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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의자의 얼굴 / 고은희

 

땡볕이 그늘을 끌고 모퉁이 돌아간 곳

누군가 내다버린 꽃무늬 애기 의자에

가난을 두르고 앉아

졸고 있는 할아버지


무거운 세월 이고 허리 펴는 외로움이

털어도 끈끈이처럼 온 몸에 달라붙어

허기진 세상은 온통

말줄임표로 갇혀 있다


살다 떠난 얼룩만이 가슴깊이 내려앉은

폐기물 딱지조차 못 붙이는 그 몸피여!

사는 건 먼지 수북한

그리움 또

견디는 것


오늘도 먼 길 돌아 헤살 떠는 한줄기 바람

먼저 간 할머니 손길 덤으로 묻어온 듯

그 옆에 폐타이어도

슬그머니 이웃이 된다




  <당선소감>


   "'나만의 속도' 지켜가는 삶 중요"


  도서관, 낯설면서도 낯익은 방식으로 책들은 낙담 속에서도 웃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는 마음에 이르러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어느새 당선통보를 받는 날이 4학년 2학기 마지막 기말시험 공부를 하던 도서관. 전화기를 든 채 허둥지둥, 공회전하는 자동차 타이어처럼 귓속이 붕붕거리고 가슴이 멍했습니다. 늦게 출발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까지 달리는 것이 진정 소중한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빠른 삶도, 느린 삶도 아닌, '자신만의 속도감'을 체득하고 그 속도를 차분하게 지켜나가는 삶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며 따뜻하고도 낯선 시선으로 삶을 포착해나갈 것을 허락해주신 부산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꾸준하게 오래도록 쓰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야생마 같은 저에게 시조라는 틀을 잡아주시고 이끌어주신 윤금초 교수님, 늦은 나이에 진학한 학생을 열심히 지도해주신 박영우 이지엽 황인원 교수님, 외에도 경기대 문창과·국문과 교수님들 고맙습니다. 딸의 늦은 공부 뒷바라지로 손목 힘줄이 툭 붉어져 나온 어머니, 묵묵히 나를 지켜 준 남편, 그리고 아들 딸, 재진·지혜에게 무엇보다 사랑을.



  ● 1961년생.
  ● 2010중앙시조백일장 1월 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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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노인문제 따뜻한 시선으로 형상화"


  많은 응모작 가운데 값싼 온정주의, 식상한 고전적 사고의 답습, 낡은 생활 서정, 필요 이상의 민족적 혈기 등이 1차에서 제외되었다. 시는 말이 아니라 언어의 이미지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춘문예는 역량 있는 신인의 새로운 감성을 찾아내는 일이지 결코 낡은 서정의 윤곽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윤송헌의 '생레미 몽유도'는 한때 유행했던 소재의 선택이, 이태호의 '분청사기상감연당초문병' 역시 빼어난 표현임에도 고전적 소재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신선하지 못했다.

  김희동의 '겨울 소리를 보다'는 정갈하나 단조로운 내용이, 김다영의 '악수'는 압축과 절제미의 부족이, 이윤훈의 '폭설'은 패기를 앞세운 나머지 섬세한 표현들을 놓쳤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남은 작품은 김범열의 '을숙도 노랑부리저어새'와 고은희의 '의자의 얼굴'이었다. 앞의 작품은 부분 부분 모호한 표현들이 결정적인 흠이 되었다. '의자의 얼굴'은 시적 완성도 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고, 요즘 중요한 사회 문제로 등장한 노인 문제를 소재로 선택한 점 역시 주목할 만했다.

  노인이라는 소재를 낡은 의자에 비유해 이만큼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거듭 당선자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평가하며,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현대 시조의 부족한 정서적 공간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리라는 높은 신뢰감을 갖게 된다.



심사위원 : 유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