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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둔 고래 / 최영정


밤새 헛기침하는 저 구두
신발장에서 꺼내 한 손에 낀 채 닦아내다가 
밑창에 
작게 뚫린 고래의 숨구멍을 보았다 

비가 올 때마다 
얼마나 많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컴컴한 동굴 같은 
저 안에서 솟구치고 솟구쳤을까 

내 마음이 내딛는 자리마다 
생겨나는 커다란 물웅덩이에 
빠진다. 

정년퇴임 후 아버지가 가지런히 벗어둔 
저 구두는 
숨 쉬러 물 밖으로 가끔 뜬소문처럼 올라온다는 
고래들처럼 
요즘엔 
경조사 빼곤 좀처럼 밖을 나서는 법이 없다.

다시 마른 
헝겊만으로 구두를 닦고 또 문지르는데도 
무슨 일인지 
자꾸만 눈부신 물광이 
구두에서 난다. 



[심사평]


머니투데이가 실시하는 경제신춘문예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예년에 비해 응모자수가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응모자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작품 수준까지도 높아졌다.

 

그러나 응모자들이 응모 전에 한 가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머니투데이가 실시하는 것은 다른 신문의 일반 신춘문예와는 다른 '경제신춘문예'이다. 작품 소재가 금융이든 부동산이든, 기업경영이든 일반 경제현상에 대해서든 작품 안에 여러 형태의 경제적 행위와 현상을 녹여내야 한다. 아주 잘 쓴 작품이지만 여기에 해당하지 않아 제외한 작품들이 있다.

 

대상으로 뽑은 <돈이 내게 준 교훈>은 평화롭던 가정에 칠팔년 전 갑자기 날아온 노란 봉투(연대보증에 대한 변제의무를 알리는) 하나로 한 가정이 어떻게 사채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또 거기에서 헤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과 많은 고통이 따랐는지를 수기형식으로 쓴 글이다. 자신이 겪은 경험을 차분하게 수기 형식으로 쓴 글이지만 소설보다 더 가독성이 높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수시로 받게 되는 사금융 문자들에 대한 실상과 경각심,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돈에 얽힌 여러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설득력 있게 얘기한다. 수기로서도 그렇고, 변형된 소설로서도 그렇고 아주 잘 써내려간 글이다.

 

우수상으로 뽑은 <오라해서 갔더니>는 일곱 명의 트레일러 차주들이 지입차 형식으로 연합한 사무실의 대표와 이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회사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사회 곳곳에 갑과 을의 관계가 있고, 이런 갑과 을의 관계가 운송부분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며 일어나는지를 소설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간 중간 상황설명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부분도 있지만 나름대로 그쪽 세계의 문제점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밖에 선택에 들지는 못했지만 중국에 진출한 <한류 김밥집> 이야기와 <예술과 경제성의 유기관계>에 대한 수필, 서로 상관없을 듯 싶으면서도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 곳곳 기업의 어떤 결정들과 현상들을 하나의 작품 안에 긴밀하게 모아 새로운 틀을 보여주는 소설 <체인 리액션>도 아주 잘 쓴 작품들이다. 계속 정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 시 부문에서도 예년에 비해 현저하게 응모작이 늘어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시적 완성도가 높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 <퇴출>, <골목 앞 바다>, <벗어둔 고래>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새집을 보며 "새들처럼/기다림처럼/내 집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동시처럼 펼쳐 보이고 있는 수작이었다. 다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을 최종작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게 만들었다.

 

<퇴출>은 한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용직 노동일을 구하는 노동자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는 가자미와 연결시켜 풀어가고 있는, 느낌이 강한 작품이었으나 시적 연결성이 떨어지는 게 흠이었고 <골목 앞 바다>는 함께 응모한 <푸른 꽃>과 함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응모작 전체가 고르지 못한 점이 지적됐다.

 

결국 시 부문 최종작으로 <벗어둔 고래>가 선정됐다. "정년퇴임 후 아버지가 가지런히 벗어둔 구두"를 닦으며 그 신발에서 묻어나는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자꾸만 눈부신 물광이 구두에서 난다"는 시의 마무리와 함께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하늘 여인숙> 등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이 시를 최종작으로 뽑는데 믿음을 줬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응모작 대부분이 작품 수에 비해 시적 완성도나 깊이가 떨어져 대상과 같은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가작에 머무르게 한 점을 아쉽게 생각하며 내년을 기약해보기로 한다.

 

심사위원 이순원(소설가) 이희주(시인)