명지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정말 행운이었던 게 대학원 첫 수업이 이수명 시인의 강의였어요.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고 조교일도 하면서 열심히 시를 썼죠. 더욱 운명적이었던 건 이번 당선 시를 과제로 제출했을 때 이 시인이 ‘정말 좋은 시’라며 의도치 않게 큰 의미를 부여해줬어요. 용기 내 응모하게 된 계기죠.”

  이제 막 시인으로 출발하는 그에게 시란 어떤 존재일까. “시는 달아나는 현상 같아요. 그 잡히지 않는 시의 뒷모습을 쫓아서 저도 같이 달아나는 거죠. 시는 항상 누군가에게 쫓기는데 잘 피해 제 앞에서 먼저 달아나요. 그 달아남 속에 운동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시는 제게 즐거움을 주는 도망자예요. 그렇게 저만의 시 세계를 모색하고 탐색하며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어요.”

  그의 당선 시들은 모두 무겁지 않은 감성이 녹아 있다. 그가 꿈꾸는 훗날 시인 김건홍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재미와 웃음을 주는 시인”이라고 했다. “사실 아픔이나 상처를 해소하려고 시를 쓰진 않아요. 그냥 묘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게 제 행복이자 시를 쓰는 이유예요. 진지한 건 주관적이지만 웃기는 건 보편적인 거잖아요. 앞으로도 보이지 않는 감정적이고 내면적인 발화보다는 실제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면서 이 보편과 특수를 잘 담아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매순간 불확실한 세계…무한한 시점으로 포착하겠다
당선 통보를 받고

  어디에서 어떻게 세계와 마주해야 하는지 늘 고민했다. 그런 고민 속에는 내 존재 또한 한 곳에서 정립되리라는 믿음과 동시에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세대적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디서 세계를 보고 있는지,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는지 불확실하고 보이지 않았다. 이는 정작 눈앞에 놓인 세계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시를 써나가면서 들곤 했다. 시를 통해 그 방향을 조금씩 틀고 있는 것 같다.

  시는 내 위치를 때론 작은 의자 위로, 때론 발코니로, 숲으로, 이국으로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곳으로 옮겨 놓곤 했다. 시는 내게 무한한 시선과 시점으로 세계를 포착하는 즐거움을 알려줬다. 내 앞에 매 순간 달리 놓이는 세계에 눈을 돌리겠다. 축복처럼 주어진 현상들과 사물들을 깊고 차분히 감각해 보겠다.

  부족한 글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부족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지난 1년, 내 시보다 먼저 내 존재를 헤아려주신 김민정 선생님께, 흐릿하게 서 있는 나를 언제나 선명한 곳으로 인도해주신 이수명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반짝이는 문학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명지대 원우들과 진심으로 서로의 시를 빚고 서로의 힘이 되어준 시 스터디 ‘쓺’의 문우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 나 자신보다 한발 먼저 나를 믿고 응원해준 지영에게 감사드린다.

  ● 1992년 경북 상주 출생 
  ●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심사평>

  "응모작들의 높은 수준과 시적 풍요로움문학적 상투성 답습 않는 시적 압축미 돋보였다

  본심에 오른 대부분의 작품은 일정 수준을 넘어섰으나 그 중 일부는 불교적 소재나 불교적 사유가 밖으로 드러나 어색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숙고의 대상이 된 ‘안나푸르나’, ‘집에 들다’, ‘선잠’, ‘생각의 그늘’, ‘불일암 오두막’, ‘고독의 방’, ‘끝’ 등의 시편들은 상당 수준의 시적 공력을 엿볼 수 있었다. 시적 언어의 구사나 이미지의 형상화 능력 등에 있어서 오랜 수련을 알 수 있게 하여 응모작들의 높은 수준과 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위에서 거론한 작품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을 떠나지 않은 것은 ‘집에 들다’, ‘선잠’, ‘생각의 그늘’, ‘고독의 방’ 등 4편이었다. ‘집에 들다’는 비교적 간결한 시인데 ‘국수 꼬리 같은 나를 보았다’와 같은 독특한 표현이 주목되었으며 마지막에서 불교적 사유를 유연하게 보여주었다. ‘선잠’은 남편을 잃고 제삿날 시골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우회적 어법으로 잘 표현해 내었으나 불교적 소재가 유연하게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의 그늘’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를 사유하는 과정을 시적으로 변용시키는 유연함을 보여주었으며 긴 시행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나가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지막 부분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고독의 방’ 역시 사변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산뜻한 첫 부분의 시작과 “청보리밭 청명한 마음이 입 안에서 오도독 씹힐 때”와 같은 감각적인 표현이 인상적이었으며 중간 부분에서 시어의 열거로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으나 마지막 결말의 처리에서 탄력적인 긴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상의 시편들은 각각이 지닌 장단점으로 인해 우열을 정하기가 어려워 당선작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다시 작품을 정독하고 비교한 다음 다른 분들의 작품보다는 완결성을 지닌 ‘고독의 방’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결말 부분에서 ‘고독을 빛’으로 채워 부처님의 자비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을 강점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많은 편수의 시조가 최종심에 넘겨졌으며 이들 작품 또한 세심히 읽어 보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편들이 너무 형식에 억매이거나 과장된 어법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선작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당선된 분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올해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은 예년에 비해 응모작 수준이 높았다. 문학적 상투성을 답습하지 않은 새로움을 보여주면서 시적 압축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특히 고전적인 세계를 다룰 때도 그 고전적인 것이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당선작을 놓고 끝까지 겨룬 것은 송은유와 김건홍 작품이었다. 송은유의 ‘화분의 위의(威儀)’는 언어를 자기식으로 감각 있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수준급이고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대의 풍경들을 그릴 줄 안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반면 부분 부분 문학적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한 표현들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숙고와 토론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건홍의 ‘릴케의 전집’은 간결하고 압축적이면서도 비의와 상징성이 풍부하다는 점, 열린 서사 구조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 동봉한 시편들의 편차마저도 금방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이게 했다. 앞으로 한국 시의 새로운 지층의 결을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흔쾌하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송재학, 손택수, 안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