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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 / 백점례

 


참 고단한 항해였다

거친 저 난바다 속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

한 생애, 다 삭은 뒤에 가까스로 내게 왔다


그 무슨 불빛 있어

예까지 내달려 왔나

가랑잎 배 버선 한 척 나침반도 동력도 없이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


모지라진 이물 쪽에 얼룩덜룩 번진 설움

다잡아 꿰맨 구멍은 지난 날 내 죄였다

자꾸만 비워낸 속이 껍질만 남아 있다


꽃무늬 번 솔기 하나 머뭇대다 접어놓고

주름살 잔물결이 문지방에 잦아든다

어머니, 바람 든 뼈를

꿈꾸듯이 말고 있다




  <당선소감>


   "아픈 마음 어루만져주는 시조"


  세상에 태어나서 늘 나에게 기쁨만을 안겨준 아들이 큰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날이었다. 이틀째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 나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춘문예 공모에 작품을 보낸 것마저 깜빡 잊고 있었는데 당선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움켜쥐고 있었던 문학, 내가 모든 힘든 상황들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학의 힘이었다. 마침내 그 문학이 내게 이렇게 큰 위로와 기쁨을 안겨 주는 순간이었다.

  막연하게 문학의 세상을 그리워 해온 나에게 적극적으로 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10년 동안 마음 써 주시며 격려해 주신 경주문예대학 이근식 원장님. 그리고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통신으로 귀한 시조 공부를 하게 해 주시고 자상하게 챙겨 주신 민족시사관학교 윤금초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또한 시조 쓰기를 권유하셨던 정혜숙 시인께도 이 기회를 빌려 인사를 드리고 싶다.

  매일신문사와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보답할 수 있도록 좋은 시조, 아픈 마음들을 어루만져 주는 시조를 쓰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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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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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식을 되로 될 때 반듯하게 깎아서 정량만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덤으로 한 줌 더 얹어 주기도 한다. 그 한 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응모작들은 저마다 되로 담기에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흑백 속에 숨어 있는 긁힌 상처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에 다소간 편차를 보였다.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들을 길은 없는 선자(選者)는 여러 작품들 중에 단 한 편만 으뜸의 자리에 앉힌다.

  당선작 백점례 씨의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의 시적 배경이나 제재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생을 "항해"로 본 것이 그것이고, 몇 군데 낯익은 표현이 드러나고 있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제목에서 보듯 참신한 착상과 네 수 한 편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주제 구현을 향한 강한 응집력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다른 응모작들을 뒤로 제쳐놓게 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버선”으로 은유된 “배”의 항해를 육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와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 등과 같은 대목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인 재해석과 리얼리티를 내장하고 있다. 함께 보낸 작품들도 고른 형상 능력을 보이고 있어 신뢰를 준다. 그동안의 담금질을 바탕으로 기량을 잘 살린다면 오늘의 영광에 값하는 단단하고 옹골찬 작업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끝까지 남은 작품들은 고은희 씨의 '입, 혹은 구두', 김석이 씨의 '아우라지', 이한 씨의 '과일가게 앞에서'이다. 깊이 있는 육화 과정과 새로운 감각이 돋보였지만, 마무리가 미흡하거나 호흡이 짧아 아쉬운 점 등이 당선작에 못 미쳤다. 에오라지 시조 하나만 끌어안고 일평생을 천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회는 올 것이다. 신묘년 새해에도 시조의 밝은 미래를 보여준 모든 응모자들의 건승과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 이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