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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 선혜경

그런 걸 뭐하러 세어두고 있겠어,
당신은 꿈에서도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나봐요, 창틀을 베고 누운 당신도 닫힌 서랍보다 늦게 눅눅해지는데

궁금해
그런 날의 당신은
그림자 대신 검은 석유를 품고 다녔는지

그런 날의 빗방울에게서
풍경의 심장이 뚝뚝 떨어져 나갈 때
벌려둔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는지

새벽의 혀를 길게 베어 문 촛불처럼
가장 빨리 죽는 건 악몽이라 믿으며

밤새 얼얼하게 녹아내리는 것들은 모두
내일의 미아가 되어 버리기를

품,
이라 발음하면
옅어진 등불에 팔다리가 생겼는지

촛농이 굳어버린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빛에 익사하길 바랐다

상처투성이의 손금을 털어내려고
손바닥을 자꾸만 흔들어도

온통 웅덩이였다

모르는 사람의 초상을 여기저기 그리고 다녔다


  <당선소감>

   "아무것도 몰랐던 열다섯 살처럼 다시 시작"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단어가 기억나지 않을 때 저는 시를 썼습니다. 내내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어요. 여러 편을 써도 이런 마음이 가시질 않았고, 제발 떠나가라 기도하며 시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습니다. 항상 마음은 언어보다 앞섰고 나는 걔를 따라갈 수 없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시만큼은 제일 잘 알고 계속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던 와중 당선 전화를 받게 됐습니다.

  기쁘다기 보단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늘 곁에 있었던 시가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시와 다시 통성명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도 편히 못 잤던 것 같습니다.

  쓸모없는 일이라면 아무거나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며칠 동안을 몰두하고 있었는데, 닭살 돋듯이 간지러운 기분이 또다시 들기 시작했어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한 번 더 막무가내로 시랑 친해져봐야겠다고. 아마 저는 내일도 무언가를 끄적거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열다섯 살처럼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요.

  제가 썼던 시마다 아낌없이 칭찬만 해주셨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하고 보고 싶어요. 올 한 해 동안 자신의 시처럼 퇴고 방향을 같이 고민해주셨던 안희연 교수님 감사해요. 지겹도록 내 시를 계속해서 읽어주었던 서연이와 늘 옆에서 응원해줬던 도영이 사랑해요. 그리고 짧은 시간에도 많은 조언 해주셨던 조선대 문창과 교수님들, 문창과 시 스터디, 당선 소식을 기뻐해준 부모님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어요.

  이제 제 인생에 있어서 시는 빠질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약간은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써보려고 합니다.

  ● 1996년 광주 출생
  ●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심사평>

  "지나칠수 없는 골똘함, 명랑한 머뭇거림의 미학

  최종적으로 살펴본 작품은 ‘보성댁 출항기’, ‘스타킹을 신고’, ‘등뼈 해장국’,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양귀비와 사귀다’, ‘아버지의 창고’ 등의 원고를 보낸 여섯 분의 작품이었다. 금년 신춘문예 투고 작품들은 이미지를 위주로 한 작품보다는 말하기 방식에 기댄 작품이 많았다.

  ‘보성댁 출항기’를 쓴 이는 시 쓰는 솜씨가 안정되어 있으나, 자기만의 어법이 없다. ‘스타킹을 신고’의 투고자는 ‘현재의 기억은 늘 과거의 기억에 불친절 해’ 같은 구절이 빛나지만, 몇 군데 시상 전개가 자연스럽지 않은 점이 걸린다. ‘등뼈해장국’의 경우에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으나, 상상력에 새로움이 없다.

  시는 모범 답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답지를 지우고 난 후에 새로 쓴 한 줄의 고민 속에 있다. ‘양귀비와 사귀다’의 투고자는 구어체 활용 능력이 뛰어나고, 시상을 낯설게 전개하는 솜씨는 좋으나, 작위적 수사가 많다.

  ‘아버지의 창고’를 투고한 이는 사투리를 굴리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러나 시는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을 그대로 옮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고민 끝에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외 2편을 투고한 선혜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선씨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읽으면 시어의 의미가 선명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 점이 씨의 약점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 사이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골똘함, 명랑한 머뭇거림이 있다. 속도 위주의 세상에 이런 느림 하나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씨의 손을 들어준다.

심사위원 : 이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